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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스탄티누스의 통치는 4세기에 이루어진 그리스도교회의 전쟁 및 군복무관의 변화를 주도한 결정적 요인의 하나였다. 콘스탄티누스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와 군국주의의 결합된 이미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아 교 전투에서 그리스도교적 상징과 함께 그리스도교적 전사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그 승리를 그리스도 신의 위대한 승리로 선전했다. 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밀비아 교 승리에 대한 보답으로 숱한 친그리스도교적 칙령과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같은 자세는 리키니우스와의 전쟁에서도 반복되었다. (227.1)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도교적 헌신은 천하 제패의 정치적 야심과 결합된 제설혼합주의적 복잡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와 군국주의만을 결합시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정치, 그리스도교와 이교주의를 결합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라바룸과 x 상징 문자와 일요일 법 같은 것들은 애매성과 공통성을 두루 갖춘 혼합주의의 탁월한 창안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조차도 콘스탄티누스에 의하여 통일 로마제국을 위한 종교정책의 일환으로 정치공작 차원에서 취급된 일면이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콘스탄티누스의 경쟁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여러 종교세력들도 단순한 정치공작의 대상으로 앉아만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스도교회와 이교세력은 똑같이 정치와 군사적인 권력을 공작대상으로 삼았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로마의 내전은 이념전쟁의 성격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밀비아교 환상에 대한 그리스도교측과 이교측의 각기 다른 해석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의 전쟁 기간에 활발히 진행된 이데올로기 논쟁들이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밀비아교 전투 전야의 그리스도 환상과 x 상징 등은 콘스탄티누스의 종교적, 정치적 동기에만 관련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회의 정치신학 및 정치공작과도 관련되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하겠다. (228.1)
 이와 같이 4세기 초반의 로마 내전이 종교적인 시각과 언어로 해석됨으로써 그리스도교회 변증가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군사행위를 정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의 군사적 승리를 그리스도 신의 은총으로 해석하고 선전하였다. 예컨데 유세비우스에게 있어서는 막센티우스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의 승리와 막시미누스 다야에 대한 리키니우스의 승리가, 그리고 리키니우스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의 승리가 모두 하나님 자신의 승리였다. 즉 “콘스탄티누스와 . . . . 리키니우스는 . . . . 왕중 왕에 의해 힘을 얻었으며 . . . . 우주의 하나님과 구세주,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가장 사악한 두 독재자들 맞아 싸웠다. 전쟁이 공개리에 시작되자 하나님은 가장 기이한 방법으로 자신의 동맹군을 도우셨다.”1 (228.2)
 리키니우스의 군대는 막시미누스 다야의 군대에 승리를 거둔 후 무자비한 잔학 행위를 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세비우스는 그들의 그같은 행위에 대해 한마디의 꾸짖는 말도 남기지 않았다.2 그 희생자들은 단지 그들이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했던 악행에 대해 보응을 받았을 뿐이었다.3 (229.1)
 이같은 경향은 락탄티우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막시미누스 다야가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히 쓸어버리겠다고 주피터 신에게 맹서하는 장면과 리키니우스가 하늘의 천사로부터 기도문을 전해 받는 장면을 대조시키고 있다.4 뿐만 아니라 폭력적, 무력적 수단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더이상 비난받을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인식이 바뀌어지고 있다. 유세비우스는 아르미니아의 그리스도인들이 막시미누스 다야의 박해에 무력으로 항쟁한 사건을 전혀 놀라는 표시 없이 오히려 긍정적인 필치로 보고하고 있다.5 (229.2)
 그리스도교회가 콘스탄티누스를 통한 그리스도교와 군국주의의 결합을 용인한 이상, 그리스도인들의 군복무관이 그전과 같을 수는 없었고 그같은 변화는 당시의 교회법 조항들을 통해 나타났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교회의 군복무관에 교회와 제국의 변화된 관계가 반영되는 과정은 열광적이고 급진적이었다기 보다는 조심스럽고 점차적인 것이었다. 314년에 콘스탄티누스가 국가적인 목적을 위해 소집한 아를(Arles) 회의는 교회가 황제의 보호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평화시의 그리스도인 군복무 즉 밀리타레(militare) 개념의 군복무를 용인했으나 전시의 전투적 군복무 즉 벨라레(bellare) 개념의 군복무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침묵을 고수하고 있음이 그 증거이다. (229.3)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아를 회의의 교회법에서 시도되었던 평화적인 성격의 군복무와 전투적 성격의 군복무의 개념 구분 노력은 교회와 정치의 일치화로 치닫는 도도한 시대적 흐름에서 교회가 나타낸 잠정적인 주저의 표시에 불과했다. 325년의 니케아 종교회의 교회법은 리키니우스 휘하의 동방제국 군대에 복무하는 그리스도인만을 정죄하고 있을 뿐 콘스탄티누스 군대의 군복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서방제국에서는 니케아 회의가 개최되기 이전에 벌써 교회와 군복무 사이의 긴장이 국가가 바라는 방향으로 해소된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230.1)
