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2 부 안식일과 거룩 제 5 장  안식일, 십자가로 합일에 이른 모든 날의 날
 사람의 운명을 묻는 제6일의 황혼
 제칠일이 오고 있다. 모든 날들의 정상일 뿐만 아니라, 모든 날들의 완성인 제칠일이 다가오고 있다. 인자의 “나 있을 곳”이요,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오고 있다(요 12:23). 소유와 혈육의 때가 아니라, 존재와 인간성과 성령의 때가 오고 있다. 혈육에 속한 6일의 사람과 그 삶으로는 이 새 세상을 맞이하지 못한다. 지난 삶과 낡은 사람을 청산하고 새 마음 새 사람으로만 새 세상 새 삶을 맞이할 수 있다. 제칠일은 “나,” 곧 사람의 아들이 있을 곳이고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얻을 때이지, 혈육이 있을 곳도 혈육이 혈기로 살아갈 때도 아니다. (176.1)
 지금은 6일의 가을이고 제6일의 황혼이다. 그리고 여기는 이방과 하나님의 나라가 맞닿은 접경, 곧 가이사랴 빌립보 같은 시점이다. 가을과 황혼은 사색의 시간이다. 접경은 결단의 공간이다. 이 황혼, 이 접경에 서서 사람의 아들들은 자신의 근본과 운명을 묻는 물음으로 바쁘다. “사람의 아들은 누구인가,”“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라 했는가,” 오늘날의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 하는가,” “그리고 너희는 스스로 이 ‘나’를 누구라 하는가”(마 16:14). 진실로 “사람은 어디서 왔으며”(요 9:29), “어디로 가는가”(요 8:14). (176.2)
 그 제6일의 황혼은 위대한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접경인 저 가이사랴 빌립보는 위대한 깨달음과 고백과 결단의 공간이었다. 그 시각 그 공간에서 인간은 자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며 “내가 그에게서 왔고 그가 나를 보내신”(요 7:29)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진실로 제6일의 황혼은 위대한 순간이었다. 그 육일, 그 육체의 날의 굳은 목이 사색으로 숙여진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혈육의 하루가 반성으로 저녁을 맞은 인생은 복되다. 하루의 꺾임인 저녁이 바로 자신의 성찰이고 깨달음인 인생은 복되다. 저무는 한 날의 노을이 깨달음으로 부끄러워진 낯빛의 인생은 복되다. 제6일의 황혼은 제칠일의 접경이다.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접경이다. 혈육과 마음의 접경이다. 나그네의 시간이고 공간이다. 순례자가 해질녘에 찾아든 행랑채 같고 처마 밑 같은 시간이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제6일의 황혼 같은 위대한 접경이다. 위대한 깨달음과 결단의 접경이기 때문이다. (177.1)
 사람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왔고 하나님이 사람을 보내셨다”는 이 깨달음으로 사람은 제칠일의 하늘, 곧 사람의 아들이 “있을 곳”을 보았고,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얻을 때를 보았다. 이 깨달음, 이 다시남(重生)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묶은 6일의 쇠사슬이 끓어졌고, 사람은 혈육을 발등상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이 깨달음, 이 다시남의 고백 위에 하나님의 집이 세워지고, 제칠일의 나라가 세워진다. 이 거듭남이 마음으로써의 사람이 일어서는 기초이다. 육신으로써의 사람이 참 사람이 아니고, 마음을 담고 있는 육신으로써의 사람이 참 사람이라는 인식이 하나님 나라의 초석이다. 떡 걱정만으로 사는 삶이 참 삶이 아니고, 마음의 양식으로 살림을 사는 삶이 참 삶이라는 눈뜸이 하나님 나라의 새 살림의 출발이다. 이 거듭남, 이 앎, 이 결단, 이 삶 하나를 위하여 사람은 6일의 그 긴 행로를 살아온 것이다. (177.2)
 제칠일은 이 눈 뜸, 이 앎, 이 삶으로 시작되는 날이다. 이 앎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마 16:17). 혈육이 이러한 앎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알게 하신 앎이다. 제칠일의 창조와 앎과 삶은 사람이 혈육으로 도달하는 차원이 아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창조이고 앎이요 삶이다. (178.1)
 “혈육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주신 이 놀라운 뜻에서 보면, 앎의 날인 제칠일은 혈육의 날이 아니라 마음의 날이다. 그리고 마음의 날이라는 뜻에서 보면 제칠일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나라가 아니다(눅 17:20 참조). 형태상으로 제칠일은 제1일이나 제6일과도 다르지 않다. 수량에 있어서도 늘지도 줄지 않은 24시간이요, 모양으로도 똑같이 해뜨고 해지는 날이다.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듯” 그리고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듯” 제칠일은 다른 6일들과 나란히 누어있고, 6일과 함께 삶의 매를 돌리고 있으되 홀로 하나님께 데려감을 입은 날이요 나라이다. (178.2)
