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와 로마 군대 제4장 그리스도교 군복무관의 체제화 C.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교회법에 나타난 그리스도교 군복무관의 체제화
 그리스도인 병사 콘스탄티누스를 통해,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군대의 x 상징을 통해 그리스도교와 군국주의는 놀랍게 결합되었다. 이에 상응하는 그리스도교회 군복무관의 변화는 이같은 체제화의 한 국면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이 시대에 개최되었던 교회 회의의 교회법 활동을 통해 명시되었다. (212.1)
 1. 4세기의「사도들의 전통」 역본들에 나타난 그리스도교회 군복무관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교회법에 나타난 그리스도교회 군복무관의 변화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교회법과 그 전(前) 시대의 교회법에 나타난 군복무 관계조항을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제 1장 “교부들과 전쟁․군대․군복무”“히폴리투스” 항에서 현존하는 그리스도교 최초의 교회법인「사도들의 전통」을 분석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의 편의를 위해 그 라틴어 역본 제 6조의 군복무 관련 사항을 다시 요약해 본다면

 (1) 군대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장교들은 즉각 군대를 떠나야 했으며 책임이 낮은 하위계급의 사병 복무자들은 조건부로 군복무를 계속할 수 있었다.

 (2) 그 조건은 어떠한 이유와 환경에서도 사람에 대한 살해행위와 군대 서약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살인 명령에는 불복종이 권고되었다. 이러한 규칙의 위반에 대한 처벌은 출교 처분이었다.

 (3) 침례 후보자나 교인으로서 군에 입대하고자 하는 사람은 출교시켰다.

