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롭게도 부자들에 대한 야고보서의 심판은 신약 성경 다른 어디에서 발견되는 것보다도(계 18장은 아마도 예외이겠지만) 더 폭력적이다. 하지만 이런 심판의 선포는 가난하고 압제받는 자들에게는 소망과 만족을 가져다 준다. 대 반전이 있을 것이다: 힘 있고, 부유한 착취자들은 멸망받을 것이며, 참아 기다리며 고통받은 자들은 농부들처럼 풍부한 수확을 받을 것이다. (219.2)
 “인내”5:7-11의 중심 사상이다. 야고보는 11절에서 사용한 것 외에 7, 8, 10절에서는 인내에 대한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11절의 단어는 1:2의 단어와 같은 것이다. 초점은 능동적인 견딤에 있다. 7-10절에 사용된 단어(makrothumeō와 그 파생어)는 주로 오랜 고난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의 학자인 Elsa Tamez는 야고보가 사용한 단어를 전통적인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태도는 기다리는 것이지만, 실상은, 경계 중이다.” 그녀는 농부들처럼 “야고보의 압제받는 공동체들은 그 어려운 상황이 바뀔 것임을 알았으며, 그 심판은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선포되어 진다. 그때 그들이 단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55)는 주장을 계속한다. (219.3)
 야고보는 인내에 대한 그의 요청을 영세한 농부의 심상(5:4의 한때는 영세한 농부들이었지만 품꾼으로 고용된 자들과 대조하여)으로 예증한다. 가을(10-11월 혹은 12-1월)과 봄(3-4월)과 관련하여 이 서신의 출처인 팔레스타인에는 비가 온다—그것은 저자에게 익숙한 자연적 현상이다. 농부는 씨를 뿌리기 전에 가을비를 참아 기다렸으며, 그러고 나서 곡식을 거두기 전에 봄비를 기다렸다. 그는 그의 통제력을 벗어난 조건들을 기다려야만 하였다. 매일의 삶 속에서의 이 예증으로, 야고보는 그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공동체들이 비록 그들의 기다림이 오래될지라도, 부자들에 대한 주의 심판이 가깝고 확실함을 보증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좋은 소식이었다. “마지막 단어는 선동하며 좌절시키는 자들의 말이 아니다. 마지막 말씀은 주의 것이다”(Morris, 90). (219.4)
 야고보가 그의 독자들에게 참으라고 말하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지금 우리 주위의 사회 조건들을 개선하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말라는 의미인가?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속히 오시며 그때에 그뿐이 악한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다른 곳에서 나는 지적했다(“Poor and Rich,” 256, 257). 야고보도 이 관점을 주장했다고 어떤 사람들은 믿는다. 이런 사람들은 야고보가 그의 시대를 마지막 시대로 이해했고 그는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부유한 착취자들의 희생자들이었던 가난하고 압제받는 자들에게 사회적 공의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사물의 오래된 질서들이 소멸될 것이기 때문에, 개혁과 시정은 결코 야고보의 마음에 들어가지 않았다. 야고보의 생각은, 추측컨대, 바울의 생각과 비슷한데, 재림이 급박하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자신의 사회적 상황에 머무르기를 독려한다(고전 7:17-26). 그러므로, 야고보와 바울은 사회적 개혁을 선동하지 않았다. 이 논증에 반응하면서, 먼저 야고보와 바울이 서로 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자. 그리고 서로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220.1)
 바울이 암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야고보도 신속한 재림 때문에, 가난한 자들은 그들의 비참한 사회적 조건들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며, 더 윤택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고 우리가 결론지어서는 안된다. 게다가, 바울의 용례는 눈가림적인데, 왜냐하면 바울이 노예, 처녀, 결혼한 사람들과 같은 동일한 사회적 범주 속에 가난한 자도 포함되었을지는 의심스럽기 때문이다(고전 7:17-26). 대조적으로, 바울은 가난함을 개선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순향적이다(롬 15:26; 고후 8, 9; 갈 2:10). (220.2)
 다음으로, 야고보의 요점은 시련에 처한 가난한 자와 비교하여 고통없는 자들의 역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문단에서, 야고보는 오직 고통받는 자들, 즉 경제적으로 압제받는 자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그의 관심은 이 범주 밖의 사람들에게는 없다. 하지만, 만일 야고보가 오늘날 여기 있었다면, 그는 우리 주위의 경제적 고난을 개선함에 포함되어져 있는 힘있고 부유한 지위에 있는 자들을 향한 힘있는 말씀을 선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문맥에서, 야고보는 어려움과 실망과 시련과 환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자 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말한다: 참고 견디라. (221.1)