 혈육의 사람과 마음의 사람도 외모나 수량에 있어서는 “눈에 보이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한자리에서 잠을 자는 여러 사람의 하나이요, 함께 삶의 매를 돌리는 여러 여자의 하나이다. 실로 밭에 묻힌 보화와 같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요 중심이다. 이 마음 하나로 하나님 나라의 창조와 삶이 완성에 이른다. 이 마음 하나로 제칠일의 창조와 삶이 완성되고 제칠일의 사람의 완성된 존재와 인간성과 삶이 생겨나는 것이다. (178.3)
 제칠일, 그날들의 정상에 나타난 십자가의 사랑
 지금의 여기는 “독수리가 모이는 주검”(눅 17:32; 마 24:28 참조)의 제6일이다. “일어나서 여기를 떠나”(요 14:31) 인자의 “나 있을 곳”인 제칠일의 나라로 가야한다. 그러나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로 들어가려면 먼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마 16:21).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야”하는 것이다(막 8:34; 눅 9:23). 제칠일의 날과 나라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일어나서” 예비한 처소이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함께 거할 처소”이다. (179.1)
 베드로처럼 제6일의 황혼에 사람의 아들의 큰 깨달음을 얻고서도 “주여 그리 마옵소서 결코 이 일이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아들이 져야할 십자가의 고난을 막고 “아무든지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른 좇는” 것을 막는 것은 참 존재로서의 “나를 넘어지게 하는” 사단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아들이 “나 있는 곳”을 생각하지 않는 소행이다. 육체의 나날을 생각할 뿐 사람의 아들의 때를 생각하지 않는 소행이다. 사람의 아들이 어느 자리에 서야하고 어느 때를 선택해야 할지를 생각하지 않는 처사이다. 존재나 인격을 생각하지 않고 소유와 사물에 매달리는 행동이다. 제칠일을 생각하지 않고 6일에 얽매이는 태도이다. 이러한 사단의 생각과 집착은 마땅히 “내 등뒤로 물리쳐야 한다.” (179.2)
 사물과 소유와 혈육과 어제에 집착하는 삶은 참으로 사는 삶이 아니다. 누구든지 6일과 육체의 일에 집착하는 자는 참 생명을 잃어버릴 것이요, 6일과 육체의 일에 얽매이지 않는 자는 영생토록 제 생명을 보존할 것이다(요 12:25 참조).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느니라”(마 16:25). 참으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할 것이며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는가”(마 16:26). 6일의 소유가 모두 “내게 있다”한들 참된 “내”가 없고 참 존재인 “사람의 아들”이 살아갈 시간이 없다면, 그리고 내게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인 제칠일의 세월이 없다면 그 모든 소유가 내게 무슨 유익이 될 것인가. 많은 소유로 시간을 바꿀 수 있으며 사람의 목숨을 되돌릴 수 있겠는가. (179.3)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첫째 아담을 생각하게 된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제칠일의 완전한 창조와 삶에 이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첫째 아담을 생각하게 된다. 아담의 일이야말로 제칠일의 완전한 창조와 삶의 일차적인 본보기이다. 제칠일의 사람의 일차적인 본보기이다. 이 사람이 최초의 제칠일 안식일의 사람이었다. (180.1)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그의 창조주이시고 참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세상에 대표하는 모습과 삶은 사람이 아담 혼자로서 사는 것도 아니고 아담과 하와가 각각으로 독처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창 2:18). 사람은 천상 천하에 유아 독존하는 존재도 아니고 유아 독처하는 존재도 아니다. 독존도 좋지 못하고 독처도 좋지 못하다. 독처하는 사람은 “좋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좋음에서 벗어나고 선함에 미달하는 사람이다. (180.2)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참 인간이다. 이웃이 있어서 인간이다.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 사람이 참 인간이다. 이웃의 차원이 인간의 차원이고 합일의 차원이 인간의 차원이다. 이웃과 합일의 차원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인간의 차원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창 1:27) 하셨다. (180.3)
