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2 부 안식일과 거룩 제 4 장  안식일, 날들의 정상이며 인자의 “나 있는 곳”
 여섯째 날: 부자 청년과 거지 나사로의 오늘
 제6일은 제칠일의 하루 앞의 날이다. 제1일이 달려와 그 순례의 절정, 곧 그 거룩을 한 발 앞에 둔 날이다. 성실과 노력과 투지로 살아온 날들의 끝이다. 제6일은 첫째 날이 티끌 모아 태산을 이룬 날이다. 하나에 둘을 더하고 둘에 셋을 더하여 6에 이른 날이다. 성장과 획득의 날이다. 소유와 축적과 증대의 날이다. 부자의 날이다. 날들을 쌓아 세월의 부를 이룩한 어른들의 날이다. 지식과 의의 부를 이룩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날이다. 재물과 돈의 부를 이룩한 부자들의 날이다. 좋은 날이다. 심히 좋은 날이다. (166.1)
 그러나 제6일은 제칠일이 되어야 하는 날이다. 제칠일에 이르러 거룩하게 되어야 할 날이다. 제칠일의 거룩에 이르지 못하면 십 년 공부 나무아무타불이 될 수밖에 없는 날이다. 제칠일에 이르지 못하면 그 동안 어렵게 쌓아 온 그 “좋은” 학식과 재산과 명예와 의와 공덕이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밖에 없는 날이다. 거룩하게 됨으로써 보람이 크고 거룩하게 되지 못함으로써 낭패가 큰 날이다. 위태하고 조심스런 날이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아홉과 같은 수이다. 9는 하나를 채워 십이 되고 이십이 되고 삼십이 되는 수이다. 마디를 형성하기 일보직전의 수이다. 가능과 기대와 보람의 수이다. 따라서 마가 많이 끼는 수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아홉 수를 조심하라 경계했다. 아차 하면 정성 궤도의 진입에 실패하여 우주의 미아로 방황하는 인공위성 같은 신세가 된다. 일백 개의 골짜기와 일백 개의 봉우리에 이르지 못하여, 천상의 골짜기와 천상의 봉우리로 등천하지 못한 어느 산천의 아흔 아홉 골짜기와 어느 산의 아흔 아홉 봉우리처럼 된다. 100일을 채우지 못해 인간으로 환생하지 못한 호랑이 신세가 되고, 100을 못 채워 용으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 신세가 되고 만다. 이처럼 제6일은 우리네 옛사람들의 제9일처럼 기회와 위험이 공존하는 날이다. (166.2)
 그런가 하면 제6일은 이것도 챙기고 저것도 챙기는 사람들의 “이제”이다. 부귀공명에 장수, 다남, 유호덕을 갖추고자 하는 사람들의 오늘이다. 곡간 여섯을 곡식과 명예와 건강과 지식과 권력과 의로움으로 가득 채운 사람들, 그리고 그 쌓아올린 부요함의 끝이 바야흐로 하늘에 닿으려는 사람들의 나날이다. 시날 평야의 60 규빗 신상 같은 위세로 사는 사람들의 나날이다. 탑을 쌓아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시간, 공든 탑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나날이다. 한다면 무엇이든지 하는 사람들의 나날이다. 제칠일이라고 해보았자 하늘 아래의 뫼일 뿐이요, 열 손가락 가운데 한 날일 뿐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날이다. 들어가기 힘든 하늘나라라 한들 다 사람하기 나름이고 열 번 찍어 넘어지지 않는 나무 있으랴 싶은 사람들의 날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 곳, 저 곳 안 가본데 없고, 이 것, 저 것 안 배워 본 것 없고, 이 것, 저 것 안 먹어 본 것 없고, 이 일, 저 일 안 누려본 일 없는데 이제 마지막 한 가지 가보고 누려보아야 할 것이 제칠일이요, 천국이라 하는 사람들의 나날이다. 제칠일과 천국에 대한 탐욕이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옆집 과부의 새끼 양 한 마리에 대한 탐심을 버리지 못하는 부자의 탐욕과 같은 사람들의 나날이 제6일이다. (167.1)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제6일은 바늘구멍 같은 제칠일의 문, 그 거룩한 시간 앞에서 낙타 같은 의와 재산과 권력과 지식과 나이를 등에 지고 근심하는 사람들의 날들이다. 그러니까 제6일은 성공한 사람들이 그 성공으로도, 아니 바벨탑 같은 그 성공 때문에 오히려 제칠일의 문, 곧 완전과 안식과 거룩의 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근심하고 절망하는 날이다. 제6일은 제칠일과 그 거룩에 미달하는 삶의 날들이다. 달아보면 언제나 부족한 창조와 삶, 그것이 제6일의 창조와 삶이다. 그 노력과 그 욕심으로도, 그 노력과 그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의 품에 이르지 못하는 날, 의인과 부자와 어른과 세력가가 좌절하고 절망하고 낙담하는 날이다. (168.1)
