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3부—안식일 신학 제14장—현대 유대교의 안식일 신학
 개신교 교파들 중에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s)를 포함한 소수의 교단들만이 유대인들처럼 한 주간의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제7일인 토요일 대신에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기 때문에 안식일을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유대교 안에 있는 안식일 신학의 자원들을 자주 인식하지 못하거나 탐구하지 않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아래의 글에서는 현대 유대교 안식일 신학의 중요한 부분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247.1)
 유대교 내부의 다양한 안식일 이해
 오늘날의 유대교 사상가들은 율법과 이성과 역사의 어느쪽을 강조하는 것에 상관없이 안식일 경험의 독특한 중요성에 대해서는 날이 갈수록 서로 인식을 일치해가고 있다. 오늘날은 안식일의 기쁨이 유대교 신앙의 전체를 휘감고 있는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 150년간은 늘 그렇지 못했다. 18세기 이후, 그리고 유럽의 유대인들에 사이에 이른바 “해방”(Emancipation)이라 불려진 공민적 권리의 획득이 점차적으로 확대되면서 유대교 내의 논쟁이 안식일 문제에까지 확대되었다. 만약 근대 유대교의 발생지로 독일을 지목해야 된다면 안식일을 둘러싼 의견대립은 근대 유대교를 탄생시키는 산고(産苦)의 한 부분이었다고 해야할 것이다.1 19세기와 20세기에 걸친 안식일 논쟁의 배경에는 독일의 저명한 유대인 사상가들 사이에 얽혀 있는 복잡한 상호관가 크게 작용하였다. (247.2)
 개혁 유대교(Reform Judaism)이라고 일컬어지는 단체의 창설자의 한 사람인 사무엘 홀드하임(Samuel Holdheim)은 주간의 제칠일 대신에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성전을 베를린에 설립했다. 유대인들은 국가의 공동선(公同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안식일을 위반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홀드하임의 주장은 분명히 그의 극단적인 주장의 하나이다. 그러나 홀드하임은 1844년과 1845년에 브룬스빅(Brunswick), 프랑크프르트(Frankfurt), 브레슬라우(Breslau)같은 독일의 도시들에서 세 차례에 걸처 “개혁”(Reform)파 랍비들의 큰 모임을 추진시킨 중요한 인물이다.2 “어떻게 하면 현대의 환경에서 안식일의 본질적인 특징들을 구제할 수 있는가?” 유대교의 한 역사가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유대교 개혁운동을 본격적으로 착수시킨 질문이었으며 1846년에 브레슬라우에서 개최된 제3차 총회에서는 이 문제가 광범위하게 토의되었다.3 (247.3)
 일부 랍비들은 비록 그들 자신도 정통 유대교의 요구 사항들 중 여러 가지를 이미 어기고 있었으나 개혁파 랍비들의 총회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토론의 전반적인 경향에 크게 분노하였다. 제카리아 프랑켈(Zechariah Frankel)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된 제2차 총회에서 퇴장해 나왔고 브레슬라우에서 개최된 제3차 총회에는 아예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프랑켈은 1845년에 두 개의 잡지를 창간하고 브레슬라우에 세운 랍비 신학교의 첫 번째 교장에 취임함으로써 후에 보수파 유대교(Conservative Judaism)로 불려지게 되는 그룹의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보수파 유대인들은 사소한 예식 규칙들까지 이행해야한다고 고집하지는 않았지만 유대신앙과 실천의 핵심적 상징에 대한 존경을 고수했다. 그리고 1870년 대에 급진적인 개혁운동파 지도자들이 안식일을 일요일로 옮기려 했을 때에는 크게 불안해 하였다.4 (248.1)
 개혁파 총회의 마지막 모임이 끝난 직후이면서 프랑켈이 브레슬라우의 랍비 신학교 교장에 취임하기 직전인 1851년에 삼손 라파엘 히르쉬(Samson Raphael Hirsch)가 독일 유대교의 본거지의 하나인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설교하고 가르치고 글쓰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활동은 독일 유대인들의 “해방”운동과 유럽 계몽주의의 등장 이후에 전통적인(혹은 정통적인) 유대교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한 최초의 시도였다. 그는 안식일의 규칙같은 유대교의 율법의 요구들은 무시하고 있는 “개혁”파 기관들을 위하여 사려깊은 유대인들이 기여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되다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언제나 독일의 도시들에서 단일한 유대교 단체로 살아온 유대인 공동체에 본격적인 분열이 발생하게 되었다. (248.2)
 독일에서 시작된 분열은 미국에까지 연장되었다. 독일에서 건너온 급진파들이 미국의 개혁파 유대교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의 주도권은 1885년에 “피츠버그 플랫폼”(Pittsbburg Platform)의 결정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이 강령에 따르면 개혁파 유대인은 “오직 우리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성화시키는 예식들만 받아들이고 근대 문명의 관점과 관습에 맞지 않는 것들은 모두 배척한다.”5 이러한 입장은 이미 10여년 전에 개혁파 지도자들에 의해 신시내티에 창설된 히브리 유니온 대학(Hebrew Union College)을 졸업하는 젊은 랍비들에 의해 유대인들에게 홍보되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50여개에 가까운 미국의 개혁파 회중들이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으며 이 문제는 곧 여러 총회에서 뜨거운 논쟁거리로 작용했다.6 (248.3)
