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3부—안식일 신학 제14장—현대 유대교의 안식일 신학
 헤셀은 안식일을 논의할 때 자신의 이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헤셀은 코헨이 감탄했던 관념주의를 회상시키는 용어를 사용하여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구별하였는데 그는 사람의 시간적인 경험과 공간적인 경험 사이에 있는 평행적인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그 구별을 더욱 인상적으로 만들었다. 우리에게 공간은 외부적인 것이고 제한되고 조종 가능한 것이다. 한 주간의 여섯 날동안 우리는 일하고 그것을 조형한다. 그러나 시간은 내면적이고 초월적이며 주권을 가진 존재이다. 즉 “그것은 우리에게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한 존재이다. 모든 경험에 내재된 것이면서 또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37 (256.3)
 헤셀은 또 안식일을 보편성, 즉 시간 안에서 있는 보편성에 연결시켰다. “모든 사람은 공간의 한 부분을 점유한다. 그는 그 공간을 배타적으로 점유한다. 나의 신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의 부분은 나 자신에 의해 다른 모든 사람을 배척하도록 점유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시간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 내가 시간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순간은 없다. 바로 이 순간도 그것이 나에게 소속되 듯이 살아있는 모든 사람에게 소속되고 있다. 우리는 시간을 공유하고 공간을 소유한다. 나는 공간에 대한 나의 소유권을 통해 다른 모든 존재의 경쟁자가 된다. 그러나 나는 내가 시간 안에 삶으로써 다른 모든 존재들의 동시대인이 된다.”38 (257.1)
 이처럼 안식일의 보편성에 대한 헤셀의 견해는 다른 유대인 저술가들의 강조와 달랐다. 한 사람이 모든 인류와 한 날을 공유하는 하나의 상징은 그 사람의 공통적인 인간성을 기억하는 한 날이다. 즉 “안식일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믿음과 사람의 평등성은 인간의 고귀성을 뜻한다는 믿음의 구체화이다.”39 헤셀은 안식일 경험의 타당성을 일반적인 경험에서 까지 찾았다. 그는 안식일을 “우리 동료 인간끼리의 경제적인 싸움과 자연의 힘들과의 싸움을 중지하는 휴전의 날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안식일 이상으로 인간의 발전을 위하여 더 큰 희망을 제시하고 있는 제도가 있는가”하고 우리들에게 질문하고 있다.40 (257.2)
 그러나 헤셀은 시간과 공간을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까지는 차별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신앙은 이 세상을 벗어나자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존재하면서도 이 세상의 위에 있고자 하는 것이다. 문명을 배척하자는 것이 아니라 문명을 넘어서자는 것이다. 안식일은 우리가 문명을 뛰어넘는 기술을 배우는 날이다.”41 (257.3)
 그렇지만 헤셀은 안식일을 일차적으로 보편적인 창조의 상징으로 보지 않았다. 로젠쯔바이크처럼 헤셀도 안식일의 시간적인 상징안에서 구원의 궁극적인 기념을 보았다. “성경은 공간에 대해서보다도 시간에 대해 관심을 나타냈다 ∙∙∙ 성경은 지리 보다는 역사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 . 이스라엘에게는 역사적인 시간의 독특한 사건들이 자연의 순환 속에 반복되는 과정들보다도 영적으로 더 의미있다.” 유대교에서 안식일은 유대민족이 하나님의 능력 있는 행위에 의해 선택된 사실을 기억하는 시간이다. 즉 “우리는 출애굽의 날을 기억하며 이스라엘이 시내산 아래에 섰었던 날을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의 메시야적 희망은 날들의 끝에 있는 한 날에 대한 기대이다.”42 (257.4)
 그는 “안식일이 구체적인 사실 곧 하나의 법률적인 제도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랍비의 “율법 체제와 안식일 준수의 규칙들을” “총체적인 사랑에 대한 일치된 마음의 논리적인 확장으로” 옹호하였다. 그러나 그의 안식일 신학이(용어의 일부 중요한 의미에 있어서) 정통적인 신학으로 인정받게 된 까닭은 헤셀이 안식일을 유대인의 구속 역사와 동일시 시켰기 때문이다.43 (257.5)
