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와 로마 군대 제4장 그리스도교 군복무관의 체제화 C.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교회법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군복무관의 체제화
 아를(Arles) 회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비아 교 전투를 승리로 끝낸지 오래되지 않은 시기에 교회와 국가의 다양한 당면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소집한 회의였다.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듯이 이 회의의 일부 결정 사항들을 통하여 교회는 국가의 보호를 받아들이는 대신에 국가가 요구하는 시민적, 군사적 의무를 약속하고 있다.12 이러한 결정의 좋은 실례로 지적되어온 것이 이 회의의 교회법 제 3조와 제 7조이다. (218.1)
 바르디(Bardy)는 아를 회의의 교회법 제 3조와 7조를 지적해서 말하기를 “교회법 제 3조는 평화시에 군복무를 거부한 자나 상급자에게 불복하는 자들에게 출교를 명하고 있고 제 7조는 단순히 관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그리스도인 관리를 출교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그 관리가 우상숭배 행위에 관련되었을 때만 출교하도록 함으로써 교회가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봉사에 대해 그 적법성을 완전히 인정했다”13고 하였다. (218.2)
 그러나 아를 회의의 교회법 제 3조와 제 7조의 이같은 이해는 그동안 이 회의의 국가 편향적 성격을 과장하여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한 여러 실례들의 하나이다. 먼저 제 7조부터 그 실지 내용을 검토해 보면 (218.3)
제 7조: “신자로서 관직으로 나아가는 자들 곧 교회의 규칙에 위배된 행동을 시작한 그리스도인 관리들은 그 이유로 하여 그리스도교 회중으로부터 축출되어야한다. 같은 원칙이 공직생활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하였다.14
(218.4)
 여기서는 특별히 우상숭배를 언급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없고 다만 “교회 규칙(disciplinam)”이라는 좀더 일반적인 표현이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군복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조항은 제 3조이다. (219.1)
제 3조: “평화의 때에 무기를 내던지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교회의) 성례전에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15
(219.2)
 그런데 여기서 “평화의 때(in pace)”“무기를 내던진다”(arma projicere)라는 표현이 문제이다. 이 표현을 둘러싸고 그동안 많은 논란이 이루어졌다.16 우선 “평화의 때”에 부합되기 위해서는 “무기를 내던지다”라는 표현을 사람을 해치기 위해 “무기를 던지다”(arma in alium conicere)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는 주장들이 우세했다. 즉 그리스도인은 평화의 시기에 한하여 무기를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17 이렇게 되면 이 교회법은 군사적 또는 전투적 행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살인 행위나 검투사들을 정죄하는 규칙이 되고 만다. 이 점은 제 3조항에 바로 이어지는 두개의 규정에서 전차몰이꾼, 배우 등에 대한 제재 조치가 소개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매우 그럴듯하게 보이기도 한다. (219.3)
 그러나 문제는 고대의 라틴문학 및 종교적인 문헌들에서 “arma projicere”가 사사로이 무기를 사용해서 사람을 해치는 뜻으로 사용된 예가 전혀 없으며 언제나 전투참가를 거부한다는 의사 표시로 지휘관 앞에서 자신의 무기를 내팽개치는 행위를 뜻하고 있다는 데 있다.18 사실이 그렇다면 아를 교회법 제 3조의 뜻하는 바는 분명히 군복무의 거부로 보아야 할 것이다. (219.4)
 그렇지만 또한 이렇게 되면 “평화의 때”란 표현이 더욱 난처해지게 된다. “평화의 때”보다는 “전시에”(in bello)란 표현이 더 합당하게 보이기 때문이다.19 실지로 교회와 국가의 일치가 제도화되었던 중세기 말의 교회법 필경자들은 “in pace”“in bello”로 고쳐쓰기도 했다.20 너무도 당연하게 평화시에 불복종하는 것보다는 전시에 불복종하는 것을 훨씬 더 위험한 행동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로마 제국의 군법에 전투 중에 탈영한 자들에 대해 사형이라는 무거운 처벌을 규정하고 있는 터에21 교회법에 이를 새삼스럽게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리하여 많은 학자들은 이 “평화”가 국가간의 평화나 군사적인 전쟁 부재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교회와 콘스탄티누스 황제 사이에 이루어진 교회 평화라고 주장해왔다.22 (220.1)
 이들이 이해하는 대로라면 아를 회의의 교회법 제 3조가 뜻하는 바는 “그때까지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그리스도인의 신분적 확신 때문에 빈번하게 군부대를 탈영해 왔었으나 아를 회의로 말미암아 이 탈영의 관습이 정죄되었을 뿐만 아니라 출교라는 무서운 제재까지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23 (220.2)
 그러나 이 해석은 “in pace”의 관용적인 뜻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그 중대한 약점을 갖고 있다. 오르니에 의하면 이 교회법이 제정되던 상황에서 “in pace”란 표현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한가지 뜻 즉 “국가간의 평화”라는 의미 외에 다른 뜻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24 (221.1)
