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50편 하늘 법정에 선 이스라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몇 마디의 찬양의 발언을 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주위가 암담하고 우리의 존재가 전멸의 위기에 처할 때 일지라도 당신의 이름을 시인한다는 뜻이다. 훗날 사도들은 산헤드린에 의해, 그들이 만일 예수를 계속 증거한다면 투옥시키겠다는 협박을 받았을 때 이에 용기를 가지고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고 응수하였다. 그들은 결코 중단 없이 주 예수님을 선포했다. 한편 헤롯이 가이사랴에서 군중들로부터 신격의 명예를 받아들였을 때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었는데 이는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행 12:23) 한 연고였다. 또한 하나님께 마음을 주지 않는 노래를 부르는 것도 역시 하나님에 의해 정죄 받게 된다. (306.3)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 29:13)
(307.1)
 그리스도께서는 이 이사야의 말을 하나님 자신의 명령과 근본적으로 상충되는 한갓 유대인의 전통을 따르는 바리새 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시는 데 인용하셨다(마 15:1~9 참조). “너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외식하는 자들아”(마 15:6)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드러 내신 뜻과 조화되는 것만이 하나님께 가납되는 예배가 될 수 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종교는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하나님에 관한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믿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세상의 재판장께로 접근하도록 해준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개념은 또한 인간의 윤리적 기준과 그의 도덕적 행실을 결정해 준다. 종교와 도덕은 뿌리와 열매가 그러하듯 일체가 된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왜 이다지 잔혹하게 그 도덕적 무관심과 훈련의 결핍을 들어 이스라엘을 질책하시는가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307.2)
 주님은 도덕의 하나님이심
 그러나 악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308.1)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시 50:16, 17)
(308.2)
 하나님께서는 이 정수를 찌르는 질문을 회중 가운데 있는 모든 종교적 위선자들에게 던지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악인”들이 있는 것을 알고 계시나니! 그들은 도덕적으로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모두 무관 심하였다. (308.3)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21절). (308.4)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동시에 도덕적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후반부를 이스라엘이 당신 앞에 설 수 있는 시금석으로 삼으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책임을 묻고 계신다. 인간의 희생 제물은 결단코 자신의 죄를 도말할 수 없다. 아무도 결단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속할 수 없다(시 49:7~9 참조). 하나님의 눈은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며 그의 말이나 행동의 동기를 재어 보신다. (308.5)
 하나님께서는 도덕적 훈련을 바라신다. 당신의 도덕적 형상이 당신의 구속받은 자녀들에게서 회복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주는 하나님의 표준이다. 그것은 또한 참된 그리스도 교회를 위한 도덕적 절대 기준이다.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면서 생애 가운데 기만 되게, 그리고 이율 배반적으로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게 된다(행 5:1~11). 그리스도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이 모호한 이중성을 발견하신다. 그 분은 사랑으로 이를 질책하신다. (309.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5, 16).
(309.2)
 하나님께서는 고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비도덕적 생활 태도를 직시하도록 하셨다. (309.3)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시 50:18~21)
(310.1)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를 입술로는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비방과 악행으로 동료 신자들을 상심하게 했다. (310.2)
 하나님께서는 즉각 보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잠잠” 하셨다(21절). 하나님의 이 침묵은 불경한 사람들의 이기적인 동기를 드러내려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참회와 개혁을 위한 자비로운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잠잠하지 않으신다(3절).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의 고소인이 되셨지만(21절) 이는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사단의 목적처럼—다만 그의 의식을 깨우쳐 그가 더 늦기 전에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에 자신을 다시 의탁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22절). 따라서 이 시편은 당신의 백성들이 마땅히 그분을 기억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호소로 더불어 끝을 맺고 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310.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 50:23)
(311.1)
 그러므로 이 심판의 시에 나오는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긍정적이다.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교회와 더불어 한결같은 모범을 따 르고 계신다. 그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소환 명령도 구원의 약속으로 끝나고 있다. (311.2)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 3:20, 21). (3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