 아니 그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6일은 실패와 부족과 한계에 절망하는 모든 6일의 끝이다. 제1일에 시작된 실패와 수모와 부족과 낙담이 6겹의 두께와 깊이로 다가오는 날이 제6일이다. 태산으로 출발한 첫째 날이 티끌로 남아 있는 날이 제6일이다. 날마다 죄인이고 병자이고 거지이던 사람이 또다시 더 죄인이고 더 병자이고 더 거지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오늘이 제6일이다.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을 차례로 잃고 빼앗겨 오다가 이제는 하나 남은 새끼 양마저 보전이 위태로워진 사람들의 오늘이 제6일이다. 희망은 제칠일인 내일뿐이지만 제칠일에 대한 믿음, 그 칠전팔기에의 믿음마저 흔들리는 사람들의 오늘이 제6일이다. 성공하는 사람들과 의롭고 가진 것 많은 사람들에게는 제칠일인 내일이 성공하고, 의로운 여섯 날의 연속이고 높임이고 확대일 테지만, 그 반대로 제칠일이 지겹도록 힘들게 살아온 지난날들과 그 삶이 온전히 끝나고 결별하는 날이어서 차라리 그날을 소망하고 희망하는 사람들의 오늘이 제6일이다. (168.2)
 참으로 제6일은 이렇듯 잘나고 못난 모든 사람들, 욕심스럽고 소심한 모든 사람들, 의롭고 불의한 모든 사람들, 부하고 가난한 모든 사람들의 오늘이다. 이 모든 사람들의 투지와 탐욕과 한계와 좌절과 낙담을 상징하는 날이다. 6일과 제6일은 거룩한 안식에 이르지 못하는 수고스러운 삶의 날이다. 인간을 대표하고 인간의 삶을 상징하는 수가 6이다. 완전에 이르지 못하는 수, 안식에 이르지 못하고 거룩에 이르지 못한 수이다. 아무리 애써도 다 이루지 못하고 끝에 도달하지 못하고 끝내주지 못하는 사람들의 수이다. 유한한 수, 달아보니 부족한 미달의 수이다. 아무리 마셔도 계속 목마르고, 아무리 먹어도 계속 배고픈 수이다. 아무리 뺐고 차지해도 성에 차지 않는 소유와 탐욕의 수이다. 안식이 없는 수고의 수이다. (168.3)
 창조의 6일 동안에도 하늘과 땅 사이에 사물들이 있었을 뿐 안식이 없었다. 사람이 있었을 뿐 인격이 없었고 인간성이 없었다. 소유가 있었을 뿐 존재가 없었다. 이것이 6일의 세계였다. 지나온 역사의 세계에도 계속 6으로 이어져 온 세계였다. 끝도 없이 666으로 이어졌다. 사물과 소유와 탐욕과 욕됨의 666으로, 강탈과 투쟁과 짓밟힘의 666으로 이어졌다. 비인격과 비인권과 비인간성의 666으로 이어졌다. 부족과 미달의 666으로 쉼 없음과 숨 없음의 666으로 이어졌다. 그리고는 황폐와 더 큰 황폐의 666으로 육체의 육육육으로 이어졌다. 무한의 수, 완전의 수, 감사와 안식과 거룩의 날인 제칠일에 이르지 못하면 자연과 인간 안에 있는 그리고 인간 사회 안에 있는 황폐와 어둠의 무저갱은 계속 666으로 6666으로, 다시 66666으로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고 더 어두워지고 더 황량해질 것이다. (169.1)
 하나님의 사랑의 품인 거룩한 제칠일의 성, 저 안식의 성 그 밖에 마귀가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울부짖는 그 어둠에 버려져 슬피 울며 이를 갈아온 666의 황폐된 삶이 거룩과 안식과 존재의 제칠일로 구원받을 길은 어디에 있는가. (169.2)
 제칠일: 날들의 정상, 곧 인자의 “나 있는 곳”
 제칠일은 제1일의 정상이다. 제칠일은 제1일이 2, 3, 4, 5, 6일을 거처 제칠일의 높이로 올라가고 제칠일의 깊이로 내려가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숨길로 거룩함을 입는 시점이다. 창조의 일주일간은 창조의 질이 상승적으로 전진하여 절정에 이르는 기간이다. “좋은” 출발이 “심히 좋은” 제6일의 과정을 거처 “거룩한” 제칠일의 높이로 오르고 있다. 사람은 창조의 행진이 그 정점에 거의 도달한 제6일에 창조되었다. 제6단계에서 이루어진 창조의 위업이다. 지난 5일 동안 인간의 모습은 가능성으로써만 존재했다가 제6일에 비로소 그 혈육의 모습을 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습으로써 인간의 창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거룩한 인간성의 완성은 제6일에 끝나지 않았다. 미완성의 존재로서 완성되어 가는 도상의 존재였다.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어 제칠일에 이르러 인간은 거룩한 인간성의 차원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제칠일의 높이는 참다운 인간성의 높이였다. “온전한” 인간의 높이였다. 제6일의 사람은 이 인간성의 높이, “온전한 인간의 높이,” 곧 제칠일의 높이에 이르지 못하였다. 제칠일의 자리, 온전하고 거룩한 인간성의 제칠일에 생명이 있었다. 그러면 제6일의 사람은 “무엇을 하여야” 생명의 제칠일에 이를 수 있을까? (170.1)