 그렇다면 “평화시에 무기를 내던지는 자들은 성례전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라”는 표현의 관용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스크레탕(H. F. Secretan)은 “대박해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은 교회 내의 기회주의적인 무리들이 이 박해를 덜 고통스럽고 덜 지속적인 것으로 완화시키기 위하여 군대에 강제 입대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른바 평화적인 병사로서 군대에 남아있게 한 것”이라 하였다.25 즉 그리스도인 병사는 때때로 사람들을 체포, 구금하고 사형에 처해야하는 장교가 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평화의 때에 비무장 군인으로서 군복무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221.2)
 다시 말하면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에는 피를 흘릴 목적으로 무기를 사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절실하게 신앙 양심의 갈등을 느낄 필요 없이 군복무를 계속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기에 무기를 팽개치고 군대를 떠나는 것은 경기 규칙을 어기는 선수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직장 윤리상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의 이러한 태도의 진정한 배후에는 평화시인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군복무 거부문제로 교회와 국가 사이의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다는 교회 지도부의 의도가 작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아를 회의의 교회법 제 3조를 뒤집어 말해본다면 ‘전투 중에 무기를 내팽개친 그리스도인 병사들 (과거의 수많은 전례에서처럼)에 대해서는 교회가 비난할 수 없다’는 뜻이 될 것이다. (221.3)
 여기서 주목되는 현상은 앞서「히폴리투스의 교회법」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군대의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의 “militare”와 실지로 전투 행위에 참가한다는 뜻의 “bellare”로 군복무의 성격을 이분하려는 움직임이다.26 그런데 과연 로마 군대의 군복무 현장에서도 이같은 구분이 가능했을까? 베인톤(Bainton)은 이같은 구분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이른바 그리스도인 경찰관 이론을 발전시켰다.27 헬제란드(Helgeland)는 베인톤의 경찰관 이론이 군대의 기능과 경찰의 기능을 다르게 이해하는 현대적인 개념 위에 세운 것으로서 당시 로마 군대의 구체적 현상에서는 폭력적인 군대와 비폭력적인 경찰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28 그러나 “militare”“bellare”의 구별을 군대의 편제적 구분이나 군복무 기능들의 제도적 구분에서 볼 것이 아니라 멕물렌(Ramsay Macmullen)이 증언하고 있는바 “많은 병사들이 선술집 밖에서는 주먹질 한번 해보지 않고서도 군복무를 마칠 수 있었다”는 전체적인 군대 생활 환경의 변화를 고려한다면 그리스도인 병사의 주관적 신념에 근거한 “militare”“bellare”의 구별은 가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22.1)
 전투 행위를 정죄하는 초대교회의 기본 입장은 중세시대까지도 부분적으로 간직되어 왔다. 중세의 일부 교회법들에서는 정당 방위를 위한 정의로운 전쟁에 참가한 그리스도인 병사들에게 까지 교회의 성례전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그 앞서 일정한 고행을 치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29 (223.1)
 이렇듯 아를 회의의 교회법은 외견상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전투 행위를 부정하는 초대교회 이래에 전통적 입장을 계속 유지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내면적으로는 이미「사도들의 전통」을 위시한 앞서의 교회법들에서 진행되어온 추세 곧 그리스도인의 군복무에 대한 도덕적 엄격성이 완화되는 추세가 더욱 깊어지고 있다. (223.2)
 4. 니케아 회의의 교회법(Canons of the Synod of Nicaea, 325 A.D.)과 그리스도인 군복무에 대한 도덕적 긴장의 해소
 아리우스 논쟁을 다루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소집되었던 이 회의의 교회법 중에 군복무 문제를 취급한 조항은 제 12조 하나이다. (223.3)
제 12조: “은혜로 말미암아 부름을 입어 처음에는 그들의 무기를 벗어 던져 자신들의 믿음을 선포하였다가 나중에는 마치 개가 그 토한 것에게로 다시 돌아가듯, 심지어는 돈과 뇌물을 바쳐가면서 까지 다시 군복무를 시작한 사람들은 3년 동안 (말씀의 훈계를) 듣는 사람으로 지낸 다음에 10년간을 땅에 엎드려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30
(223.4)
 이 조항은 바로 앞에 있는 11조 (일부 고대 사본들에서는 제 12조가 제 11조의 부록의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에서 리키니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대적하고 있는 리키니우스 황제 휘하의 그리스도인 군복무자들을 저주하고 있다는 헤펠레(Hefele)의 결론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31 즉 이 조항은 확실히 리키니우스 황제가 반그리스도교적 명령을 내렸을 때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유로 하여 군대를 떠났다가 후에 배고픔과 탐욕때문에 다시 리키니우스의 군대로 되돌아간 그리스도인 병사들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32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와 대적하기 위하여 다시 로마의 옛 신들에게로 돌아가 그리스도인 병사들과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의 싸움은 그리스도교와 이교의 싸움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33 리키니우스 군대의 복무자들은 누구나 배교자로 취급되었던 것이다.34 (2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