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의 다섯 번째 부분(5:7-20)은 여러 면에서 이 서신의 시작 부분(1:1-18)과 병행한다. 맨 첫째로, 둘 다 시련과 고난을 강조한다. 이 책의 시작과 마지막에서 고통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다루는 것으로 이 서신의 전체 주제를 위한 수미쌍관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의 편지의 시작에서, 야고보는 많은 종류의 시련이(1:2) 있으며, 있을 것에 대한 사실을 알고 있다. 여기서, 결론적으로, 그는 그의 독자들에게 그의 편지에서 암시된 시련들로 인한 고통들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반응해야한다고 제안한다. (215.1)
 이런 반응들의 첫째는 인내하라는 요청이다(5:7-12). 이 구절들에 나타난 권고들과 경고들은 시작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을 반사하고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참고 인내함을 고무시키고 있다. 독자들은 두려움 없이 이 덕성을 예증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관할하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인내하도록 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1:5), 그분의 오심으로 시련과 고난을 겪고 있는 자들의 근본적인 문제가 종결될 것이다(5:7-9). (215.2)
 ■ 말씀에 들어감
 7-12절을 적어도 두 번은 주의 깊게 읽은 후, 당신의 야고보서 노트에 질문에 대한 답을 적고 중요한 생각들을 적으면서, 아래의 과제를 실행하라. (216.1)
 1. 왜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에게 참으라고 말하는가(7절)? 그의 권고의 직접적인 문맥은 무엇인가? (216.2)
 2. 9절의 야고보의 진술은 7절에서 시작된 사상의 흐름이 중단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단절의 원인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 두 구절의 서론으로 여겨질 만한 이전의 구절들을 발견하였는가? 당신의 발견을 기록하라. (216.3)
 3. 욥기를 훑어 보라. 욥이 그의 전 시련기간동안 끊임없이 참고 인내한 것을 발견하는가? 만일 당신의 대답이 “아니오”라면, 그가 인내심을 상실한 서너 경우의 목록을 작성하라. 그리고 당신이 발견한 것에 비추어 야고보가 모본으로 욥을 사용한 것에 대하여 설명하라. (216.4)
 4. 마태복음 5:34-37야고보서 5:12을 병행 단락으로 기록하라. 두 말씀에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적어 보라. (216.5)
 5. 야고보가 “맹세하지 말라”(12절)고 말했을 때 그가 의미한 바가 무엇이라고 당신은 생각하는지 설명하라. 이것은 법정에서의 서약이나 경찰서에서의 보증도 포함하는가? 그 이유는, 혹은 그렇지 않은 이유는? (216.6)
 6. 예수님과 야고보는 실제로 모든 상황에서 항상 예와 아니오(마 5:37; 약 5:2)의 대답이 주어져야 함을 의미했는가? 정해진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주지 않는 것이 최선일 때도 있는가? 그런 때는 언제인지 설명하라. (216.7)
 ■ 말씀을 탐구함
 인내와 주의 오심
 고난을 참으라는 요청(7절)은 곤란과 곤궁에 처해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일반적인 권고로 읽혀져 왔다. 하지만, 이 구절 시작에 위치한 헬라어 oun(그리하면)의 존재는 이 요청이 이전의 문장과 얽혀 있음을 지적한다. “참으라”는 명령어가 1-6절과 분리되어 읽혀서는 안 된다. 야고보의 관심은 여전히 압제하는 부자와 관련된 고난받는 가난한 사람들의 역할에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해야 하는가? (217.1)
 1-6절에서 야고보는 부유한 부류의 사람들의 압제적이고 착취적인 관습들을 약술하였다; 그는 그들의 사치스럽고 낭비적인 삶을 저주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리치실 것이라는 진술로 결론을 맺었다. 하나님께서 부자들을 다루실 것이기 때문에, 야고보의 독자들은 권력이 있는 로마 사람들과 그들의 부유한 지방 관료들에 대항하여 폭력적 행사로 맞서는 셀롯당이나 셀롯당과 같은 유형을 따를 필요가 없다. 대신에, 야고보는 그들에게 주의 오실 때까지 참으라고 충고한다(7절). 야고보는 그들에게 그 날이 오면 그들의 압제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요, 대 반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증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인내심을 상실하거나 복수심에 불타 자포자기해서는 안 되었다(1:11; 4:14을 보라). (217.2)