 필자는 지금 예수님과 부자 청년의 대화(막 10:17-26; 마 19:16-21)를 생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때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하니”(막 10:17). 예수께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마 19:17)고 대답하셨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막 10:20) 하고 다시 여쭈자,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마 19:21)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 10:21)고 하셨다. (170.2)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칠일의 길은 부자 청년이 물었던 이 영생의 길이다. 부자 청년은 제칠일의 생명에 이르는 길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 여섯째 날에 이르는 창조와 삶은 부자청년의 살아온 세월처럼 “내가 어려서부터 이 모든 율법을 다 지켜 온” 삶이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나이까” 싶은 성실과 노력과 축적의 삶이고 역사이다. “좋고” “심히 좋은” 경력이다. 그러나 제칠일의 “온전하고 거룩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창조이고 삶이다. “네가 온전하고자” 하고 거룩한 제칠일에 이르고자 할진대 “오히려 부족한 것이 한 가지 있는” 그러한 창조와 삶이 제6일의 창조이고 삶이다. (171.1)
 그러나 놀랍게도 이 “부족한 한 가지”는 1에 2를 보태고 다시 3을 더했듯이 보태고 쌓고 추가할 무엇이 아니다. 거룩한 제칠일의 높이는 더 추가해서 닿는 높이가 아니다. 창조가 정점에 도달하여 완성되고 인간됨이 거룩한 정점에 도달하여 완성되는 단계는 오히려 그 동안 어렵게 쌓고 축적하고 “지켜 왔던” 것을 내놓고 허물고 버리고 내줌으로써 그리고 “인자를 좇음”으로써 가능한 높이였다. 모든 것을 헐어버리고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품에 안김으로써 도달하는 삶의 지평이다. 거기가 제칠일이고 거기가 거룩이다. 거기가 온전함이다. 이 변화가 제6일에서 제칠일로 올라서는 변화이요, 사람이 육체에서 마음으로 올라가는 성화이다. (171.2)
 제칠일의 “온전하고” “거룩한” 창조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인자를 “좇는”것이다. “오히려 부족한 한가지는” 인자에게 속하는 삶이다. 인자를 거룩히 구별하고, 인자를 위해 자기를 온전히 거룩히 구별하는 삶이다. 그렇게 하려면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야” 한다. “네게 있는 것”이 다섯 달란트이던 두 달란트이던 혹은 한 달란트이던 “다 팔아야 한다”. 보화가 감춰진 밭을 발견했으면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야 한다”(마 13:44). 천국은 마치 이와 같은 것이다. (171.3)
 실로 천국은 팔고 사는 것이다. 육체를 팔고 영혼을 사는 것이다. 거짓을 팔고 진리를 사는 것이다. 이생을 팔고 천국을 사는 것이다. “네게 있는 모든 것을, 네게 있는 ”좋고“ ”심히 좋은“ 모든 것을 다 팔고” 하나님의 은밀한 품, 그 거룩한 사랑의 숨길을 사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사는 것이다. 제칠일이 하늘이 감춰진 밭이라고 판단되면 돌아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고” 그 제칠일을 사야 한다. 그러나 불쌍한 가룟 유다는 제칠일이 주인인 사람의 아들을 팔고 은 삼십을 사고 수치와 멸망을 샀다. (172.1)