 (4) 직무상 불가피하게 사람을 체포, 구금, 구타, 처형시켜야 하거나 그러한 명령을 내려야 하는 공직 종사자로서 교인이 되고자하는 자나 교인이 된 자는 그 직책을 포기해야 했으며 이를 불복할 때는 출교시켰다. (212.2)
 「사도들의 전통」에 근거하고 있으나 보다 늦게 소아시아와 시리아 지역 교회에서 간행되었던「주님의 언약」(Testamentum Domini)은 군복무에 대하여 엄격한 규정을 제시하고 있으나 군직 자체는 조건부로 용인되고 있다: (213.1)
“만약 어떤 사람이 군직이나 아니면 다른 책임 있는 공직에 있다면 아무도 억압하거나 살해하거나 약탈하거나 진노하거나 괴롭히지 말도록 가르쳐야한다. 그들은 받는 급료만으로 만족해야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께 침례를 받고자한다면 군복무나 책임 있는 공직을 사직하게 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을 받아들이지 말라.”1
(213.2)
 그런데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사항은「사도들의 전통」도 초대교회의 최초의 생활규범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전 시대의 생활규범을 전승한 문서이면서 동시에 그 당대의 변화된 정세에 대한 신앙생활의 적응을 반영하고 있는 중간 시대적 문서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사도들의 전통」에서 이미 1세기, 2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엄격한 군복무관이 완화되는 방향으로 수정되고 있다는 것이다.2 이같은 완화 추세는 마찬가지로「사도들의 전통」에서 파생된 4세기 중엽의 교회법인「히폴리투스의 교회법」(Hippolytean Canons)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213.3)
「히폴리투스 교회법」 제 13조: “관리와 군인에 관하여: 그들로 하여금 아무도 죽이지 못하게 하라. 그들이 그러한 명령을 받았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로 하여금 승리의 화관을 쓰지 말게 하라. 책임 있는 직책을 맡은 관리와 복음의 의를 실행하지 않는 자는 출교시키고 주교와 함께 기도하는 자리에 참여치 못하게 하라. 살상의 권리를 가진 사람이나 군인은 어떤 경우에도, 심지어는 살인 명령을 받았을 경우에도 살인을 하지 않게 하라. 그들로 악한 말을 내뱉지 않게 하라. 영예를 받게된 사람들은 화관을 쓰지 않도록 하라. 장관이나 지사의 자리로 승진한 사람으로서 복음의 의로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은 신도들의 무리로부터 축출하고 주교와 더불어 기도하는 자리에 참여치 못하게 하라.”
(213.4)
제 14조: “그리스도인은 군인이 되지 않도록 해야한다. 칼을 가진 우두머리에 의해 강압을 받을 경우 외에는 그리스도인은 군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로 하여금 피 흘리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 만약 그가 피를 흘리게 했다면 처벌과 눈물과 신음으로 정결케 되지 않는 한 성례식에 참예치 못하게 하라.”3
(214.1)
 위에서 나타난 첫 번째 변화는 군복무를 자원입대와 강제입대로 구별하여 강제입대의 경우에는 피를 흘리게 하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군복무를 용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변화는 제 14조에 나타나고 있다. 제 13조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군대의 강압적인 명령에 따라 피 흘리게 하는 죄를 지은 군인들도 엄격하고 공개적인 참회를 치른 후에 교회와 화해할 수 있게 된 점이 그것이다. (214.2)
 전체적으로 볼 때「히폴리투스의 교회법」의 군복무관은 전환기적인 시대의 특징의 하나인 가치관의 불안정성과 갈등을 표출하고 있다. 이 불안정성과 긴장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발생하고 있다. 즉 초대교회의 전통적인 가치 기준에 의하면 군대는 그리스도인이 몸 둘 곳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군대에는 그리스도인 개종자들이 발생했다. 그들은 사람을 살상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들은 때때로 불가피하게 사람을 살상했다. 이 사태에 대하여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무엇을 해야하는가? 교회는 결국 교회가 최소한 그 같은 살상행위를 정죄한다는 사실만이라도 내외에 천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죄를 지은 병사들을 공개적인 참회를 거치게 하여 교회의 교제에 받아들였던 것이다. (214.3)
 따라서「사도들의 전통」과 「히폴리투스의 교회법」 사이의 1세기 남짓한 기간에 발생한 진정한 변화는 그리스도교회의 도덕적, 신학적 신념이 아니라 교회와 신도들이 처한 정치 사회적 상황과 그 세태이었다고 할 것이다. (215.1)
 2. 엘비라 회의의 교회법(Canons Concillium Illiberitanum, 306 A.D.)과 그리스도인 군복무
 엘비라 회의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 대박해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안 헤르클레우스의 양위(讓位)로 종식된 직후인 306년에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주로 대박해로 말미암아 소홀해진 교회내의 여러 기율과 기강 문제들을 논의하고 81개에 달하는 엄격한 교회법 조항들을 새로 제정하였다. 306년은 콘스탄티누스가 부황을 계승한 해이기도 해서 엘비라 회의의 교회법 조항들은 그 후에 콘스탄티누스의 영향 아래 제정된 교회법 조항들과 대비해 볼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215.2)
 그런데 교도들의 문란한 기강을 단속하는 81개 항에 달하는 엘비라 종교회의 교회법은 단지 16조에서만 두움비르의 직책과 관련하여 간접적으로 군복무 문제를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전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의 군복무 문제에 대해 거의 침묵에 가까운 태도를 일관하고 있다. 이같은 침묵은 군복무의 전적인 용인을 나타내는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전적인 거부의 뜻을 반영하는 것인가를 둘러싸고 학자들의 입장이 나뉘어지고 있다. (215.3)
 먼저 제16조의 내용을 검토한 후에 이 침묵 현상에 대한 유추를 검토해보자. (216.1)
제 16조: “두움비르의 직책을 수임한 (그리스도인) 관리에게 제재를 가하여 그 직책을 수행하는 1년간 교회로부터 멀리하도록 하라.”4
(216.2)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두움비르 직책의 어떤 성격 때문에 교회의 징계를 받아야 했는가 하는 것이다. 일찍이 헤펠레(Hefele)는 두움비르의 직책과 관련된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5 그러나 달레(Dale)는 그리스도인이 사람들의 생명과 신체 및 명예에 관련된 심판을 행하거나 구금 및 고문을 행해야 하는 공직을 맡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테르툴리아누스의 주장6을 근거로 하여 두움비르 직책의 우상숭배적 연관성보다는 죄인들에게 징역과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해야 하는 사법적 연관성이 교회의 징계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7 (216.3)
 달레(Dale)는 이같은 분석을 기초로 하여 군복무 문제에 대한 엘비라 종교회의의 침묵은 그리스도인의 군복무를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과 억압에 대한 교회의 분명한 거부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8 (217.1)
 폭력 행위에 대한 교회의 거부와 관련하여 4세기말의 바질(St. Basil)의 기록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보여준 용맹으로 영광을 얻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형제들을 살해한 행위를 자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실로 군사적인 용맹과 장군 및 그 집단을 위해 건립된 승리의 아치들은 단지 살상행위가 엄청났다는 이유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9 그는 여러 교부들이 전쟁행위와 사형집행 행위를 명백한 살인행위로 규정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인정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더러운 손을 가진 병사들에게 3년 동안 성찬식에 참가하지 못하게 할 것을 요구했다.”10 포카스(Phocas) 황제가 전몰 장병들을 순교자로 추대하려했을 때 감독들은 성 바질의 규칙에 근거하여 황제의 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11 (217.2)
 3. 아를 회의의 교회법(Canons of the Synod of Arles, 314 A.D.)과 군복무 개념의 이원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