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2 부 안식일과 거룩 제 5 장  안식일, 십자가로 합일에 이른 모든 날의 날
 아담의 이 같은 의도와 선택이 후에 인간의 역사에서 제 아무리 복잡하게 뒤엉켜지게 되었다 할지라도, 아담이 최초로 이웃을 낳은 의도와 행위는 인간의 존재와 삶을 제칠일의 완성 단계로 올려놓은 거룩한 십자가의 행위였다. 물론 이 위업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거듭남과 다시 봄의 경험처럼 “혈육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하와를 낳는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에 십자가의 거룩한 사랑으로 동참한 것이었다. 자신의 몸에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를 허용하고 자기 몸에서 거룩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창조를 가능케 하였다. 인간 성화의 위대한 본보기가 되었다. (182.3)
 성경이 전하는 바 아담이 자신의 육체밖에 자신의 분신을 갖는 행위는 깊이 잠자는 행위였다. “여호와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창 2:21, 22). 성경에서 잠은 자주 죽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으나 저희(제자들)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였다”(요 11:11-13). “갈빗대를 취했다”는 표현도 죽음을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 아담의 자기 증식은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모습을 닮았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모습을 닮았다. (183.1)
 아담이 하와를 낳는 이야기, 하나님이 아담을 통하여 하와를 낳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에게 이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고 우리에게 자기 완성의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아담에게 있어서 위로, 하늘로 올라가는 길은 옆으로 이웃으로 가는 길이였다. 그리고 옆으로 가는 길은 자기를 낮추어 이웃의 옆으로 이웃의 뒤로 가는 길이요, 이웃의 아래로 가는 길이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다. (183.2)
 최초의 이웃을 향하여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부른 아담을 생각하면 내게 이웃이 무엇인지를, 친구 한 사람이 늘고, 교우 한 사람이 늘고, 식솔 한 사람이 늘기를 바라는 내 심정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갈비뼈가 으깨어지고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생각하지 못하면서, 자신은 쇠하여야 하리라는 침례 요한의 마음을 생각하지 못하면서, 좋은 친구와 좋은 이웃과 좋은 식구만을 찾았던 나의 욕심과 어리석음이 부끄러워진다. (183.3)
 아담이 하와를 낳는 마음을 생각하면 저 위대한 한 날, 곧 영원이 창조의 6일을 낳는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될” 때마다 영원한 한날은 마치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었다. “땅에 떨어져 죽지” 않았다면 여섯 배의 날들을 낳을 수가 없었다. 여섯 날의 창조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그 큰 한 날, 영원한 그 한 날이 자신을 비우고 낮아지고 찢어지고 땅에 떨어져 없이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여섯 날들은 그 큰 한 날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184.1)
 또 아담이 하와를 낳는 마음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독생자를 낳는 마음을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는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독생자가 보좌를 떠나 종의 형상을 취하시고 생명을 떠나 죽음의 형상을 취하시는 사랑의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삶과 창조를 생각하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없이 되시는 희생 아님이 없고, 없이 되시고도 오히려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히 “계심” 아닌 것이 없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여자의 창조를 위하여 죽음의 형상을 취한 첫째 아담을 생각하면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죽음의 본체를 취하셨던 둘째 아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아담이 모두 위대하고 거룩한 제칠일의 사람이다. 안식일의 사람이다. 십자가의 사람이다. (184.2)