 인내에 대한 야고보의 요청의 중간에서, 그는 표면적으로 이 문단에서의 그의 관심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고를 삽입한다.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말한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5:9). 생각의 흐름에 있어서 이 중절은 압제적인 부자들에게 임한 심판의 날에 대한 그의 초점에 의해 생겨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만일 그들이 서로에게 참지 못하고 오래 고난받지 못한다면 그들도 또한 심판의 수여자일 것임을 알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Kistemaker는 그가 “야고보가 다루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앗아간 사람들에 대하여 인내하지 못하게 된 압제적인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때에 그들은 그들의 비참함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억압된 감정을 터트리며 그들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맹렬히 공격하였다”(James, 166)라고 주장할 때 내 의견과 일치한다. 야고보는 원망하는 것을 멈추도록 항변한다. (221.2)
 인내에 대한 고전적인 모본들
 야고보는 10, 11절에서 명확하게 인내의 주제로 돌아오면서 그의 요점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제시한다. 그는 인내하면서 굳건하게 견딘 두 사람의 모본을 제시하는데, 첫 번째는 일반적이며, 두 번째는 특정하다. (222.1)
 첫 번째는 선지자들의 모본이다(10, 11절). 여기서 야고보는 두 단어, 오래 참음(makrothumias)과 인내(hupomonēn)를 사용한다. 이 선지자들은 오랜 고난을 겪었으며 그들은 능동적으로 견디었다. 구약 성경과 중간 시대 문학 작품들에서, 우리는 이런 미덕을 예증하는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남녀들의 많은 경우를 접한다. 우리는 엘리야와 같은, 시련과 박해를 직면하면서 참고 견디었던 선지자들을 회상케 된다. 심지어 이세벨의 박해 동안에도, 엘리야는 견디었다(왕상 19장 참조). 아마샤와 투쟁했던 아모스(암 7장)와 시드기야 왕과 대립했던 예레미야(렘 38장)도 둘다 인내로서 견디었다. 앞서 우리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투쟁했던 맛다디아와 그의 아들의 참고 견딤도 살펴보았다(마카비 상, 2장). 그리고 시락서 44-50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우리 조상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찬양”이 야고보의 마음에 배경이 되었으리라는 사실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비록 히브리서 11장이 야고보서에 영향을 끼쳤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신약 성경의 고전적인 이 구절들에서도 우리는 가장 힘든 상황 속에서도 참고 견딤에 대한 모본이 된 또 다른 위인들과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발견한다. 참고 견딘 모든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복되다”(5:11)라고 말한다. 함축된 의미는 그의 독자들에게 분명하여졌다: “네가 참고 견디면 복이 있도다[이 서신의 두 번째 축복; 1:12을 보라]”(또한 마 5:11, 12을 보라). (222.2)
 능동적인 인내에 대한 야고보의 예증은 욥의 기사이다. Sophie Laws가 말한 것처럼, 욥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사람이 아니요, 비록 심한 형태이지만, 인간의 평상적인 고통인 가난, 사별, 병듦을 경험한 사람이었다”(215). 그래서 비록 욥의 상황이 야고보의 공동체의 경험과 병행되지는 않았지만, 야고보는 그를 능동적인 인내에 대한 모본으로 그를 사용했다. (우리는 영어의 전통적인 문구가 된 Authorized Version의 “욥의 인내(patience of Job)”보다는 NIV의 “견딤(perseverance)”이 훨씬 더 좋은 번역임을 주목해야 한다). (222.3)
 욥의 기사와 운문들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우리의 정경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그가 진정으로 인내의 본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백여 년 전의 잘 알려진 야고보서 주석가, Joseph B. Mayor는 “욥은 재난에 대한 그의 첫 번째 수용을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인내를 요청하는 바에 대한 모본이 아니다”라고 진술했다(1:21; 2:10). 우리는 다소간 3장에서의 그의 불평과 그에 대한 친구들의 신뢰의 부족에 대한 그의 분개, 하나님이 그를 버렸다는 생각으로 인한 그의 의분이 극렬하게 민감한 증상이요, 맹렬하고, 참지 못하는 성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158). William Barclay와 같은 다른 사람들은 욥은 그에게 닥친 일에 열정적으로 분개하며, “소위 그의 친구들과의 인습적인 논쟁에 열정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생각에 대해 열정적으로 고뇌한 것으로 구약 성경에 그려진다. 그처럼 격렬한 단어로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125). (223.1)
