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3부—안식일 신학 제14장—현대 유대교의 안식일 신학
 히르쉬나 정통파 유대교의 다른 사상가들 못지 않게 코헨도 안식일이 기쁜 날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안식일이 기쁜 날이 되는 그 이유가 달랐다. 그는 안식일이 유대인의 성품을 꼴짓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방식이기 때문에 안식일이 기쁜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일신의 신앙 사상을 확장시키는 그 방식 때문에 안식일을 기뻐한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에게 처음으로 주어졌으며 세계가 그날을 채택했다”는 것이다.21 (251.5)
 코헨의 믿음에 따르면 안식일은 “세계에 일신론의 신앙을 전파하여야 할 그 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유대교를 간직해왔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은 안식일 안에서 자기 자신을 인류를 위한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셨다” 코헨은 “안식일의 율법”“유일신적인 도덕의 진수와 같은 교훈”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안식일 준수의 보편화 안에서 메시야의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까지 말했다. 즉 “만약 유대교가 이 세상에 안식일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전해준다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유대교는 인류 평화의 창조자이며 그 기쁜 소식의 전달자로서 인정받게 될 것이라” 하였다. “안식일은 노예제도의 철폐를 위한 첫 조치를 취했으며 사람의 노동을 정신적인 노동과 육체적인 노동으로 분류하는 방식을 철폐시키기 위한 방식을 보여주는 최초의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또 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자유롭게되고 봉사의 책임을 가지게 될 때, 그리고 사람이 그들의 매일의 양식을 위해서 수고할 때 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지식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도 평등한 자유와 책임을 누리게 될 때 사람에게 솟아오르는 기쁨의 상징이다. 안식일에 의하여 성취된 이 세계의 정복은 이 기쁨이 결코 공허한 환상이 아니며 이 기쁨 속에 발산하는 평화는 언제까지나 인류의 기본적인 능력이라는 희망과 신념을 포기하게 하지 않는다.22 (251.6)
 코헨이 마르부르크 대학의 철학과 교수직을 은퇴하여 베를린에 있는 “유대교의 과학적 연구 아카데미”(Academy For the Scientific Study of Judaism)의 교수직에 취임했던 1912년에 레오 바이크(Leo Baeck)는 베를린의 나이 많고 병든 랍비를 대신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 바이크는 코헨이 30여년 전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베를린 대학에서 스피노자(Spinoza)에 대한 연구로 철학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코헨은 그가 자신의 학문적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이크의 안식일 신학은 코헨의 주장의 일부를 반영하고 있다. 그는 두 차례의 끔찍한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도 보편적인 도덕 질서에 대한 코헨의 신념과 또 안식일을 보편적인 도덕 세계의 상징으로 믿는 코헨의 신념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는 안식일이야말로 유대교가 인류에게 끼친 가장 위대한 공헌의 하나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안식일이 여러 시대에 걸처 여러 나라에 전파되어 유대인들이 안식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았고 계속적으로 축복을 누렸던 것처럼 안식일이 전파된 곳의 사람들도 안식일로 말미암아 축복을 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안식일은 “조화로운 세계와 세계의 위대한 평화를 지적하고 그것에 도달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3 바이크에게 안식일은 코헨에게 그렇듯이 메시야 시대의 형상이다.24 (252.1)
 그러나 안식일과 유대교에 대한 바이크의 설명은 코헨의 경우에서보다도 그를 더 그의 동시대의 사회로부터 유리시켰다. 유대인은 이 세계 안에서 살지만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유대교는 사회의 선(善)에 기여하지만 그러나 인류를 위하여 반대하는 반대자의 이 이미지(像)를 제공하는 것이 유대교의 역사적인 과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25 (252.2)