 잠은 죽음의 형상이다. 부모가 자식을 낳는 행위가 잠이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행위가 잠이다. 죽음의 형상을 취하는 행위이다. 자식을 가지려는 아빠의 마음이고, 삶의 반려를 맞아들이는 남편의 마음이다. 아내와 자식과 이웃을 제 분신으로 두어 완전한 사람됨의 차원으로 올라서서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완성을 경험하려는 제칠일의 사람의 마음이다. 제 갈비뼈를 떼어내 아내에게 주고 싶고 제 살을 깎아내어 제 자식에 주고 싶은 지아비와 부모의 마음이 완전한 창조의 사람인 제칠일의 사람의 마음이다. (184.3)
 거룩한 제칠일 안식일의 사람, 그 합일의 차원
 사람에게 아내와 자식과 형제와 이웃은 기쁠 때에도 뼈 중의 뼈이고, 슬프고 괴로울 때도 뼈 중의 뼈이다. 하와는 아담의 심장에서 갈빗대의 거리에 존재한다. 모든 아내와 자식과 형제들은 그 지아비와 부모와 형제의 심장에서 갈빗대 거리의 존재들이다. 육신으로는 몸밖이지만 마음으로는 제 뼈이고 제 살이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제 뼈를 떼어서 존재케 한 생명들이고, 제 살을 깎아 존재케 한 생명들이다. 상대의 생명의 진동을 갈비뼈의 거리에서 반응하고 동참하는 관계가 부부이고 부자이고 형제이고 이웃이다. 그런데 육신으로도 제 몸 안의 뼈이고 살이나 진배없는 제 분신들이 마음으로 서로 갈라지고 찢어지고 흩어져서 제 각각으로 등지고 대립하며 살 수 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 기막힌 생존을 무엇이라 이름할 것인가. 그것 말고 생지옥이 어디에 따로 있을 것인가. (185.1)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한다. 제 아무리 내 몸밖에 내 뼈 중의 뼈를 많이 두고 있다 한들 한 줄로 꿰지 못해서야 그것이 무슨 보물이 될 것인가. 그 여러 분신들을 참으로 심장과 갈빗대의 거리로 한 몸과 한 마음으로 묶지 못해서야 제 아무리 십자가의 정신으로 수많은 분신들을 낳았다 한들 그것을 가지고 어찌 창조와 삶의 절정에 오른 거룩한 인간의 차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늘 나라는 진주 구슬이 서 말로, 석 섬으로 흔하다고 해서 하늘나라인 것이 아니다. 세상나라가 하나님 나라 되지 못한 것이 진주와 구슬이 없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다. 지천으로 깔린 구슬이로되 이것들을 거룩한 실, 사랑의 실로 꿸 수가 있어서 하나님 나라이고 그럴 수가 없어서 세상 나라인 것이다. 진주와 구슬이 서 말이라도 한 줄로 꿰어야 진주 목걸이도 되고 진주 팔걸이도 되는 것이다. (185.2)
 제칠일은 6일의 끝에 있는, 6일보다 높은 날이다. 그리고 6일의 정상일 뿐 아니라 6일들을 그 날개 아래에 하나로 모은 합일의 날이다. 창조의 여섯 날들은 제칠일로 절정을 맞아 거룩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제칠일로 합일을 이루어 거룩과 완전에 이르렀다. 6일의 절정의 자리, 6일이 거룩함을 입는 그 정상의 자리는 합일의 자리이다. 합일로써 거룩함을 입는 자리가 절정의 자리이며 완성의 자리이다. (186.1)
 제 각각으로 흩어지고 등진 날들은 거룩한 안식에 이르지 못한 날들이다. 제 각각으로 흩어지고 등진 창조의 세계들은 안식에 이르지 못한 세계이다. 하나님이 구슬 같은 창조의 여러 날들을 하나로 꿰고 구슬 같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나무와 새들과 짐승과 사람을 하나로 통일시켜 거룩한 합일의 안식에 이르게 한 날이 제칠일 안식일이다. 제칠일 안식일이라는 완전하고 완성된 창조와 삶의 차원은 이 통일, 이 합일로 거룩해진 차원이다. 창조의 절정과 완성은 바로 이 거룩한 합일의 차원이다. 합일의 높이가 제칠일의 높이이다. 합일의 높이가 인자의 높이이다. 합일의 높이가 인자의 “나 있는 곳”의 높이이다. “나 있는 곳”의 높이가 곧 거룩의 높이이다. 정상의 자리는 완성의 자리이고, 완성의 자리는 합일의 자리이며 합일의 자리는 거룩의 자리이다. (186.2)
 하나님의 세계는 자신의 뼈와 살을 내주는 희생적 사랑의 끝에 배은과 배반과 자기 분열과 자기 소멸만이 뒤따르는 세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메아리 없는 일방적인 자기 희생만을 사랑의 숙명으로 되어있는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일방적 희생이 사랑의 숙명이 아닌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한 알의 겨자씨와 한 알의 밀의 숙명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고 제칠일의 나라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오히려 “많은 열매를 맺는” 나라가 천국이다. 겨자씨 한 알이 “자란 후에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는” 바가 되는 곳이 제칠일의 나라이다. 한 날이 여섯 날로 찢어지고 땅에 던져져서 없어지는 것이 한 날의 숙명으로 되어있는 나라가 하늘나라인 것이 아니다. 여섯 날들이 하나되어 서로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며”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사랑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의 끝가지 이르게”(시 19:2, 3, 4) 되는 나라가 하늘 나라이고 제칠일의 나라이다. 여섯 날이 각각으로 있는 나라가 하늘나라가 아니고 여섯 날이 제칠일 하루에 함께 꿰어 있는 나라가 하늘나라이다. 제칠일이면서 동시에 모든 6일들의 제 날인 날이 제칠일이다. (186.3)