 그러나 그것은 “할라카적인”(Halachic)정통이 아니다. 안식일에 관한 헤셀의 글들은 전통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악가다”(aggadah: 비 율법적인) 전통이다. “할라카”(Halacha)는 정통의 합리주의이다. 지성이 어떻게 의지를 인도하는지를 법전화한 것이다. 헤셀은 “할라카”를 존중하였다. 그러나 “할라카가 악가다의 소리를 계속해서 무시해야 하느냐”고 항의하였다. 지성이 어떻게 의지를 지배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비전적(秘傳的)인 토론이 모든 사람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정서를 무시하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헤셀은 “시편 기자들의 호소가 정서로 충만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가 선지서들을 읽을 때 선지자들의 열정과 생기를 띄고 있는 그들의 상상력으로 말미암아 고무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시편 기자들과 선지자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대담하고 충격적인 상상력으로 영혼을 감동시키고 주의를 끄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44 따라서 은유와 이야기와 의인화와 시로 가득차있는 그의「안식일」이 “악가다”적인 작품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58.1)
 메지레크의 막기드(Maggid of Mezhirech)와 베르디체브의 레비 이사악(Levi Isaac ofBerdichev)으로부터 유래하는 사람들에게 헤셀이 어떻게 안식일을 “긴장으로부터의 탈출”로, “시간 안의 성소”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시간의 왕국 안에 있는 궁전”으로 말할수 있는가?45 그리고 어떻게 헤셀이 그의 독자들을 그가 생각하는 안식일의 의미와 분위기로 이끌 수 있으며 그와 그들이 함께 알고 있는 구원에 대한 자각으로 이끌 수 있는가? (258.2)
 그는 주장하기를 “안식일은 자신의 현존을 광야의 넘어에 있는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심령 안으로 내보내고 있는 동안에 사람들은 제칠일의 경이를 환영하기 위하여 모여든다”고 하였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들 안에 잠자고 있던 정신이 부활하는 순간이다 ∙∙∙ 우리들의 일부는 마치 그들이 말하는 것의 거의 전부가 베일과 같을 것이라는 느낌으로 압도당한다. 우리들의 영혼들 안에는 시간과 영원의 매듭을 말들로 풀어헤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장엄함이 없다 ∙∙∙ 하나의 생각이 시장터를 바람으로 날려 보낸다. 바람 속에 노래가 있고 나무들 속에 기쁨이 있다. 안식일이 이 세계 안으로 당도하여 밤의 정적 속에서 노래를 흩뿌린다. 영원이 한 날을 말로 토해낸다 ∙∙∙ 안식일이 이 세계로 들어올 때 사람은 실제적인 구원의 순간을 감촉한다. 마치 한 순간에 메시야의 신이 지구의 표면을 움직였던 것 같다.”46 (258.3)
 안식일은 우리의 내면에, 과거에 시편기자들과 선지자들과 이스라엘의 경건한 사람들을 분발시켰던, 하나님을 위한 갈망과 동감의 순간들을 재창조할 것이다. 안식일의 경험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행위들을 재현시킬 것이다. 진실로 헤셀에게는 안식일이 개념과 행위들을 둘러싼 분쟁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느끼는 기쁨을 느끼는 경험에 의하여 초월될 수 있는 시간이다. (258.4)
 안식일의 다양한 이해들의 새로운 접근
 안식일의 경험을 위한 헤셀의 소망이 안식일의 신학과 안식일의 실천적 준수의 양면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증거가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개혁파 유대교에서는 20세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일요일 준수가 사라졌다. 금요일 저녁은 예배시간으로 정착되었다. 전통적인 예식이 날이 갈수록 예배에 많이 도입되고 있다. 개혁파 유대교의 가장 저명한 인물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떠불유 군터 프라우트(W. Gunter Plaut)까지도 안식일에 대한 우리들의 ‘정신 건강적’ 접근방식이 실패했기 때문에 안식일의 개혁된 “할라카”(halachah)를 지지해야 한다고 요청하고 나섰다. 이 말은 안식일 준수에 대한 그 랍비의 의견이 유대인에게 “바람직하고 좋은것”이란 확신을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다.47 (258.5)
