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 시점에서,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그가 사건들을 통제하고 계신다는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 그는 그의 죽음이 가깝다는 것을 아시지만, 또한 그가 부활하여 승리하실 것과 미래에 그가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의 신실한 제자들과 다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실 것도 아신다(29절). 아 말씀들은 그의 부활과, 그의 제자들이 또한 부활하게 될 그의 재림,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한 그의 믿음의 확신을 표현한다(살전 4:16). (312.1)
 최후의 만찬의 요소들의 정확한 상징적 의미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면서도, 모든 교단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그들의 예배 경험에서 한 가지 주요한 사건으로 만들어왔다. 성찬식은 그들 중 각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신 그들의 구주에 대한 기념 예식이다(고전 11:25). 이 예식의 의미는 바울이 제일 잘 포착하였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그같이 첫 번째 기독교 유월절 만찬의 새 상징은 동시에 두 방향 —뒤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리고 앞으로는 그의 왕국을 충만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그의 돌아오심—을 가리킨다. (312.2)
 마태는, 그 예식이 끝나자 그들이 찬미를 부르고 나가서 감람산으로 갔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 찬미는 아마도 유월절 식사 끝에 전통적으로 부른 시편 115-118편일 것이다. (312.3)
 겟세마네에서의 투쟁과 왕의 궁극적인 선택
 예수께서 미래를 아셨을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가 그 미래를 발생시키는 데 관하여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으셨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가야바와 유다가 그리스도의 생애의 마지막 사건들에서 그들이 맡을 역할에 관하여 선택을 해야 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예수도 선택을 하시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아직은 철회할 수 있었다. 십자가는 불가피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십자가에서 돌아서셔서 가 버리실 수도 있었다. 구원의 계획의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을 통과하겠다는 그의 최종적인 결정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그것이 겟세마네에서 있었던 그의 투쟁의 의미이다. (312.4)
 그러나 예수의 저 중대한 결정으로 나아가기 전에, 마태는 그의 “지원 그룹”인 남아 있는 열한 제자들의 모습을 다시 한번 잠깐 보여준다. 불행히도 예수와 제자들 모두에게 있어서 그들은 도움이 되는 지원을 그다지 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상 예수께서는 그들이 “[모두] 나를 인하여 실족하리라[떨어져 나가리라]”(31절 난외주)고 예언하신다. 그들은 그의 호된 시련 때문에 주님을 버릴 것이다. 개인전 안전에 대한 두려움 외에도, 그들은 그의 고난의 목적 그 자체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고난당하는 종이기보다는 정복하시는 왕이란 구도(構圖) 내에서 메시야 직분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다. 이런 오해는 위기의 때에 그들이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313.1)
 다음으로, 예수께서는 그가 맹목적으로 비틀거리면서 십자가로 나아가고 있지 않다고 다시 한번 지적하신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안다. 그는 자신이 다시 살아나서 갈릴리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을 만날 것도 아신다(32절). 그 예언은 다시 28:6, 7에서 취급되는데, 그 구절에서 한 천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일러준다. 그리고 그 예언은 다시 28:16-20에서도 다루어지는데, 거기서 열한 제자가 그들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그를 경배하고 복음의 위대한 사명 위임을 받는다. (313.2)
 이야기는 바뀌어, 베드로는 자신이 그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께 말한다. 남은 제자들도 동일한 장담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보다 더 잘 알고 계신다. 그는 그들이 이해와 경험에 있어서 그에게 곧 닥쳐올 위기의 중대함과 충격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지점에 아직은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아신다(33-35절). (313.3)
 예수께서는 메시야에 대한 제자들의 그릇된 개념으로 인한 심적인 부담을 갖고 계시지는 않지만, 그 자신도 아직 충분히 준비되지는 못하셨다. 그가 마지막 준비는 겟세마네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313.4)
 겟세마네 동산(감람산 기슭에 있음)은 예수와 제자들이 번번하게 갔었던 곳임에 틀림없다. 결국, 유다는 배반하기 위해 거기 도착해서 그들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지를 안다. (314.1)
 예수께서 자유인으로 그의 마지막 시간들을 보내기로 선택하시는 곳은 저 낯익은 장소이다. 대부분들의 제자들을 그의 뒤에 멀리 남겨 놓으시고,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된 예수께서는 그가 기도하실 때 그에게 힘을 북돋워 주도록 베드로와 세배대의 아들들을 데리고 가신다고 마태는 우리에게 일러준다(36-38절). 예수께서는 그들도 기도하기를 원하시지만 그들은 거듭거듭 잠에 빠진다(40, 43, 45절). 그 기도의 실패는 그날 밤 그를 버림으로써 이르러 올 그들의 더욱더 큰 실패의 맛보기이다(56절). (314.2)