 욥에 대한 정경의 묘사와 그에 대한 야고보의 평가가 서로 부조화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가 중간사 시대에 욥의 증언이라 불리는 작품에서 욥의 기사를 끌어 온 것이라 제안한다. 이 책은 욥의 경험을 미화하여 기록하였으며, 이는 유대 사회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그 이야기들은 심각한 시련 중에서도 욥의 더 없는 인내와 참음을 강조했다. 이 설명에서 불평하는 사람은 욥이 아니요, 욥의 아내, Sitis이다. 그는 매우 긍정적인 면으로 묘사된다. 그는 또한 그의 재산을 기꺼이 나눠주는 가장 의로운 사람으로 제시된다. 그의 인내와 그의 위대한 자비 때문에, 그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칭찬과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을 받았다. (223.2)
 비록 야고보의 마음속에 욥의 증언의 기사가 있었던 것처럼 보일지라도, 구약 성경의 기사는 고대 현인의 확고부동함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심각하게 불평하고 그의 친구들을 향하여 정말 참지 못했지만, 그는 결코 그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 참고 견딤을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풍부하게 축복하셨으며 그가 전에 가졌던 것의 두 배로 번영하게 하셨다. 욥은 4대에 이르는 자손을 볼 때까지 살았다(욥 42:10-17). (223.3)
 이것이 야고보가 그들의 공동체들에게 그들의 고통 중에 갖기를 원하는 인내와 확고부동한 참고 견딤이다. 더욱이, 이런 방식으로(욥의 경우처럼), 그들은 확실한 복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5:11)이시기 때문이다. (224.1)
 맹세함
 야고보는 맹세를 반대하는 훈계로 인내에 대한 이 부분을 끝맺는다. 표면적으로 이전의 구절과는 어떤 연결점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는 12절의 시작에서 “무엇보다도”라는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나는 이 요점을 너희가 잊지 않기를 원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비록 명확하게 진술되지는 않았지만, 압박과 고난이 그의 공동체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참지 못하고 맹세토록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야고보가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24.2)
 여기서와 마태복음 5:34-37의 예수님의 말씀에서의 맹세를 “상스러운” 언어의 사용이나 신성 모독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맹세하는 것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야고보는 둘 다 서약하고 맹세하는 것을 금한다. 하지만 그 같은 금지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그렇게 명쾌할 만큼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Peter Davids는 “구약에서 맹세하는 것은 한 일을 성취할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었다(출 20:7; 레 19:12; 민 30:3). 어떤 경우에는 맹세하도록 명령받았거나(출 22:10, 11), 혹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민 14:21; 신 4:31; 7:8). 신약에서도 예수님에 의해(마 26:63), 바울에 의해(롬 1:9; 1:20; 고후 1:23; 11:11; 살전 2:5, 10; 빌 1:8) 반응되고 사용된 예를 찾을 수 있다. 구약에서는 이미 맹세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경미하게 다루고 있으며(렘 5:2; 7:9; 호 4:2; 슥 5:3, 4; 말 3:5), 맹세치 말라는 경고들이 후에는 그들의 경박한 사용을 막기 위해서 가능한 어떤 곳에서도 맹세하는 것을 피하라는 권면으로 확대되었다(Sir. 23:9, 11)”(Commentary, 189)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224.3)
 예수님과 야고보의 시대까지, 엣세네파와 같은 어떤 유대 무리들은, 우리가 사해 사본을 그들의 덕택으로 여기는, 공동체로 입당하는 초신자를 위한 입당 의식과 적절하게 제정된 법정의 절차를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맹세하는 일을 거절하였다. 흥미롭게도, 기독교 역사는 맹세하는 것에 관한 예수님과 야고보의 엄한 금지를 잘 실행하지 않았음으로 보여준다. 여기에는 법정에서나 혹은 어떤 다른 장소에서도 맹세하기를 거절한 6세기의 재세례파 개혁자들은 예외이기도 하다. 퀘이커 교도들 또한 예수님과 야고보의 금령을 문자적으로 준수한 것도 마찬가지의 사실이다. (225.1)
 야고보와 예수님은 모두 공적인 서약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는 자신의 흠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매일의 담화에서 맹세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공격하고 있다. 그같이 맹세를 사용하는 것의 위험성은, Burton Scott Easton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을 생략하면 진리를 말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대한 어떤 구속력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68). 그러므로, 초점은 정직과 진실함에 맞추어진다. 이것이 야고보가 그들의 공동체들에게 예증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심지어 고통과 고난 중일지라도, 그들은 진실하고 정직해야만 한다. 그들의 긍정은 예가 되어야 하며, 그들의 부정은 아니오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이 의미하는 바를 말해야 하며 그들이 말하는 것이 그들의 의미하는 바가 되어야 한다. (2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