 바이크가 다른 사람과 “다를 수 있는 유대인의 능력”이라고 부른 것은 사람에게 “삶의 깊이”를 탐구할수 있게 하는 안식일의 교육의 결과이다. 바이크는 종교를 합리성과 윤리성의 동일의 것으로 보는 코헨의 표현을 넘어 안식일의 안식을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것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안식일의 안식을 “신적인 분위기의 일부”로 말했다. 안식일의 안식이 우리를 신적인 “신비의 깊이로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안식일이 없는 삶은” 깊이의 우물을 계속적으로 열어주는 소생의 샘물을 결핍한 삶이 될 것이다. 그러한 삶에서는 유대교의 핵심사항이며 유대교의 열매같은 부분이 시들고 마르게 된다. “안식일 없이도 윤리적인 생활이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르나 유대인의 삶을 특정 짓는 요소를 상실한 삶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26 그러나 바이크는 유대교를 종교의 깊이로만 한정하지도 않았다. 그에 따르면 유대교의 독특성은 신적인 신비에 있다. 그리고 안식일의 경험은 우리를 사람으로 소생시키는 신비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252.3)
 실존과 역사
 바이크와 코헨이 베르린으로 갔을 때 쯤에는 또 한사람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이미 비엔나 대학으로부터 베르린에 와 있었다. 그는 비엔나 대학에서 바이크가 신비와 깊이에 대하여 주장하는 동일한 방향에서 유대교를 한걸음 더 진전시킬 이념들을 가지고 하시딤(Hasidim) 사상을 깊이 연구했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안식일에 관한 부버의 글들은 바이크가 코헨을 계승해서 탐구하고 있던 주제들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다. 즉 그는 안식일의 보편성과 안식일의 윤리적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253.1)
 부버는 주장하기를 안식일이 시내 산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태초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였다. “세계의 창조가 안식일로 흘러들어 왔다.” 이렇게 시작한 안식일이기 때문에 “안식일은 진실로 보편적인 시간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부버에게 안식일은 평상적인 것을 대표하는 날이지 결코 어떤 특별한 것을 대표하는 날이 아니다. “안식일은 대등한 도량 단위를 대표한다. 한 해의 규칙적인 마디를 대표하고 있다 ∙∙∙ . 어느 시대에나 근거가 확실한고 유효한 것을 대표한다.” 부버는 안식일을 창조만큼이나 보편적인 것에 뿌리를 두게 함으로써 코헨처럼 “안식일은 모든 존재에게 속한 공동 재산이며 따라서 모든 존재는 제한 없이 안식일을 즐겨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27 (253.2)
 코헨에 있어서처럼 부버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안식은 평화 그 자체이다. 십계명 중에서 안식일 계명이 야훼를 예배하는 것에 관한 앞 부분의 계명들과 동료 인간들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의무들을 규정하고 있는 뒷부분의 계명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사실 자체가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통치와 사람끼리의 올바른 질서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종들에게도 똑같이 매 주간마다 안식일이 다가오고 안식년에는 채무자와 노예들이 빚을 벗고 종의 신세를 면하게 됨으로 사람들은 “모든 피조물들이 평등하다는 사상이야 말로 안식년의 특징이며 안식일 자체의 특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28 (253.3)
 부버와 같이 프란츠 로젠쯔바이크(Franz Rosenzweig)가 코헨과는 대단히 다른 방향에서 유대교의 신학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버가 코헨과 더불어 안식일에 관하여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을 똑같이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결국 로젠쯔바이크는 헤르만 코헨의 존경받는 제자가 되었다. 바이크와 코헨이 베르린에서 함께 만나게 된 같은 해에 로젠쯔바이크는 프라이베르그에서 헤겔 연구로 학위를 마쳤다. 그리고 몇 달 후 베르린에 정통파 유대교의 한 작은 회당에서 유대교에 대한 헌신을 다시 출발하였고 즉각 “유대교의 과학적인 연구 아카데미(Berlin Academy for the Scientific Study of Judeism)”에 등록하였다. 그는 코헨이 죽는 날까지 코헨과의 교류를 계속했으며 코헨의 사후에 코헨의 전집이 출판되었을 때 그 서문을 썼다. 로젠쯔바이크는 코헨의 클라스에 입학한지 몇 개월이 되지 않았을 때 부버를 만났다. 부버는 만나자마자 즉각 로젠쯔바이크에게 지금 자기가 편집하고 있는 에쎄이 전집에 글을 기고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개인적, 또는 학문적인 관계는 꾸준히 계속되어 결국에는 부버가 프랑크 푸르트 대학의 최초의 유대교 교수로서 병든 로젠쯔바이크의 자리를 대신하게 까지 되었다. (253.4)