 예수께서는 그의 세 제자들보다 앞으로 조금 더 나아가셔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9절)라고 하셨다. 그의 잠자는 제자들에게 두 번이나 돌아오신 예수께서는 다시 돌아가셔서 본질적으로 같은 기도를 두 번 반복하신다(42, 44절). (314.3)
 이 경험으로부터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 보인다. 예수께서는 그의 고난의 “잔”을 두려워하신다. 많은 저술가들은 십자가상에서의 그의 임박한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두려움과 역사를 통하여 다른 유명한 순교자들의 반응 사이의 큰 대조를 인식해왔다. (314.4)
 죽음으로부터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믿은 소크라테스 같은 고대인들은 그들의 생애의 종말을 평온하게 맞이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순교자들 또한 침착하게 그리고 때때로는 희열에 넘쳐서 죽음을 맞이했다. 예컨대, 제2세기의 서머나의 감독인 폴뤼카르푸스(Polycarp, c. AD 69-155)가 그의 생명을 곧 빼앗을 지방 총독과 대면했을 때, 그는 그를 박해하는 자에게 그의 일을 계속 진행하라고 말했다. AD 155 또는 156년 그의 순교 후 곧 기록된 한 편지에서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 “그는 용기와 기쁨에 고취되었고, 그의 얼굴은 우아함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선고될 일들에 공포에 질려 무너지지 않았고” 기쁨에 찬 반응을 나타냈다(The Martyrdom of Polycarp, 12)는 이야기를 우리는 듣는다. 역사를 통하여 많은 순교자들의 경험이 이러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올바르다는 것을 알고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314.5)
 역사상의 많은 침착한 죽음들을 보면서, 우리는 "왜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공포심을 가지고 바라 보셨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세상을 너무도 많이 사랑하셨기 때문인가? 그는 믿음이 부족하셨는가? 아니면 솔직히 고통을 무서워하셨는가? (315.1)
 그 해답은 다른 방향에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그가 마셔야만 하는 그 “잔”의 본질과 관계가 있다. 구약에서 그 “잔”은 하나님의 진노(혹은 심판)와 관련이 있다(사 51:17; 겔 23:33, 34). 존 스토트는 이렇게 지적한다: 그리스도의 잔은 “매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신체적 고통이나 멸시받고 배척을 당하는 정신적 비탄 그 어느 것도 상징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세상의 죄를 담당하는 일의 영적인 고뇌, 다시 말해서 그런 죄들이 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심판을 그가 견디는 것이었다”(Stott, The Cross of Christ, 76). 십자가에 대한 예수의 염려는 십자가 위에서 그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잔을 인류를 위하여 마실 것이라는 사실에서 기인된다. (315.2)
 겟세마네에서 예수의 두려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적의에 대한 그의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그가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눈에 “죄”가 되셔야만 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거의 견딜 수 없는 것이다(갈 3:13; 고후 5:21). “그는 죄로 말미암아 아버지에게서 분리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심연은 매우 넓고 매우 검고 매우 깊었으므로 그의 심령은 그 앞에 떨고 있었다. 이 고민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그의 신성의 능력을 행사하지 말아야 하였다. 인간으로서 그는 인간의 죄악의 결과를 감당해야만 하였다. 인간으로서 그는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어야 하였다”(화잇, 시대의 소망, 686)고 엘렌 화잇은 기록하였다. (315.3)
 겟세마네에서 결정의 순간이 이르러왔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시든지 그의 사명을 포기하시든지 해야 했다. 물론 유혹자는 여전히 그의 옆에 서서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그를 지원하기 위해 깨어있지도 못할 것이며(40, 43, 45), 그의 제자 중 하나가 바로 그 순간에 그를 배반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그가 위하여 죽으실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백성들이 그를 곧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14-16, 46). (316.1)
 자신의 뜻대로 하고 십자가에서 물러나라는 그 시험과 싸우시면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다만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뿐인 협박과 강박(强迫)을 겟세마네에서 경험하신다. 큰 고뇌와 두려움 가운데서 그는 마침내 결정을 내리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42, 44절)고 예수께서는 거듭거듭 기도하신다. (316.2)
 그 결정은 이제 최종적으로 내려졌다. 예수는 그의 동산 경험 내내 찾아볼 수 없었던 평온함을 발산하시면서 그의 제자들에게로 돌아가신다. 십자가로 나아가겠다는 그의 결정은 내려졌고 철회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그들을 깨우시면서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45, 46절)고 선언하신다. (3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