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은 달란트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의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한 사람(그리스도)이 출타하면서 그의 각 종들에게 달란트들을 준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을, 다른 사람에게는 둘을 그리고 마지막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준다. (294.4)
 첫 두 종은 그들의 달란트를 활용하여 그들의 주인의 투자를 증식시키지만, 셋째 종은 그의 것을 안전히 간수할 목적으로 그저 땅 속에 파묻어 놓는다. 고대 세계에서 돈을 묻어 두는 것은 사람이 오로지 안전만을 바란다면 그렇게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물론 사람은 그것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었다. 귀중품들을 묻어놓은 관습은 13:44에서 감추인 보화의 비유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294.5)
 그러나 주인은 그의 투자로부터 안전 그 이상의 것을 갈망한다. 그는 그 달란트들이 사용되어 이익을 얻기를 기대한다. 이것은 “오랜 후에” (앞의 두 비유에 대해 이 점에서 유사성을 주목하라—24:48; 25:5) 그 주인이 돌아와서 그의 부재중에 그의 종들이 신실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회계(會計)할 것을 명할 때 분명해진다(19절). (295.1)
 뒤따르는 심판 장면에서 그는 그의 부재중에 그들의 책임을 신실해 감당해 온 두 종들에게 상급을 주지만, 자신이 책임성 있게 행동할 것이 기대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종을 벌하다(24절). 무책임한 그 종은 아무런 상급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것도 그에게서 취해간 바 된다. 주인의 견해에 의하면, 그는 그 왕국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는 데 실패했다(28-30절). (295.2)
 이 비유의 교훈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강림을 위하여 예비되는 것은 그 사건을 위해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예비된 천국을 위하여 결과들—주님이 보시고 승인하실 수 있는—을 이루어 내는 책임성 있는 행동을 뜻한다. (295.3)
 우리는 또한 이 비유로부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같은 결과를 기대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15절). 그러나 심판에서 평가되는 것은 ‘개인의 능력의 양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들을 최대한도로 사용했는가?’이다. 사람들은 능력에 있어서는 동등하지 않지만, 그들은 노력에 있어서는 동등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각자에게서 그의 투자에 대한 상응하는 이자를 기대하신다. (295.4)
 달란트의 비유에서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은 신실한 백성들은 “기금이 잘 지급되는 연금(年金)이 아니라 더욱더 큰 책임을 상급으로 받는다”(Schweizer, 471)는 것이다. 봉사에 기초된 위대함(20:26-28)은 내세에서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천국의 영원한 원칙이다. 엘렌 화잇은 참된 교육은 “학생으로 하여금 이생에서 기쁨의 봉사를 위해, 그리고 내세에서 더욱 더 광범위한 봉사의 더 높은 기쁨을 위해 준비시킨다”(화잇, 교육, 13)고 기록할 때 그 개념을 잘 파악하였다. (295.5)
 기다리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일
 양과 염소의 비유(전문적으로 말해서, 비유보다는 묵시문학적 심판 장면에 속한다)는 23장에서 시작된 심판 주제를 절정으로 몰아간다. 그것은 또한 예비됨에 관하여 예수께서 전개시키고 계시는 가르침을 완성시킨다. 현재의 순서에서 첫 세 비유들이 경성함에 강조를 두었고(24:42-25:13), 네 번째 비유가 경성하면서 일하는 것을 강조한 데 반하여(25:14-30), 이 비유(25:31-46)는 저 일의 본질적인 성격을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296.1)
 양과 염소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때 발생할 최종적인 분리에 대한 생생한 묘사이다. 그것은 어떤 중간적 입장이나 어떤 두 번째 기회도 허락하지 않는 장면이다. 사람은 양이든지(하나님의 백성을 뜻하는 구약의 표준적 상징) 아니면 염소이든지 둘 중의 하나다. 오른쪽(은총의 상징)에 배정되든지 아니면 왼쪽(싫어함, 냉대의 상징)에 배정되는 지 둘 중의 하나다. 중간 지대는 전혀 없다. 그 심판의 판결에 상소할 길도 없다. 그 장면은 최종적인 결정의 장면이다. 재림 전에 기다리고 경성하는 시간을 활용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은 그 왕국으로부터 영원히 잃어버림을 당한다(46절). (296.2)
 그 비유에서 중대한 요소는 놀람(surprise)의 요소이다. 양과 염소 모두 그들의 특정 경우에 대한 왕의 판결에 놀란다. 두 그룹 모두 그 판결에 이의를 제기한다(37-39, 44절). (296.3)
 놀람의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견지하고 있는 참된 신앙(경건, 약 1:27; 롬 13:8-10 참고)에 대한 그릇된 해석이다. 보통 사람은 참된 종교의 핵심을 바른 교리들을 믿는 것이나 어떤 의식적 그리고 생활 양식상의 의무들을 실행하는 것으로 본다. (296.4)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 입장이 아니다. 구약의 위대한 성구들 중 하나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외적인 행위나 예전적(禮典的)인 순종이 아니라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6-8)이라고 미가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그 구절을 세 번이나 이미 인용하셨고(9:13; 12:7; 23:23), 매번 참된 종교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다루는 구절의 문맥에서 그렇게 하셨다. 그리고 신약의 나머지 부분도 저 동일한 주제를 집어든다. 그처럼 야고보는 이렇게 기록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그리고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10; 갈 5:14 참고)고 기록할 수 있다. (296.5)
