야고보는 고난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을 그의 독자들에게 제시함으로 그의 편지를 결론짓는다. 5:7-12에서는, 첫 번째 반응인 인내에 대한 요청이었다. 고난받는 자들은 주께서 압제자들을 심판으로 다루실 것을 시인하도록 촉구받는다. 이제 야고보의 생각은 기도에 이르게된다. 고난에 대한 또 다른 반응은 인내만큼 중요한 기도 훈련이다. (229.1)
 기도는 서신의 결론적 두 구절을 제외하고, 매 구절마다 언급된 단어라는 사실에서도 증명되는 것처럼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13-18절을 보라). 여기서의 기도는 개인적인 것과 공동적인 것 둘 다이다. 문제, 기쁨, 곤란, 병, 이 모든 것에 대한 반응은 기도여야 한다. 그 시련들이 신체적, 감정적, 혹은 경제적인 것이든지 간에, 야고보는 의인의 간절한 기도가 힘이 있고 효과적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229.2)
 ■ 말씀에 들어감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려 깊게 13-20절을 두 번 읽으라. 그리고 아래의 질문에 응답하라. (229.3)
 1. 5:14, 15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 의해 시행되는 공적인 “신유 치료”에 대한 문제를 말하는 것인가? 당신의 의견으로는, 모든 신유 치료자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가? 만일 아니라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야고보서의 이 부분이 도움이 되는가? 설명하라. (230.1)
 2. 만일 병자가 낫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의 부족 때문이라는 것이 15절의 의미인가? 그것은 병자를 위한 기도자 때문인가 아니면 병자 자신이 전체적으로 온전히 믿지 못해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가? 설명하라. (230.2)
 3. “죄를 고하는”(16절) 것은 개인적인 문제인가 공적인 문제인가? 만일 공적인 것이라면(혹은 둘 다라면), 대중적으로 고백하지 않아야 하는 어떤 죄들도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대중적으로 고백해야 하는 죄와 개인적으로 고백해야 하는 죄를 결정짓는 기준으로 사용될 목록을 작성하라. (230.3)
 4. 열왕기상 17, 18장의 엘리야의 이야기와 야고보서 5:17, 18을 비교하라. 유사점과 차이점을 기록하라. 야고보가 그의 요점을 예증하는 데 왜 이 이야기를 선택했을까? (230.4)
 5. 19, 20절과 마태복음 18:15-17절을 비교하고 대조하라. 죄인들을 재회심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런 때는 언제인가? 설명하라. (230.5)
 ■ 말씀을 탐구함
 고난, 즐거움, 병에 대한 반응
 어떤 사람이 “고난” 중에 있다면, 맹세하거나(5:12) 혹은 참지 못하고 자기 손으로 무엇인가를 잡으려는(7절) 대신에, 야고보는 기도하라고 권면한다(13절). 13절“고난”은 (이 구절을 읽은 후에 어떤 사람들이 시도하려는 것처럼) 병으로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야고보는 잠시동안 특별한 고난의 유형을 다룰 것이다. 이 불행이나 곤경은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라고 바울이 말한 딤후 2:8, 9의 고난과 병행한다. 동일한 헬라어 단어가 여기서는 “고난”(kakopatheō; 약 5:10을 보라)으로 사용된다. 강조점은 더욱더 영적이고 감성적인 곤경이다(Hayden, 258, 263). 어려운 시대들이었다. 야고보의 공동체는 압제적인 부자들의 손아귀에 고통받고 있었다. 그의 서신은 불안정한 시대에 쓰여졌다. 셀롯당의 활동은 증가되었고 퍼져갔다. 야고보는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었는가? 그렇다, 하지만 그는 불행과 어려운 시대에 단지 한가하고 수동적인 반응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는 능동적인 반응을 요청했다. 그는 금욕주의자들의 자포자기의 생활 양식(modus operandi)뿐만 아니라 “불에는 불로 공경”하는 방식도 거절했다. 대신에,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에게 기도하도록 요청한다. (231.1)
 이 권면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됨”(눅 18:1;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엡 6:18; 살전 5:17)을 끈질긴 과부의 비유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님과 바울처럼, 야고보의 강조점도 정말로 지속성에 대한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기도의 내용이 이러해야 함을 알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난이 제거되도록 요청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둘 다인가? 야고보는 그런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은 기도하라는 것이다. 진실한 기도는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힘이 있고 효과적이다(16절). (231.2)
 비록 야고보의 주된 관심은 고난의 주제이지만, 그는 즐거운 한 절을 삽입한다: “즐거워하는 자가 있는냐 저는 찬송할지니라”(13절). “즐거움”(euthumeō)이라는 단어는 외적인 즐거움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외부적 환경과 압도적인 조건들에 좌우되지 않는 감정과 관련되어있다. 그것은 “좋은 때이건 나쁜 때이건 상관없이 사람이 가지는 마음의 희락과 즐거움이다. 이것은 바울이 그들의 배가 곧 파선할 위험에 처해 있을지라도 그의 동료 여행자들에게 갖도록 북돋아 주었던 행복한 감정이다(행 27:22, 25)”(Moo, 175, 176). (231.3)