 로젠쯔바이 크는 안식일을 창조에 관련시 킴으로써 안식일의 토론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코헨과 부버의 독자들에게 친숙해져있는 접근법이었다. 그에게는 안식일이 근본적이고 항구적인 것들을 대표하는 날이다. “안식일이 다시 돌아오는 그 규칙성, 하나의 안식일은 다른 안식일과 똑같다는 사실 자체가 그 안식일들을 그 해(年)의 모퉁이 돌로 만들고 있다 ∙∙∙ 안식일 안에서 그 해가 창조되고 있으며 이와 같이 안식일의 중요한 의의는 안식일의 예식 속에 있는 그 상징적인 의미 안에 놓여있다. 안식일은 창조를 기념하는 축제일이다.”29 (254.1)
 그러나 로젠쯔바이크의 안식일 신학은 몇 가지 사항에 있어서 그의 스승들과 친구들의 안식일 신학과 다르다. 코헨과 바이크와 부버는 인류를 위한 안식일의 중요성과 보편적인 윤리를 위한 안식일의 의의를 강조하고 있는 반면 로젠쯔바이크는 유대 공동체의 예식적인 관습과 관련하여 안식일의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그가 안식일의 논의를 창조와 안식일의 관계로부터 시작한 것은 그가 유대인들이 금요일 저녁에 그 가정에서 빵과 술을 가지고 안식일의 시작을 기념하는 유대인의 안식일 예식이 특별하게 창조를 기념하는 “땅의 존귀한 선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30 (254.2)
 금요일 저녁은 특별히 창조를 기념하지만 “아침은 계시를 기념한다.” 우리는 아침에 성경을 많이 읽음으로써 “사람들이 토라의 선물을 통하여 자신들의 선택받은 사실을 인식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오후의 기도와 세 번째 식사의 노래와 춤을 함께 나누면서 메시야가 오리라는 것과 그가 속히 오시리라는 확신에 도취된다. 창조와 계시, 그리고 특별히 구속을 유대교의 핵심적인 주제로 보고있는 로젠쯔바이 크에게 안식일은 이 모든 것들의 요약이었다. 한 주간의 절정에 찾아오는 안식일은 창조의 목표와 구속의 목표를 기념하고 있다. “우리는 창조의 한 가운데서 안식일을 기념하면서 창조와 계시를 넘어간다.” 사실상 “안식일에 회중들은 그들이 이미 구원받은 것처럼 느낀다.”31 (254.3)
 그러나 안식일의 이해에 있어서 로젠쯔바이크와 부버가 끼친 최대의 영향은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표면적인 주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끼친 최대의 공헌은 유대교 신학의 토대를 보편적인 이성으로부터 인간의 실존으로 변경시킨 사실에 있다. 로젠쯔바이크는 독일의 관념주의 철학에 대한 그의 끝 모르는 공격을 시작할 때 말하기를 “사고하는 사람은 마땅히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상황에서 대담하게 출발해야 한다”고 하였다.32 로젠쯔바이크와 부버가 키에르케가르(Kierkegard)와 니체(Nietzsche) 같은 사람들의 실존주의적 통찰을 안식일 신학에서 발전시킨 것도 두드러진 일이었지만 그들의 하시딤에 대한 평가야 말로 그들의 안식일 신학에 있어서 그 어느것 못지 않게 의미심장한 것이다. 로젠쯔바이크는 바르사바의 핫시딤 집단과 함께 안식일의 “세번째 중심”을 기념하는 모임에 참석한 다음에 그들에 대한 비방에 대하여 맹렬히 항의하였다. 그는 부르짖었다. “나는 데가당스(Decadance: 퇴폐에)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일체 믿지 않는다. 현재에도 이 같은 퇴폐는 발견할 수 없으며 심지어 일백 오십 년 전에도 그러한 퇴폐는 없었다.” 그는 후에 또 외치기를 폴랜드의 유대인들을 비방하는 온갖 악담들은 독일에 사는 유대인들의 여러 부끄러운 일들 중에서도 가장 심한것이라고 주장하였다.33 (254.4)
 유대교의 핫시딕(Hasidic) 전통 안에서 그의 스승들과 그의 가까운 저술가들에 의해 비장된,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실존의 특성을 발견한 사람은 물론 베르린 대학에서 빌헬름 딜타아(Wilhelm Dilthey)와 게오르그 짐멜(George Simmel) 같은 교수아래서 공부하고 비엔나에서 독일 신비주의로 학위 논문을 쓴 마르틴 부버였다. 그가 다시 들려주는 하시딕(Hasidic) 이야기들에서 안식일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유대교에서 안식일이 차지하는 위치를 위해 좀더 중요한 사실은 부버가 자신의 대화와 관계의 신학들을 핫시딤의 종교적인 경험과 동일시하였다는 것이다. 부버가 핫시딤을 발견한 이후에 유럽과 미국의 교육받은 비 정통파 유대인들은 율법의 할라카적인 준수(계율적인 준수)나 몇 가지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성을 지지하는 것 이외의 선택을 가지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제 유대교를 다르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사람을 돌보고 사람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단체적인 교제로 유대교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실존의 정서적인 면을 진정한 유대교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게 됨으로써 그들이 항상 기쁨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해왔던 안식일에 대해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 한 현상이었다. (255.1)