 희생적인 사랑의 숙명은 많은 열매를 맺고 그 “영광을 보존하는” 것이다. 사랑의 세계는 생명과 존재가 희생적인 자기 비움과 합일의 화답을 통하여 무한하고 무량한 차원으로 높아지고 깊어지고 넓어진다. 아담의 자기 희생적인 사랑은 하와의 깊은 곳으로부터 화답하여 나오는 사랑과 합하여 무한과 무량의 차원으로 높아지고 깊어지고 넓어진다. 거룩해진다. 둘이 합하여 한 몸과 한 마음이 된 이 사람은 제칠일의 사람으로 자란다.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된다.” 나물과 나무는 다른 차원의 생존이다. 아담은 나물의 차원을 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는” 하나님 나라의 큰 나무로 자란다. 새들이 깃들이는 큰 나무는 합일의 큰 생명이요 삶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이다. (187.1)
 화답과 합일로 이루어진 거룩한 사랑 그리고 그 거룩한 사랑의 사람은 이렇듯 위대하고 무한한 높이와 깊이의 존재이다. 생명의 근본과 “만물의 근원”으로 향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화답하여 완전과 완성에 이르는 거룩한 하나는 둘로, 셋으로, 여섯으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하나”보다 더 높고 더 크고 더 깊고 더 넓은 참으로 “심히 더 좋은” 하나이다. 거룩한 하나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이렇게 크고 이렇게 높아지고 이렇게 거룩해지는 나라이다. 이것이 제칠일의 창조와 삶의 온전함이다. 이것이 “저희의 수고를 그치고 쉬는”(계 14:13) 제칠일의 사람의 온전함이며 거룩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계 14:7) 하시는 분부의 의도이다. (188.1)
 첫째 아담은 제6일의 남자였다. 이 남자가 자신의 신체밖에 자신의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로 내놓은 반려가 하와였다. 그리고 이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한 마음과 한 몸을 이룬 합일의 사람이 거룩한 제칠일의 사람이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가 “사랑하사 그의 피로 죄에서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우리”(계 1:5, 6)들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 거룩한 사람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목표이다. 제칠일은 6일의 정상이고 완성이다. 6일과 제6일은 영원과 무한의 참 형상이 아니다. 6일을 넘어서고 6일의 합일을 이루어 6일보다 더 넓고 더 깊고 더 높은 한 날, “심히 더 좋은” 거룩한 한 날이 나타났다. 거룩한 제칠일이다. 이 거룩한 합일의 날이 영원의 형상으로써 하나님의 시간 창조의 목표이다. (188.2)
 제칠일은 마음의 날이고 마음의 나라이다. 이 날의 사람, 곧 제칠일의 사람은 마음의 사람이다. 떡으로만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다. 떡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심령의 가난한 사람이다. 떡과 물의 기갈이 문제되는 나라의 시민이 아니다. 마음의 기갈이 문제가 되는 나라의 시민이다. 모든 문제를 배고픈 마음과 목마른 마음에서 인식하기 시작하는 나라의 시민이다. 제칠일은 이러한 사람들, 곧 심령의 사람들의 시대이다. (188.3)
 진실로 제칠일은 진정한 날, 날들의 날이 드러난 날이다. 그리고 이 날과 더불어 진정한 사람, 독존하거나 독처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웃이 있는 사람 십자가의 정신으로 이웃을 낳는 사람, 곧 심령의 사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나타난 날이다. 그 가난한 심령으로 이웃과 하나됨을 이룩한 사람, 곧 합일의 사람이 드러난 날이다. 그리고 합일의 차원에서 진정한 사랑과 창조와 삶의 그 완전한 모습, 곧 그 거룩한 모습이 드러난 날이다. 즉 제칠일은 합일의 사람, 합일의 사랑, 합일의 창조, 그리고 합일의 삶이 드러난 날이며, 바로 합일의 차원에서 거룩이 드러난 날이다. 거룩한 안식일이다. (189.1)
 뿐만 아니라 제칠일은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이 사람의 시간 안에 드러난 날이다. 독존하고 독처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을 자신의 몸밖에 두신 하나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신 하나님이 드러난 날이다. 그리고 그 삼위의 하나님이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 안에 계시는 합일의 하나님,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서 드러나신 날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의 희생적 사랑으로 말미암아 만유를 자기 안에 하나되게 하신 하나님이 드러나신 날이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시간에 드러난 하나님의 모습의 절정이요 완성이다. 이 하나님이 거룩한 제칠일 안식일의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18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