 개혁파 유대교 안에서 안식일에 대한 좀더 역사적인 인식이 더 많이 평가되고 있다는 가장 극적인 증거는 1975년에 개혁파 유대교가 안식일 예배를 위한 자료집인「기도의 문-새 연합 기도서」(Gates of Prayer-The New Union Prayer book)을 출간하였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기도서는 “일찍이 미국의 개혁파 유대교의 예식서나 유럽의 자유파나 개혁파 유대교의 예식서에 한번도 포함되어 본 일이 없는 전통적인 예식 자료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히브리 유니온 대학의 교수인 제이콥 제이. 피투초우스키(Jacob J. Petuchowski)는 주장하기를「기도의 문」의 출간은 개혁파 유대교 예식 뿐만 아니라 미국의 개혁파 유대교의 역사에 틀림없이 하나의 이정표로 보여지게 될 것이라 하였다.48 (259.1)
 안식일의 전통적인 준수를 가속화시키는 움직임은 개혁파 유대교의 가장 존경받는 신학자들 쪽에서 헤셀에 대한 존경이 새로워지고 있는 현상과 맞물리고 있다. 에밀 엘. 파켄하임(Emil L. Fachenheim)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글에서 보다도 더욱 전면적으로 헤셀의 안식일 신학을 수용하는 글을 썼다. 그는 헤셀의 안식일 신학에 대해 말하기를 “이것은 아마도 우리의 시대에 미국의 유대교에 제공된 가장 심오한 종교 사상”이라 하였다. 그리고 유진 비. 보로위츠(Eugene B. Borowitz)는 현대 유대교에 대해 개관한 글을 다음 같이 끝냈다. “우리의 시대에 어느 누구도 아브라함 헤셀 만큼 언약적인 실존의 참 모습을 잘 요약하지 못했다. 안식일의 찬란한 광휘에 대한 헤셀의 기원은 날이 갈수록 개혁파 유대교 내부에서 많은 호응을 낼 것이다.”49 (259.2)
 개혁파 유대교는 안식일에 대한 헌신에 있어서 그동안 우왕좌왕 해왔으나 정통파 유대교는 “해방”운동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굳하게 안식일의 엄격한 준수를 계속해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안식일의 열정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헤셀의 공로에 대한 평가가 정통파 유대교 신학자들 측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된 바는 없다. (259.3)
 그러나 심지어 미국의 정통파 유대교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유대교 신학자인 조셉 비. 소로베이트치크(Joseph B. Soloveitchik)같은 사람의 영어로 출판된 많지 않은 글에서도 헤셀의 신학의 반영을 찾아 볼 수가 있다.50 (259.4)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유대교 신학자로서의 헤셀의 위대함은 그의 비존의 담대함에 의해 측정되어야 한다. 그의 관심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 사이의 대화 차원을 넘어섰다. 그가 임종한 금요일에 완성된 그의 마지막 책은 빌나의 가온(Gaon of Vilna)과 코즈크의 렙 메나헴 멘들(Reb Menahem Memdle)같은 하시딕 스승들에게 헌정되었다. 이책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진리는 어디서나 살아있으며 결코 지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에게 진리를 해방시킬 책임이 있다.”51 (259.5)
 안식일에 관한 헤셀의 책의「안식일: 현대인을 위한 그 의미」(The Sabbath : It’s Meaning for Modern Man)라는 이름은 아무렇게나 붙여진 것이 아니다. 일찍이 이 보다 더 대담한 레베 (rebbe : 유대인 학교 교사)가 있었는가? 헤셀은 “해방” 이래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더 담대하게 보편성의 관점에서 유대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을 찾아내려는 모험을 시작한 사람이다.52 학설이 더 이상 사람을 확신시키지 못하고 법률이 더 이상 경외심을 자아내게 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면서 헤셀은 인간의 열정을 향해 호소하였다. 헤셀은 유대교의 종교적 경험의 근본 핵심으로 뛰어들었다. 안식일의 기쁨의 광휘가 모든 사람을 불태울 것을 확신하였다. 그는 유대교의 핵심으로부터 이 세계를 향한 “챠딕크”(Tzaddik)가 될 것이다. (260.1)
 “세상에는 안식일의 사상만큼 그렇게 많은 영적인 힘을 간직하고 있는 사상들이 별로 없다. 무한히 긴 시대를 통하여 우리들의 아껴온 여러가지 주의 주장들 중에 오직 파편들만이 살아 남아있겠지만 안식일의 사상은 우주의 태피스트리(색색의 실로 수놓은 벽걸이. Tapestry)로 계속 빛날 것이다.”53 (2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