 이 내적인 기쁨의 증거로서,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에게 “찬송”함으로서 외부적으로 그것을 표현하라고 권면한다. 이 구절에서 번역된 헬라어는 pasllō이다. 이것은 하프를 연주하거나 카펠라(capella)를 노래하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R. V. G. Tasker는 이 단어에서 영어 단어 psalm(찬송)이 파생되었으며, “원래는 현악기를 튕겨 연주하거나, 하프의 반주로 노래하는 것을 의미했다”(128)고 저술했다. 악기를 사용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즐거움의 표현을 요구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런 표현들을 개인적으로 할 것인지 바울이 권면한 것처럼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엡 5:19)를 대중적으로 노래할 것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절의 전체적인 문맥은 즐거운 사람의 음악뿐만 아니라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의 기도도 공적인 공동체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표현되어야만 한다고 제안한다. (232.1)
 5:13의 일반적 고난과 곤경으로부터, 야고보는 다음으로 고난의 특정한 형태인 병으로 초점을 맞춘다. 문맥상 이 병은 일시적인 질병이나 보통의 가벼운 병이 아니라 심각한 것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 병자는 아마도 자기의 주거를 떠날 수도 없을 정도인 실정 때문에, 장로들을 청해야만 한다. 기독교회는 수세기 동안 이 구절을 극단적인 병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본교 성경 사전에서는 “8세기까지 성경의 이 구절은 카톨릭이 오늘날 병자 성사나 혹은 죽은 자를 위해 교회의 마지막 의식에 대한 관습을 지지하는 구절로 사용되었다. 1551년 제14차 트랜트 종교회의에서 야고보가 여기서 기름의 성례전적 효력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했다”(Nichol, ed., 7:540)라고 기록한다. 하지만 야고보는 어떻게 병든 사람이 그 앞에 장로를 청하여야 할 지를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것은 한 사람이 병이 어느 정도 들게 되면(그의 독자들은 그 상태를 매우 잘 알았다), 장로들은 기도하도록 요청받는다. 이것은 각 개인이 스스로 기도하라는 이전 구절의 명령과 꽤 다른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저자는 병자에게 다른 사람의 기도가 유익이 됨을 역설한다. (232.2)
 이 부분에서 질문이 야기된다: 기름 붓는 일을 수행할 “장로들”은 누구인가? “교회의”라는 질적인 구절 때문에, 그들은 사도행전 11:30; 15:2, 4, 6, 23; 20:17, 28의 사람들과 비슷한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구절들에서, 장로들은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지도자들이거나 후대의 교회의 감독자나 목양자들로 언급될 수도 있다. (233.1)
 만일 야고보서가, 우리가 논의한 것처럼, 교회가 유대주의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기 전에, 그리고 장로와 같은 직책이 기독교의 독점적인 것으로 발전되기 전에 쓰여졌다면, 그리고 야고보의 서신이 단지 예루살렘의 작은 신앙 지체들보다 더 넓은 청중들에게 쓰여졌다면, “장로들”은 더 광범위한 의미를 내포할 것이다. 야고보는 다양한 지역의 회집(ekklēsia, 전통적으로 “교회”로 번역됨), 유대인 혹은 그리스도인, 회당이나 그리스도인 교회의 나이 많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Easton, 15, 16; Adamson, The Epistle, 197; Martin, 207).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야고보의 관심은 우리의 관심과는 매우 다르다. 우리는 누가 특별한 의식을 수행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야고보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233.2)
 해야 할 두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병자를 방문하여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둘째는,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5:14)는 것이다. 먼저, 병자를 방문하는 것은 유대주의와 예수님에 의해 높게 평가되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마지막 비유에서, 그분은 병자를 방문했던 자들에게 임한 구원에 대해 말씀하셨다(마 25:36). 그리스도 이전에, ben Sirach도 “병자를 방문하는 일에 머뭇거리지 말라. 왜냐하면 그 같은 행동으로 네가 사랑받을 것이다”(Sir. 7:35)라고 기록했다. 후에, 우리는 유대 탈무드에서 발견한다: “병자를 방문한 사람은 단지 침대나 의자 곁에 앉아있어서는 아니 되며, 그의 외투로 자신을 감싸고 병자에게 긍휼을 베풀도록 하나님께 탄원해야한다”(Shabboth 13, Kugelman, 64에서 인용함). 야고보서의 이 구절과 비슷한 것은 the Baba Batra 116a이다: “재난이나 병든 자의 집에 들어가서, 현자(예, 랍비)는 그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라”(Ropes, 304). (2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