 따라서 독처하는 사람, 이웃이 없는 사람, 합일의 경지를 모르는 사람,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와 삶에 이르지 못한 사람인 아담이 이웃의 이웃이 되고 합일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하고 완전한 창조인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하는 과정이야말로 인간 창조와 역사와 삶의 목표를 암시하고 있다. 이 목표야말로 안식일 신학이 붙잡아야 할 중요한 의의의 하나이다. (181.1)
 사람의 세계에는 제일 먼저 독처하는 아담이 등장했다. 아담의 독처는 “좋지 못했다.” 독처하는 아담은 “좋지 못한” 사람이다. 그 다음으로는 둘로 나뉘어진 아담, 곧 남자와 여자로서의 사람이 등장했다. 비로소 이웃을 가진 인간, 더 이상 독처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 더 이상 “좋지 못한” 사람이 아닌 인간이 등장한다. 이웃이 있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자기 중심에서 놓여난 사람이다. 이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서 나와 너의 분별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나와 너를 각각 나와 너의 이웃으로 분간하는 사람이다. 세 번째로 이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 합일의 사람이 등장했다. “심히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네 번째로 남자와 여자의 합일을 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만유와 합일을 이룬 “심히 더 좋은 사람” 곧 거룩한 사람이 등장했다. 네 번째의 사람은 세 번째 “심히 좋은 사람”의 합일이 심화되고 고양된 사람이다. 이 합일의 사람이 제칠일의 사람이요 안식일의 사람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이고 역사의 목표이다. (181.2)
 성서가 전하는 바 사람의 성장하고 완성되어 가는 모양을 생각하다 보면 홀로 계시고 또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되시고 그리고 삼위일체로 계시고 또 사람과 만유로 더불어 하나로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로 하나되게 하옵소서”(요 17:11) 기도하시는 성자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제칠일에 드러난 하나님의 모습이다. 이것이 제칠일로 우리를 초청한 하나님의 마음이다. (181.3)
 독처하는 아담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었다. 독처하는 아담으로써는 하나님의 “좋은” 창조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가 없었다. 부족한 창조이고 미달한 창조이고 “좋지 못한” 사람의 창조였다. 이웃이 있고 사귐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좋은 “형상”이다.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을 자신의 신체 내부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좋은” 형상이 아니라,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을 자신의 몸밖에 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웃이 자신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그런 사람, 그래서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하나님의 좋은 창조가 완성된 제칠일의 사람이다. (182.1)
 첫 사람 아담이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지는 경험, 아담이 이웃의 이웃으로 성장하는 경험은 사람이 최초로 사람을 낳은 행위였으며 최초로 자기가 분열되고 소멸되는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행위였다. 이후의 역사에서 인류의 기쁨과 고통, 보람과 회한, 구원과 타락의 양쪽 모두에 원인으로 작용하는 행위였다. (1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