 우리가 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어려운 시절, 그 혼돈스럽고 고생스럽던 삶의 세파를 헤쳐야 했을 때, 오직 그 세파의 “수면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 한 분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가라사대”로 찢어지는 어둠과 어둠 사이의 길로 우리의 생존의 발을 내딛기 시작할 때 우리에게는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하늘과 땅을 보자는 것도 아니었고, 그 사이의 각종나무와 새들과 물고기와 짐승들을 다스리자 함도 아니었다. 인자의 “나 있는 곳”(요 12:26), 사람의 아들이 “주인”으로 사는 “날”에 생령으로 태어나고 그리고 성령의 사람으로, 마음의 주체로 올라서고 다시 태어나자는 목적이었다. 정녕 그렇다면 6일의 삶을 다 팔고 생명의 밭, 제칠일의 밭, 사람의 아들의 밭을 사야 한다. (172.2)
 6일은 사물들의 날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새와 물고기와 짐승들의 날들이다. 소유의 날들이다. 300 마리 소와 100 마리의 나귀와 일천 석, 일만 석의 논밭을 이야기하는 날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만들어지는 날이다. 부자는 도둑을 걱정하고, 가난한 자는 무엇을 먹을까 근심하는 날이다. 사람들이 부자와 가난한 자로, 주인과 종으로, 어른과 아이로, 의인과 죄인으로 분열되는 날들이고, 사람들이 절대로 하나되지 못하는 날들이다. 처처에 싸움과 싸움 소문이 난무하는 날들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처처의 재앙과 재난의 소문과 더불어 666의 왕, 곧 “세상 임금이 오는 날”(요 14:30) 이다. 이 소식을 알려주신 이는 평화의 왕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세상 임금”이 급박히 들이닥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너희와 많은 말을 하지 아니하겠다”고 하신다(요 14:30). 어서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요 14:31)고 하신다. 사물과 소유와 계급과 분열과 강탈과 투쟁과 재난과 염려의 날, 제6일의 여기에서 어서 “일어나서 떠나자”고 하신다. (172.3)
 제칠일은 존재의 날이다. 인간됨의 날이다. 사람의 아들이 “나 있는 곳”이다. 사람의 아들이 주인으로 사는 날이다. 인자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을”(요 12:26) 곳이다. 그리스도가 예비한 처소이요 그리스도가 사람의 사람다운 생존을 위하여 예비한 “이 때”이다(요 12:27). 이 날은 소유의 날이 아니라 존재의 날이다. 너 따로, 나 따로의 날이 아니라,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그 두 사람이 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날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는”(요 17:21) 거룩한 날이다. 율법의 날이 아니라 사람의 날이다. 죄와 더불어 사람을 미워하는 날이 아니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아끼는 날이다. 죄와 더불어 사람을 돌로 치고 불태우는 날이 아니라 죄를 태우고 돌로 칠뿐 사람을 태우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거룩하게 구원하는 날이다. (173.1)
 인간과 인류가 6일의 그 긴 생존과 역사를 순례하여 여기에 이른 목적이 “이 때,” 곧 제칠일의 날을 맞이하자는 것이요, 거룩한 제칠일의 삶을 살자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신 사람의 아들이 우리에게 호소하신다: 소유를 모두 팔고 소유와 더불어 계급과 분쟁과 염려를 모두 팔아 “일어나서” 여기를 “떠나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육신의 사람들아, 사람의 아들의 “나 있는 곳”으로 “나를 따르라.”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함께 있게 하리라.” “거기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거룩하게 하리라.” “창조와 삶”의 정상, 사람의 아들이 사물이나 소유로 있는 곳이 아니라 거룩한 참 존재로 있는 “나 있는 곳,” 사람이 모두 “하나가 되어” 한 마음과 한 몸으로 사는 제칠일 거룩한 안식의 “이 때”로 올라가자. (17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