 프랑켈과 브레슬라우 신학교 입장에 더 동조한 미국의 랍비들은 1879년에 “아메리칸 히브루”(American Hebrew)라는 자신들의 잡지를 창간하여 안식일의 준수를 격려하도록 촉구하였다. “핏츠버그 플랫폼”에 대한 이들의 저항은 상당히 격렬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2년안에 새로운 신학교를 세웠다. 그래서 한 역사가는 미국 유대교의 “보수주의의 시대는 미국의 유대교 신학교(Jewish Theological Seminary of America)교육의 출발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7 이 신학교에서는 어느 한 때도 안식일의 중요성이 의심되었던 적이 없었다. (248.4)
 10년 동안은 1880년대의 독일의 정통파 유대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으리 만큼 엄격한 안식일 준수를 표방하고 있던 동부 유럽의 유대인들이 대거로 미국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통파 유대주의 신앙인들은 분열되지 않았다. 독일에서 건너온 정통파 유대인들로 구성된 미국 유대교 회당들은 계속해서 “유대교 신학교”(Jewish Theological Seminary)의 졸업생들을 채용했다. 그러나 1896년에 드디어 “랍비 이사악 엘카난 신학교”(Rabbi Isaac Elchanan Theological Seminary)가 동부 유럽의 정통파 전통으로 훈련받은 랍비들을 동부 유럽 정통파 계열의 회당들에 공급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15년에 “예시바 대학교”(Yeshiva University)에 이 신학교가 흡수되면서 이 학교의 교사들은 삼손 라파엘 히르쉬(Samson Raphael Hirsch)와 19세기 정통파가 진척시켜놓은 교육 프로그램 즉 전통적인 랍비들의 교훈과 근대의 세속 학문을 결합시킨 독특한 학풍에 헌신하였다. 예시바(Yeshiva) 대학교의 가장 존경받는 스승은 근대의 정통파 유대교를 요약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세계 최고의 탈무드 학자로 존중받고 있는 조셉 비 . 솔로베이트치크(Joseph B. Soloveitchik) 박사는 그의 조부로 부터 “브리스커”(Brisker)방식의 탈무드 해석을 배운 다음에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을 수학하여 학위를 받았다. (249.1)
 의지와 율법
 19세기 독일의 삼손 라파엘 히르쉬로부터 미국의 조셉 솔로베이트치크와 현재 그를 대표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정통파 유대주의 사상가들은 안식일을 하나님의 의지의 권위와 자유에 대한 증거로 생각해 왔다. 이들에게 안식일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지지하게 될 때 자신의 의지가 가장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안식일의 준수는 이들에게 정통파 유대교 신앙의 존재를 요약하는 것이다. 즉 안식일의 준수는 그들이 하나님의 행동방식을 그대로 모방하는 행위였다. 히르쉬의 특징적인 사고의 구도에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의 운명의 상징”이다.8 (249.2)
 유대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그들에게 하나의 도움이 제공되었는데 그것이 곧 율법의 계시이다. 유대인은 그들이 안식일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기본원칙들을 배움으로써 안식일의 의미를 발견한다. 예컨대 안식일에 관한 정통파 유대교의 토론은 “멜라카”(Melakahah)에 대한 역사적이고 탈무드적인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다. “멜라카”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지성과 기술을 건설적으로 사용하여 자기가 세계의 지배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이다.9 한 주간의 6일 동안에 조장된 인간의 이러한 행위들이 제7일에는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은 외부 세계의 향상이나 개발을 모두 “멜라카”라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기술로 말미암은 물질적인 생산이 수반되지 않는 자연의 소모나 또는 내적인 감정이나 관념의 개발을 위한 노력은 “멜라카”가 아니라 하였다.10 히르쉬는 말하기를 “그대가 종일토록 피곤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대가 아무것도 생산한 것이 없다면 그대는 멜라카를 행한 것이 아니라”하였다.11 (249.3)
 안식일에 사람이 창조물들을 손질하고 그 형상과 모양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완성해 놓은 것에 무엇을 추가하려는 행위이다. “제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안식일에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이며 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사람이 주인으로 행세하려는 거만한 태도이다.”12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계의 완전한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모두 마친 다음에 쉬신 사실을 철저히 인정하고 지지함으로써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히르쉬의 저서들을 영어로 번역한 이시돌 그룬펠트(Isidor Gninfelt)는 설명하기를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의 일을 끝내고 쉬심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나타냈을 때 그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창조하신 세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제한시켰듯이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라 하였다. 