 열정과 상징
 부버는 1939년에 독일을 영구히 떠나게 되었을 때 로젠쯔바이크가 프랑크푸르트에 설립한 유대교 아카데미의 책임과 독일에 있는 유대인 성인 교육을 위한 중앙 사무소(Central Office for Jewish Adult Education in Germany)의 책임을 맡을 그의 후계자로 핫시딤에 뿌리를 두었고 베르린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폴랜드 출신의 젊은 랍비 아브라함 요슈아 헤셀(Abraham Joshua HescheD을 선택하였다. 헤셀은 현대 유대교에게 전체 유대 사상을 막라하는 신학을 제공해야 하는 사명을 띠게 되었으며 그같은 노력의 과정에서는 “해방” 운동 이래로 안식일에 관해 쓰여진 책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저서를 저술하게 되었다. (255.2)
 헤셀의 이력서를 보면 그가 운명적으로 중재적인 역할을 하도록 되어있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의 부모는 초기의 저명한 하시딕 “레베스”(rebbes:스승들)의 후예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핫시딤의 창건자인 바알 쉠 토브(Baal Shem)의 후계자인 메지레크의 막기드(Maggid of Mezhirech)의 가계이다. 헤셀은 탈무드(Talmud)와 카발라(Kabbalah:유대교의 신비 철학)의 핫시딕 해석에 파묻혀 성장한 이후에 나이 20세 때 뛰쳐나와 베르린 대학교의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그 대학에서 현상학을 연구하고 선지자들의 예언 현상에 대한 학위 논문을 썼다. 졸업과 동시에 그는 그 앞서 코헨과 로젠쯔바이크가 처음으로 만났으며 아직도 바이크가 가르치고 있던 “유대교의 베르린 아카데미(Berlin Academy for Jewish Studies)”에 교수로 합류하였다. 헤셀은 끝내 나치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온 이후에 처음에는 신시나티에 있는 개혁파 히브리 유니온 대학(Reform Hebrew Union Collage)에서 가르치다가 뉴욕에 있는 보수파 유대교 신학교(Conservative Jewish Theological Seminary)로 옮겼다. (255.3)
 헤셀은 부버와 로젠쯔바이크가 그에 앞서 시작했던 동일한 방향으로 유대교 신학을 발전시켰다. 안식일에 대한 그의 글은 종교적인 경험에 대한 그의 평생에 걸친 관심의 한 부분이다. 그는 유대적인 종교 경험의 특징적인 요소로서 정서적인 면을 주목하였다. 그는 물론 “하나님을 이해하고 예배하기 위해서 이성을 활용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의지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미츠보”(Mitzvoh: 율법), 또는 율법에서 요구된 행동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말하기를 “행동의 도약”을 요구하는 것이야 말로 유대교의 특징이라 하였다 이 그러나 헤셀은 앞서 그의 스승들이나 동료들이 애쓴 것 이상으로 유대교를 이성이나 율법에 대한 논쟁의 차원을 넘어 열정에 대한 평가 쪽으로 끌고 갔다. 사람이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하여 자신의 다른 기능들과 함께 놀람과 황홀과 두려움으로 반응하는 차원의 유대교를 강조하였다.35 (256.1)
 그는 성경 기자들, 그중에서도 선지자들의 휘몰리는 경험들을 주목하면서 하나님의 페이소스(Pathos:정념)에 반응하는 선지자의 동감을 발견하였다. “성서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감정의 운동은 사상의 운동 못지 않게 영적이다.” 성서 기자들에게 있어서 “정념, 정서적인 연루, 열정적인 참여는 모두 종교적인 실존의 한 부분이다.” 그는 하나님이 밀접하게 영향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은 지성과 의지만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념까지도 소유하고 있다는 관념이 기본적으로 선지자들의 하나님 인식을 규정하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헤셀은 심지어 “사건과 인간의 행동들이 하나님에게 기쁨이나 슬픔, 쾌락이나 분노를 일으킨다”고 까지 말했다. 반대로 말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동감은 “그것이 대응하는 감정을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선지자의 예언적인 동감에서 인간은 초월적인 주체의 현존과 감정에게 열려 있는 것으며 하나님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앎은 자기 자신안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는 것이다. 베르린 대학출신이 현상학자는 종교적인 경험 안에서 하시딕 경건의 모든 열정과 대담성을 발견하였다.36 (25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