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속의 예수 그리스도 제 1 부 창세기 속의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18장 그분은 하나님 앞에 계신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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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2.1)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셨고(창 18:1-15)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 중보했다(창 18:16-33). (132.2)
 나그네로 나타나신 주님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창세기 18:1-4).
(132.3)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여호와 하나님 일행을 대접한 것처럼 하나님의 종들을 대접함으로 예수님을 대접하게 된다(히 13:2; 마 10:40-42; 요 13:20; 갈 4:14). 주님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대접하는 것은 주님을 대접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 막 9:37; 눅 9:48). 예수님은 민족과 종교와 사상을 초월해서 헐벗은 자와 갇힌 자를 위한 인류애적 봉사를 주님께 대한 봉사로 취급하시고 마지막 심판의 때에 영생으로 갚아 주신다(마 25:31-4). (132.4)
 이삭 예수의 표상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세기 18:10, 14).
(133.1)
 정한 때에 탄생한 후손. 아브라함의 씨가 탄생할 때가 임박했다. 내년 이 시기(창 17:21), 내년 이맘때(창 18:10), 기한이 이를 때(창 18:14)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때(לַמּוֹעֵד 람모에드)에 아들 이삭을 얻었다(창 21:2). 정해 놓은 때로 번역된 ‘람모에드’(לַמּוֹעֵד)는 정한 때(단 8:19), 작정된 기한(단 11:27, 29), 정한 때(합 2:3)로 번역이 된다. ‘모에드’(מוֹעֵד)는 창세기에 네 번 등장하는데 그 중 셋이 이삭의 출생과 관련되었고(창 17:21; 18:14; 21:2), 한 번은 하나님께서 궁창에 두신 광명들이 구별해 내는 계절에 사용되었다(창 1:14). 구속사가 해 달 별이 이뤄내는 시간 속에서 성취됨을 시사한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탄생 때를 정해 놓으신 것처럼 메시아는 시간 속에서 정해진 때에 이 땅에 오실 것이었다(갈 4:4). (133.2)
 기적으로 탄생한 후손. 평생 불임이었던 사라는 폐경까지 되었다.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였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사라와 마리아는 아들을 낳았다. ‘신약과 창세기는 모두 아들의 탄생이 신적 행동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1 (133.3)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라,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 아들 탄생과 하나님의 방문이 함께 묶여져 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 18:10, 14). 하나님의 오심과 관련해서 ‘슈브’(שׁוֹב 돌아오다) 동사가 세 번 사용되었다.2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존재를 걸고 확고하게 보증하셨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의 씨 사건은 하나님의 최우선적 관심이며 하나님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일이다. 아브라함의 씨를 강조하려고 앞 장에서 사용한 이삭이라는 이름 대신에(창 17:19, 21) 아들(בֵּן 벤)이라고 불렀다. 이 아들이 궁극적으로 표상하는 아브라함의 씨가 이 땅에 오셨음을 선포하면서 신약은 시작한다(마 1:1). (133.4)
 약속된 아들이 아브라함 가정에 탄생했을 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라’고 약속했던 하나님의 방문 기록은 없다(창 21:2; 창 18:10). 이삭의 탄생 속에서 하나님이 오신 것을 인식해야 한다. 탄생한 이삭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탄생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마 1:18, 23).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134.1)
 아브라함,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창세기 18:22-23).
(134.2)
 대제사장적 중보기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소돔 사람들을 위해서 중보한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소돔성에 있는 롯을 기억하고 중보했다.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는 주님은 최후의 만찬 때에 대제사장적 중보기도를 하셨다(요 17). 지금은 하늘 성소에서 그분의 보혈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오는 이들을 위해 중보하고 계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2). (134.3)
 모든 시대의 하나님 백성을 위해. 아브라함은 소돔이나 소돔의 악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중보한 것이 아니라 그 도성 안에 사는 의인들을 위해서 중보했다.3 그는 분명히 조카인 롯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시기를 중보기도하셨다(요 17:11, 14-15). 주님의 중보기도 속에 각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 (135.1)
 이 세상에서의 승리를 위해. 아브라함의 중보와 예수님의 중보가 큰 대조를 이룬다. 아브라함은 소돔 성에 있는 의인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분의 공로를 의지해서 주님께 나아오는 모든 통회하는 심령의 사람들을 위해서 중보하신다(요일 2:1). 아브라함은 그 시대만을 위해서 중보했지만, 예수님은 온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중보하신다(요 17:20). 아브라함의 기도는 응답을 받아 롯을 멸망의 도시 소돔에서 빠져나오도록 했다.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을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는 것이었다(요 17:15). 주님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13).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마 1:21). (135.2)
 참고 문헌
 1. Duane A. Garrett, Rethinking Genesis: The Sources and Authorship of the First Book of the Pentateuch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91), 165쪽.

 2. 창 18:10에 슈브(שׁוֹב) 동사의 칼 절대부정형과 칼 미완료형이 함께 사용되어 하나님의 맹세, ‘내가 반드시 돌아오리라’로 되어 있다.

 3. V. Paul Flint, Strangers & Pilgrims: A Study of Genesis (Neptune, NJ: Loizeaux Brothers, 1988), 135쪽.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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