즉 “그는 노동의 주인이 되고 노동의 종이 되지 않는다”하였다.13 솔로베이트 치크의 제자의 한 사람인 임마누엘 락크만(Emanuel Rackman)도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자연계에 대한 지배를 끝이고 물러나 쉼으로써 “하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본성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유의 섬광을 붙잡게 된다”고 하였다.14 (250.1)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을 부정적으로만 이해하도록, 즉 안식일에 “멜라카”만 금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안식일에는 “멜라카”의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메누하”(안식)의 개념이 있다. 솔로베이트치크의 또 다른 제자이면서 예쉬바 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놀만 람(Norman Lamm)은 강조하기를 “메누하”(Menuha)란 낱말에는 소극적인 의미도 간직되어 있지만 그 못지 않게 안식일과 관련하여 적극적인 의미가 들어있다고 했다. “메누하”는 적극적인 의미로 내적인 재창조나 또는 “자기 변형”을 뜻한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유대인은 하나님과 함께 “새롭고 더 좋은 정체성”을 창조하는 일에 연루되는 것이다. 우리가 안식일에는 “네쉬마 예테라”(Neshama Yeterah) 즉 “추가적인 영혼을 받는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의 전통적인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15 (250.2)
 정통파 유대교의 안식일 토론은 주로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할 때 사람이 어떻게 창조주의 뜻에 따라 행동 할 수 있게 되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결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함으로써 사람의 뜻이 황량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정통파의 주장에 따르면 오히려 유대인이 안식일에 하나님의 뜻에 일치한다면 그가 더욱 자유와 기쁜 감정에 유도된다. 안식일에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지위에 상관없이 다가오시기 때문에 어떤 유대인도 자기가 하나님의 눈에 다른 유대인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안식일의 준수로써 유대인은 모든 계급적인 관계에서 자유케 된다. 즉 “안식일에는 종과 주인이 모두 자유로운 인간 개체로써 평등하다 ∙∙∙ .따라서 안식일은 하나님이 주일마다 하루씩 반복하여 압제에 항의하는 날이다. 유대인들은 금요일 밤에 자신의 키두쉬 컵(Kiddush Cup: 성별의 잔)을 높이 들어 세계의 창조와 인간의 자유를 연결시키듯이 노예 제도와 압제가 우주의 근본 기초에 위배되는 끔찍한 죄라고 선언한다.”16 (250.3)
 뿐만 아니라 히르쉬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길이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대인이 한 주간의 수고스럽고 정직한 노동이 끝나는 금요일 밤에 그가 그의 가족과 함께 하나님께 그의 잔을 높이 들 때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황홀한 느낌은 필설로 다 표현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17 (251.1)
 이성과 윤리
 20세기 초의 개혁파 유대교의 기초를 마련한 헤르만 코헨(Herman Cohen)은 한 주간의 첫 째날(일요일)에 안식일 예배를 드리기 위한 19세기 개혁파 유대교의 모든 실험들을 위하여 제칠일 개념보다는 안식일 개념을 존중했다. 정통파의 안식일 신앙에 있어서는 사람의 의지와 유대 율법이 강조되고 있는 반면에 개혁파 전통은 안식일과 관련된 사람의 이성과 보편적인 윤리의 영역을 더 강조한다. (251.2)
 코헨에 따르면 유대교는 최소한 두 국면에서 유대교가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윤리에 연관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첫째는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인간이 그 동료 인간을 사랑하는 “사회적”인 사랑으로 반영되어야 한다는 선지자들의 주장이며18, 둘째는 안식일에 대한 선지자들의 선언이라 하였다. (251.3)
 그는 말하기를 도덕적인 개혁을 위한 선지자들의 주장은 주로 안식일의 사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였다. 선지자들에게는 안식일이 사회적인 윤리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도덕적인 삶을 살도록 촉구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 ∙∙∙ 그리고 예레미야로 하여금 안식일의 성화를 주장하게 한 동기는 예레미야의 사회적 공의의 개념이었다.”19 “선지자들에게 안식일은 윤리 그 자체의 표현이었다”는 것이다.20 (2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