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50편 하늘 법정에 선 이스라엘
“저들 중의 대다수는 희생 제물을 마치 이방 사람이 저희의 제물에 대하여 생각하듯이 하나님을 달래게 하는 예물로 여기는 사고 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당신과 화목시키게 하는 예물은 자신의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저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원하셨다”(시대의 소망 1권, 134).
(301.3)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은 이방의 잡신들과 동일치 않으심을 가르치고 계신다. 오히려 그분은 “네 하나님” 이스라엘의 위대한 구세주, “애굽 땅에서 너를 불러내신” 하나님이시다(호 12:9, 13:4). (301.4)
 이스라엘은 놀라운 출애굽을 통해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품성과 당신의 구원의 방법에 관한 계시를 점점 잊어 가고 있었다. 결국은 구세주께서 직접 하나님의 참된 해석자로 오실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지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바치고자 하셨다. (302.1)
 예수께서는 분노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분을 보내신 것이다. (302.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302.3)
 침례 요한은 구세주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로 보내심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302.4)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302.5)
 시편 50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이교적 개념을 예리한 풍자로 폭로하고 있다. 이 예언적 음성은 순전히 이스라엘의 신학과 성전 예배의 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그것이 중보의 제물을 폐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물에 대한 신령치 못한 이교적인 해석을 정죄 하고 있는 것이다. (302.6)
“그러나 유대인들의 의식 가운데는 영적 생명이 상실되었고 저들은 죽은 형식만을 좇았다. 저들은 제물과 의문에만 치중하고 이 제물이 표상하는 실체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아니하였다”(시대의 소망 1권, 28, 29).
(303.1)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종교
 하나님께서는 과연 당신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303.2)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14, 15)
(303.3)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어떤 것을 참되고 가납될 만한 예배의 본질로 생각하시는가를 말씀하고 계신다. 어느 누구도 선물로 지존자 하나님을 조종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지존자 하나님의 선물을 우선 인정하는 것을, 또 어떻게 올바른 감사의 표시를 가지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는가를 배워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참된 예배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엄청난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뒤에 나오는 시편 103편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의 행위와 아낌없는 자비에 합당한 진정한 감사를 기대하신다. 그분께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원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경배자들은 한 백성으로서 일찌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어 주신 은혜를 결단코 잊어서는 아니된다. (303.4)
 사람은 환난의 날에(15절) 이적이나 기타 방법을 통한 하나님의 손길을 강압적으로 이끌어 낼 것이 아니라 자비 하신 하나님께 오직 간구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세주로 부르심 받기를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환난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탄원하는 우리의 동기에 최우선적 관심을 기울이신다. 욥기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종 욥을 그의 예배와 충성의 동기로 시험하셨던가를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 하나님과 사단 간의 문제가 등장한다. 욥은 과연 진정으로, 그에게 재난이 닥치고 그가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할만큼 하나님의 품성을 이해하고 있었을까? 이윽고 욥이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말했을 때, 오직 사단을 놀라게 할 뿐이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축복을 베풀었던 사람으로부터 얼마나 더한 영광과 존귀를 기대하실 수 있겠는가? 환난의 때가 그들을 엄습할 때 하나님의 약속은 이러하다. “내가 너를 건지리니.” 이스라엘은 어 떠한 환경에서도 진정한 찬양으로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송영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하겠다. (304.1)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
(305.1)
 하나님의 구원하신다는 약속은 이스라엘이 환난 중에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해야만 한다는 명령을 포함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그렇게 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고 계신다. 시편 50편은 하나님께서 감사의 예물과 더불어 아뢰는 신뢰의 탄원을 들으실 때 구원하실 것임을 약속해 주고 있다. (305.2)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305.3)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용서와 구원 그 이상의 위대한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50:15).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하여 감사와 찬송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배이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는 위기의 순간에 어떠한 것이 가납 되는 예배인가를 힘있게 가르쳐 준다. (305.4)
 메데 파사의 왕 다리오가 자신 이외의 어떤 신에게든 기도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사형에 처한다는 조서에 어인을 찍었을 때에도 다니엘은 여전히 하나님께 충성을 고수하였다.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하나님께서는 사자굴에서 그를 구원하심으로 당신을 신뢰하는 다니엘의 믿음에 풍족히 보상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거짓 참소에 대하여 그가 무죄함을 아셨다. 다니엘의 친구들도 그와 같았다. 그들은 느브갓네살 왕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306.1)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 18).
(3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