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출애굽기 제 IV 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중에 거하심 (출애굽기 25-40) 제 11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응징하심 (출애굽기 32-34장)
 하나님의 신이 모세와 이스라엘 전체와 동행하지 않는 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총애는 드러날 수 없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는 독특한 존재 이유가 위태롭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또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을 이행하고자 전진하게 된다. (296.6)
 하나님께서는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17절)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 너를 알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17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중재자인 모세와의 관계 때문에 그들과 동행하기로 하신다. (296.7)
 모세는 마침내 성공을 거둔다. 그의 중재가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는 이전과 똑같은, 하지만 몇 가지 새로운 요소들이 가미된 명분을 사용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로 시작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변론에 나섰다. 모세와의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실 때 그분께서는 모세와의 언약을 이행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유대관계를 이스라엘의 유익이라는 연장선상에서 이해하였다. 얼마나 놀라운 중재자인가! (296.8)
 모세는 이제 마지막 요청을 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그분의 현현으로 확증받고자 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을 다시 보게 된다면 그와 하나님 사이의 모든 언약은 확증받는 것이며 그로 하여금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동기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견디어 낼 수 있는 만큼의 은혜로운 관찰을 허락하신다. 우리는 이제 이 은혜로운 관찰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297.1)
 하나님께서 지나가심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심과 당신의 이름을 반포(頒布)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까닭에 당신의 얼굴을 보일 수 없으셨다. 모세는 단지 하나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297.2)
 하나님께서는 19절“나는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말해주는 그분의 선하심의 진수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모세에게 기꺼이 드러내 보이고자 하셨다. 주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며 선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따라서 그분의 자비는 외적인 구속력으로 속박할 수 없다. 그분의 자비는 그분만의 자비이기 때문이다. (297.3)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처음 것과 같은 돌판을 만들 것을 명하신다. 모세의 가슴은 뛰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롭게 하시고자 하신다! 깨어진 언약은 이제 회복될 것이다. 아침에 모세는 두 돌판을 손에 들고 하나님 앞에 섰다. 하나님께서는 모세 앞으로 지나시며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선포하신다. 여호와의 속성에 관한 이 선포는 진실로 당신의 이름이 갖는 의미를 진술하고 있다. 그분의 이름이 처음에 두 번 등장하는 것에 주목하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 그들의 마음에 이와 같은 하나님의 속성이 떠오르게 된다. 하나님의 속성은 다음과 같다: (297.4)
자비로우시다
은혜가 많으시다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
인자하시다
진실이 많으시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푸신다
악을 용서하신다
과실을 용서하신다
죄를 용서하신다
형벌 받을 자를 결단코 용서하지 않으신다
(298.1)
 놀라운 여호와의 이름이 구약의 다른 8곳에도 나타난다(민 14:18; 느9:17; 시 86:15; 103:8; 145:8; 욜 2:13; 욘 4:2; 나 1:3). 우리는 출애굽기 20:5에서도 하나님의 품성에 관한 간략한 선포를 볼 수가 있다. (298.2)
 이들은 구약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하나님의 본성(속성)에 관한 가장 기본적이고 직접적인 언급들이다. 그분의 본성에 관한 더욱 많은 내용들이 구약에 쓰였을 것이다. 이제 몇 가지 가장 기본적인 요점들을 언급해 보자. (298.3)
 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범죄한 가운데 나타나셨다. 놀라운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선포는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큰 죄를 범한 후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다루시면서 당신의 본성을 선포하신다. 후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죄악이 많은 곳에 은혜와 자비가 넘치지 않는가! (298.4)
 2.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강조 되어있다. 용서에 관한 단어가 세 번 언급되는데, 죄에 관한 주된 히브리어 단어가 각각 세 번 등장한다. 분명한 사실은 모든 죄에 용서가 있다는 사실이다. 죄의 결과에 대한 형벌은 단지 삼 사대 계속되지만 그분의 인자는 천대에 이른다. (299.1)
 3.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에는 균형이 있다.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강조되어 있지만 완고한 죄인은 하나님께서 간과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에 관한 선포는 그분의 성품에 맨 마지막에 등장하고 있으며 그분의 본성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분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은혜는 공의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299.2)
 4.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심으로 경배케 함.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모세는 엎드려 경배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출애굽기에서 우리는 자주 경배로 답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실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경배하는 일이다. 모세도 예외일 수 없다. (299.3)
 하나님의 용서와 임재는 아무리 그 중요함을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했다. 그분의 용서가 없이는 그분의 임재는 매우 파괴적인 위험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는 그분의 용서가 함께 동행해야 했다. (299.4)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전의 언약에서는 용서가 반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출애굽기 23:21에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셨다. 자비와 공의의 균형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용서가 주어질 필요는 없다. 진정한 용서와 자비는 이런 것들을 요구하지 않는 제도나 계획 속에서 실행되어야한다. 만약 이것들이 제도의 일부가 된다면 결코 공의와 자비가 될 수 없다. 배도의 죄와 진정한 자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출애굽기 본 장의 사건에서와 같은 범주 안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때 죄가 죄가 될 수 있으며 자비가 자비가 될 수 있다. (299.5)
 모세와 하나님 사이의 포괄적인 대화가 이러한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에 인색하신 분이 아니시지만 자비가 무엇인지 또 값싼 관대함을 허락하실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다. 하나님은 결코 가벼운 표준이 될 수 없으며 관대한 할아버지가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결코 강제로 자비를 베푸시지 않으신다. (300.1)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관계 속에서 당신의 백성과 교통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동떨어져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며, 어떤 추상적인 일을 일방적으로 처리하시는 분도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공개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기본적인 본성과 같은 것은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그 밖의 다른 많은 것들은 하나님과 협상할 수 있다. 출애굽기에 의하면 인간들이 모든 사건의 중요한 역할을 행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얼마나 중요한 책임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고 계신가. (300.2)
 새 언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