 첫째 복음서는 참된 종교와 그 상급의 주제에 관해 침묵을 지키고 있지도 않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그것을 대단히 분명하게 표현하셨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10:42). 다시 예수께서는 두 큰 계명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논하신다. 그는 자신의 원수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에 의거하여 완전을 정의하셨다(5:43-48; 눅 6:36). 그리고 그는 행위 지향적인 부자 젊은 관원에게, 그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그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그의 상급은 하늘에서 얻을 보화가 될 것이다(19:21). (297.1)
 이 가르침들은 25:31-46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여기서, 심판의 표준이 비할 바 없이 명료하게 제시되었다. 백성들은 그들이 무엇을 믿느냐 혹은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혹은 그들의 건강을 잘 관리했느냐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런 것들을 엄격하게 실천하면서도 완전히 잃어버린 바 될 수 있다(23:23). 심판에서 진정한 요점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웃들에게 구체적인 사랑을 보여 왔느냐?’이다. (297.2)
 이 점이 첫째 복음서에 명백한 반면에, 엘렌 화잇은 그것을 멋지게 요약한다. 25:31-46을 주석하면서 그녀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큰 심판의 날의 광경을 묘사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판결이 한 가지 점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민족들이 그리스도 앞에 모일 때에 두 부류로만 나누어질 것이며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도와주었느냐 아니면 도와주지 않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화잇, 시대의 소망, 637)라고 기록하였다. (297.3)
 어떤 사람들은 31-46절이 행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르친다고 주장해왔지만, 이것은 그런 경우가 아니다. 이 구절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느냐 하는 것보다는 마지막 심판의 표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째 복음서 전체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큰 사명 가운데서 죄의 형벌을 지불하셨다는 가정이다(20:28; 1:21). 31-46절에서의 요점은 개인들이 구원을 받았느냐 아니냐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들의 생애는 그들이 그의 선물들을 기꺼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증거를 나타내 보일 것이다. 그와 같이, 요아힘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은 생활로 실천된 신앙을 찾으실 것이다”(Jeremias, 209)라고 기록할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리언 모리스는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행함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은 전체적인 성경의 묘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행하는 일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이든지 아니면 그 은혜를 우리가 배척했다는 증거든지 둘 중의 하나다”(Morris, Matthew, 634)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298.1)
 양과 염소의 이야기에서 배울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은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행위는 단순하며, 계산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가난한 자를 먹이고 병자들을 방문한 것처럼 단순하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런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이 공로를 쌓아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그것이 자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 넘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의미에서 타산적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과 자비는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자기 것을 만들었고, 그것은 그들이 그 덕성을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그들의 일상 생활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298.2)
 또 한편으로는, 염소로 간주되어지는 자들의 전체적인 태도는, 만일 그들이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들이 그들을 첫 번째로 도왔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위신, 상급, 그리고 인정에 눈독을 들여왔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실패했다. 그처럼 그들은 종교 가운데서 참으로 중요한 것을 빠뜨려 왔다. 그들의 종교는 참으로 변장된 형태의 이기심이다. (299.1)
 이런 모든 추종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모른다”(12절)고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1-23). (2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