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사무엘 상∙하 제 Ⅴ 부 다윗: 상처난 왕의 몰락 (삼하 13-24) 제 11 장 강간과 복수, 반란과 귀환-제2편 (삼하 18-20)
 다윗 왕은 목숨을 부지하려 도망하고, 그의 아들 압살롬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다. 이 두 사람 앞에는 역경의 길이 도사리고 있다. 다윗은 결국 돌아가서 다시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생기기 전에 그의 아들 압살롬은 요압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나단이 말한 그대로, 아직도 칼부림이 끝나지 않았다. (293.1)
 ■ 말씀에 들어감
 사무엘하 18-20장에서 이어지는 압살롬의 반란과 다윗의 귀환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13-17장에서 우리가 생각했던 동일한 질문들을 만나게 된다. 주요한 사항들을 여기서 간단히 반복한다. 좀더 충분한 내용을 보려면, 10장 서두의 “말씀에 들어감”을 보라. (293.2)
 1. 징계. 누가 누구를 징계해야 했는가? 징계하지 않은 것의 결과를 요약하라. (293.3)
 2. 인물들. 주요 인물들의 장점과 단점을 살피라: 다윗, 압살롬, 요압, 아비새. 다윗과 요압 연구를 위하여 열왕기상 1, 2장을 빠뜨리지 말라. (294.1)
 3. 여호와. 누가 언제 여호와를 언급하는가? 패턴을 찾고, 결론을 요약하라. (294.2)
 4. 장소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주요 장소들의 역할을 살피라. (294.3)
 5. 진실. 공책의 “진실” 부분을 완결하라. (294.4)
 6. 사울의 집. 노트를 완결하라. 사울의 집에 대한 다윗의 처치를 평가하라. (294.5)
 7. 유배와 귀환. 다윗의 예루살렘에서의 도망(15:13-16:14)과 귀환(19:9- 20:3)을 비교하라. 그의 행동과 생각에서 패턴을 찾아라. (294.6)
 8. 유배 상황 속에서의 조망. 읽으면서 유배 속에 있다고 상상하라: 예루살렘도, 성전도, 왕정도 없다. 독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294.7)
 ■ 말씀을 탐구함
 악한 역적을 위한 좋은 제안(16:15-17:29)
 압살롬의 마음을 사려는 후새와 아히도벨 사이의 줄다리기는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15:37에 의하면, 후새는 “압살롬이 성으로 들어갈 때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16:15에서 이야기가 다시 이어지는데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아히도벨이 그를 따르며 도착했다고 전한다. 후새는 “왕이여 만세”를 두 번 반복하면서 압살롬에게 접근한다(16절). (294.8)
 이중적인 혀에서 나온 이중의 인사였다! 독자는 후새가 진실로 어느 왕을 가리켜 말하는지 알 것이다. 압살롬은 몰랐다. 적어도 분간을 못했다.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 아니냐?”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특징짓는 언약의 충성이라는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압살롬은 응대하였다. (294.9)
 이어지는 이야기가 드러내겠지만, 압살롬은 후새를 품는다. 후새가 다윗과 함께 가지 않은 이유에 대한 압살롬에게 준 대답은 비록 기록된 내용 속에 이중적 의미가 풍길지라도 믿을 만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거할 것이니이다.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18, 19절). (295.1)
 후새의 경쟁자, 아히도벨은 조언의 일인자이며, 몇 줄 뒤에 저자에 의하여 그의 위치가 매우 인상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때에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 저의 모든 모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이와 같더라”(23절). (295.2)
 아히도벨의 모략이 하나님께 물어 얻은 것과 같다는 말이 중요한가? 그와 같은 미묘한 둘러 말하기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사자와 같다”고 칭찬한 다윗의 경탄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다—아기스(삼상 29:9), 슬기로운 드고아의 여인(삼하 14:17, 20), 므비보셋(삼하 19:27). 그러나 이미 언급되었듯이 큰 소리로 울리는 이런 칭찬은, 사무엘상․하의 큰 문맥을 보면, 공허함이 있다. 저자가 그들의 칭찬을 참으로 빈정거림으로 사용했다면, 여기서도 그리 했는가? 아마도 그랬으리라. 하나님 “처럼” 말하는 것은 그분을 위하여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사실상, 사무엘상․하에서 하나님과 “같다”고 언급된 사람들이 하나님과 어떤 접촉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에 관하여는 분명치 않다. 요컨대, “하나님과 같은” 사람의 지혜로운 모략은 매우 좋은 모략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모략은 아니다. (295.3)
 단어의 분포도를 연구한 것에 기초하여, 폴친은 지혜로운 인간으로부터 “모략을 구하는” 일을 부정적으로 본다. 사무엘하 5장에서 다윗이 그의 보좌를 예루살렘에 세울 때부터 열왕기하 5장에서 르호보암이 북방 지파들을 여로보암에게 빼앗길 때까지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 스스로 왕이라고 한 압살롬, 아도니아 등을 포함하여 유다의 어느 왕도 “미래를 알기 위하여” 하나님께 묻지도(샤알[shaʼal]), 구하지도(다라쉬[darash]) 않았다고 폴친은 주장한다. 그는 다윗의 집의 삼대가 “제사장과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께 여쭙는 고대의 관습을 버리고 그것을 대신하여 “인간적 모략을 구하는 것”으로 대치했다고 주장한다. 나단이 밧세바와 공모하여 솔로몬을 왕위에 앉힐 때에도, “선지자는 왕정의 역사에서 이방적, 이성적 국면에 조화되는 언어를 사용한다”(비교 왕상 1:12. Polzin, David, 175). (2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