 니케아 종교회의 교회법을 통해 간접적으로 명시된 그리스도교회 군복무관의 변화는 열광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회의 과거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는 급진적인 것도 아니었다. 이 변화는 부분적으로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전부터 교회법 조항들을 통해 꾸준히 형성되어온바 군복무 금지규정을 완화시키려 하는 추세의 연장이요 심화였다. 뿐만 아니라 이 변화는 로마 군대에 복무하던 상당수 그리스도교 병사들과 또 이들을 용납하고 있던 평신도 교도들의 사고 속에 자리잡고 있던 입장, 즉 그리스도교 신앙과 군복무를 조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 그리스도인이 황제의 위치에 오를 만큼 변화된 정치 환경에서 대세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이 점에 있어서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변화된 그리스도교회 군복무관은 그 전시대의 비평화주의적 전통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 변화는 획기적이었다. 그때 이후로 그리스도교회의 군복무관은 표면상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평화주의적, 반군사주의적 전통으로부터의 단절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230.2)
 이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진행된 그리스도교회의 전쟁 및 군복무관은 전통의 단절과 연속의 양면을 모두 구비하고 있다. 즉 평화주의적 전통으로부터의 단절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전 시대에는 비평화주의적인 전통이 교회의 비공식적 입장으로서 상당수의 그리스도인 병사들과 평신도들의 비체계적, 비논리적 신앙 인식 속에 살아있었듯이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후에는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평화주의적 반군사적 전통이 중세시대의 이중적 교회체계와 윤리구조를 빌어 성직자와 수도승의 소수 윤리로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231.1)
 그러나 교회는 이로써 초기 그리스도교의 반군사적 윤리가 소수 엘리트의 윤리일 뿐이며 다수 보통사람들의 윤리일 수가 없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셈이 되었다. 즉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그리스도교회 대중의 도덕적 능력으로서는 반군사주의적 평화윤리를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을 교회가 인정한 것이었다. 여기에 전쟁 및 군복무관의 콘스탄티누스적 결과에 대한 설명으로서 그리스도교 윤리의식의 쇠퇴론6이 제기될 수 있는 소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교회는 이같은 도덕적 쇠퇴를 그 시대 특유의 연약성으로 인정하여 고백하고 회개하는 대신에 모든 시대에 보편 타당한 사회관으로 그 현상을 옹호하고 이론화함으로써 역사에 다수 보통 사람들의 반군사적 평화사회가 출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시켰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231.2)
 그런가하면 소수 윤리로서의 반군사적 가치관은 그리스도교회의 도덕적 능력의 차원에서 논의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되는 문제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그리스도 교회가 이교적인 로마제국 내의 소수 집단으로 남아있는 한은 그리스도교의 분리주의적 반군사적 사회관이 소수 윤리로서 용납될 수 있으나 그리스도인이 제국 군대의 총사령관의 자리에 앉아있고 주민의 상당수가 그리스도교에 귀의하고 있는 마당에도 그리스도교회가 사회적 책임에서 예외적 위치를 고수하려는 종파적 윤리를 고집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232.1)
 따라서 반군사주의적 가치관을 그리스도교 사회 내의 소수 그룹인 성직자들과 수도승의 윤리로 한정시키고 대다수 그리스도교회 대중들에게 군복무의 사회적 책임을 개방한 조치는 그 당시 그리스도교회의 쇠퇴된 도덕적 능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교회의 사회적 책임의 수용을 반영한 것으로서 바람직한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해석은 80여년 전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oeltsch)에 의해 도식화된 종파형(sect-type)과 교회형(church-type)이라는 두개의 종교-사회적 조직 유형 이론7에 맞춘 것이다. (232.2)
 그러나 그리스도 교회는 위의 두 개의 종교 사회 모델 중 어느 하나를 이상화해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는 일차적으로 거룩히 됨(성화)의 소명을 받은 구별된 집단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는 종교집단이기 때문이다. 이 두개의 관심자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도 그리고 그 두개의 관심사가 교대되는 방식도 바람직하지 않고 이 두개의 관심이 변증법적으로 종합을 이루는 방향으로 역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232.3)
 그런데 신약성경은 구시대를 청산하는 신시대의 윤리로 반군사적 평화윤리를 제시하고 있다.8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해 있는 마당에 전쟁과 군비 같은 구 시대적 전통에 붙잡혀있는 것은 확실히 시대에 뒤떨어지는(anachronistic) 형태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임했으나 떡반죽 속에서 퍼져 나가는 누룩과 같은 형태로, 그리고 겨자씨가 자라나는 형태로 임한 것이며 결코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직은 완전한 의미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며 아직은 여전히 지상의 나라가 계속하고 있다. 이 현실을 무시하는 삶의 방식은 또 다른 형태의 시대착오적(catachronistic), 곧 현실착오적 형태일 것이다. 그리스도교회의 군복무관은 벌써와 아직의 긴장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형태로나 또는 현실 착오적인 형태의 시대착오를 모두 피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그리스도교 군복무관은 교회유형(church-type)적 분별력과 시대착오적 태만이 혼합된 것이었다고 그 성격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233.1)
 참고
 1. Eusebius, HE, Ⅸ. 9. l.

 2. Ibid., Ⅸ. Ⅱ. 2-7.

 3. Ibid., Ⅸ. Ⅱ. 3.

 4. Lactantius, Mort. Pers., 46.

 5. Eusebius, HE, Ⅸ. 8. 12와 14.

 6. Cadoux나 Bainton 등의 주장. 앞의 1장 硏究史편을 참고하라.

 7. Ernst Troetsch, The Social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es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Fourth impression), vol. l, 378-382.

 8.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이 그 한 실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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