 이 부분에서 우리는 질문이 야기된다(만일 우리가 본문과 문맥에 충실했다면), ‘주의 오심’(5:7)과 관련된 사건은 무엇인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는,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 그것은 예수님과 그분의 재림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 입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주장은 “오심”에 사용된 단어 parousia에 있는데,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시대의 끝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을 위해 채택된 전문적인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 단어는 세속적인 문맥에서도 로마 황제가 한 도시나 지방을 공식적으로 방문하는 것에 종종 사용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을 위한 적절한 단어가 되었다(고전 15:23; 살전 2:19; 4:15; 5:23; 살후 2:1; 벧후 1:16; 요일 2:28; 마 24:3, 27, 37, 39). (217.3)
 두 번째 해석은 여기의 “주”는 예수님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그분의 심판의 날과 관련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4장5:1-6의 인접한 문맥에서, 심판자는 하나님이시다(“만군의 주”와 관련된 4절을 주목하라; 9절과 비교하라); 그리고 10, 11절“주”를 하나님 외의 다른 개체로, 그리스도로 이해하기에는 매우 곤란함이 있을 것이다(Easton, 66). 야고보가 저술할 때의 사상—세계가 후기 신학적으로 발전된 “마지막 날”에 대한 그리스도교 종말론적 관점(예를 들어, 바울의 서신에 표현된)이 아닌, 유대 묵시 문학적인 사상이었다고 우리가 인식할 때, “주의 오심”이라는 구절을 구약의 여호와의 심판의 날과 병행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데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218.1)
 1-6절의 야고보의 언어는 바울과는 사뭇 다르다. 야고보가 마지막 심판에 대해 표현하는 방법은 바울이 그것에 대해 표현하는 방법과는 다른, 시간적으로 좀더 이른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바울의 논의는 기독교에게 그 사건에 대한 전문적이고 독특한 이해를 갖게 했다. 하지만 야고보의 말하는 방식은 심판의 날을 외쳤던 고대 선지자들과 유대 묵시문학자들과 더 유사하다. 예를 들어, 야고보가 부자들에게 그들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며 통곡하라고 권할 때(1절), 그는 악한 자들에게 임한 재난을 선포했던 선지자들 중 한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스바냐의 Dies Irae 시가 그 고전적인 예이다: “막데스 거민들아 너희는 애곡하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수운하는 자가 끊어졌음이니라 그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같이 가라앉은 ... 자를 벌하리니 ...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 심히 애곡하는도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습 1:11-15). (218.2)
 매우 중요한 사실은 부자들에게 임한 심판을 “도살의 날”(약 5:5)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과 그 나라들에게 임하게 될 도륙, 대학살, 전쟁에 관한 예언을 상기시킨다(도륙의 날에 울며 애통하라고 나라들에게 요청하는 예레미야 25:34을 보라; 또한 겔 21:15; 사 35:2-4; 렘 12:3을 보라). (218.3)
 게다가 야고보의 심판은 재림과의 연관보다는 구약의 지역적 파멸에 대한 심판과 더 잘 병행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야고보의 예언은 A.D. 70년에 일어났던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부유한 자들이 셀롯당뿐만 아니라 침공한 로마인들에게 도륙당한 때를 말한 것임에 틀림없다.) 만일 야고보가 여기서 재림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 사실이 그리스도인의 기본 신앙의 진리를 경히 여기는 것은 아니다. 한 교리가 하나의 본문을 기초로 세워지고 넘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각 구절을 그 문맥에 따라 읽으며 본문 그 자체가 말하는 바를 용납해야 한다. 연역적인 연구보다는 귀납적인 연구가 요구된다-집어넣기(eisegesis: 자기 해석)보다는 끌어내기(exegesis: 주석)가 요구된다. (2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