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여러 면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25:31-46)는 마태복음 24장25장에서 발견되는 연속되는 순서의 절정이다. 어떤 점에서 그것이 절정인가? 그것은 첫 네 비유들에서 시작된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무엇을 덧붙여 주는가? 이 비유에서 심판의 토대는 무엇인가? 그와 같은 심판의 토대는 믿음과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290.6)
 ■ 말씀을 탐구함
 오시는 왕을 위해 깨어 있음
 42절에서 우리는 마태복음 24장에서 앞서 지나갔던 것들의 실제적인 결과에 이른다. 만일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재림의 시간을 모른다면(36절) 그리스도인들은 “깨어있는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느 시에 그들의 주께서 돌아오실지 모르기 때문이다(42절). (291.1)
 그러고 나서 43절에서 예수께서는 그의 추종자들이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고 촉구하는 짧은 비유를 주신다. 그들은 마치 도적이 그들의 집에 침투할 것을 예상하는 집주인처럼 예기(豫期)하고 있어야 하다. 재림을 위한 끊임없는 경성과 예비됨의 상태가 이 짧은 비유의 기별이다. 결국, 우리가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44절).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리라는 예상에 제일 밑바닥을 맴도는 때가 바로 오늘이다. (291.2)
 바클레이는 그들의 훈련을 마무리짓기 위해 이 땅으로 오고 있는 세 견습생 마귀들에 대한 우화를 이야기한다. 각자 인류를 파멸시키기 위한 자신의 계획을 사단에게 제출했다. 첫째는 하나님이 없다고 사람들에 말하겠다고 제안했다. 사단은 그 방법은 많은 사람을 미혹시키지는 못할 것인데,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둘째는 지옥이 없다고 선포하겠다고 말했다. 사단은 이 전략도 물리쳤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는 그 응분의 보응을 받을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나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단은 ‘가거라. 너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파멸시킬 것이다’라고 말했다”(Barclay, 2:350, 351). (291.3)
 가장 위험한 미망(迷妄)은 시간이 무한정 계속될 것이라는 것이다. 내일은 위험한 단어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경성하며 예비하고 있으라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다섯 비유들 중 첫 번째 비유에서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이 태도와 배치된다. (291.4)
 두 번째 비유(45-51절)는 긴급성과 경성이란 주제를 계속 이어가지만, 여러 가지 뉘앙스가 추가된다. 이 비유는 기다리고 경성할 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이 져야 할 의무들과 윤리적 책임들이 있다고 제시한다. 그들의 기다림은 게으름 피우는 가운데서의 기다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이 이야기 가운데서 집주인의 귀환은 종들이 알지 못하는 이유들로 인해 지체되고 있다. (292.1)
 불행하게도 지체는 나쁜 행동을 하도록 이끌 수 있다. 종들은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제멋대로 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들 중 한 종은 그의 저급한 정욕을 표출시킨다. 그는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친절하기 시작하고 해이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 (292.2)
 그러나 그 시점에서, 그 첫 비유의 교훈이 되풀이된다.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종의 주인이 이르”를(50절) 것이다. 그 다음에 예수께서는 한 가지 교훈을 덧붙이신다. 그것은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비유의 결론에서 다시 나타날 교훈이다(25:30, 46). 불충실한 종들은 그들의 하늘 상급을 잃고, 그 대신에 불신실한 유대인들(8:12), 일반적인 사악한 사람들(13:42, 50), 그리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23:13, 15, 23, 25, 27, 29)과 같은 상급을 받을 것이다. 그처럼 신실함과 경성함의 개념은 첫 비유에서보다 더욱 완전한 방식으로 깊이 감명되고 있다. (292.3)
 세 번째 비유(25:1-3)는 첫 두 비유에서 시작된, 경성하면서 기대 속에 기다리는 주제를 담고 있지만, 다시 한번 그 기별의 복잡성이 증가되고 있다. 그 비유의 장면은 팔레스타인의 결혼식으로서, 전형적으로 일 주일이나 그 이상 계속 연장되었던 예식(ceremony)이다. 마을 전체가 거기 관여되며, 서구의 관습과는 달리 새로 결혼한 부부는 신혼 여행을 가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들은 집에 머물고 집을 계속 개방해 놓았다. (292.4)
 열 처녀의 비유가 팔레스타인의 결혼 잔치를 배경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그 이야기의 주요 교훈들을 깨닫기 위해서는 고대의 모든 결혼 관습들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중대한 중요성을 지닌 한 가지 세부 사항은 9:15에서처럼 예수께서 신랑이시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대담한 주장인데, 이는 구약은 빈번히 하나님(메시야가 아니라)을 신랑으로 그리고 이스라엘을 신부로 묘사하기 때문이다(예컨대, 사 54:4, 5; 렘 2:2; 호 1-3 참고). (292.5)
 신랑의 오심 외에, 그 비유의 초점은 열 처녀와 그들의 등잔에 있다(2절). 사실상, 주된 초점은 참으로 처녀들 사이의 구분에 있다.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미련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두 그룹 사이의 차이는 신랑의 오심을 위하여 그들이 행한 준비에 의해 결정된다. 모두 등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 중 절반만이 충분한 기름을 가져왔다. (293.1)
 열 처녀 모두 외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주목하라. 왜냐하면 열 모두 신랑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열 모두 졸려서 잠에 들었다는 점을 주목하라(5절). 그처럼 우리는 이 비유에서 신자들과 비신자들을 다루고 있지 않다. 모두가 신자라고 주장한다. (293.2)
 비유의 한 가지 주요 요점은 신랑이 “더디 [온다]”(5절)는 것이다. 처녀들이 모두 잠든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그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도 지상의 필수적인 일들은 계속 진행된다. 어떤 사람도 계속 고도로 고조된 경계 상태 가운데서 살 수 없다. 그리스도의 지체된 강림의 주제는 이미 24:48에 나타났고, 그것은 25:19에서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 지체는 마태가 예수의 승천 30년 정도 지나서 그의 복음서를 기록했을 당시에 의심할 나위 없이 이미 어떤 신자들에게는 문제가 되어가고 있었다. (293.3)
 우리가 앞에서 주목했듯이, 슬기로운 신자들과 어리석은 신자들 사이의 차이는 그들이 자고 있느냐의 여부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자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맞으러 나오라는 호출을 위하여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의 준비를 미루었고, 그때는 너무 늦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그들의 태만에 대해서 톡톡히 대가를 지불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문은 닫혔”고(25:10), 그들의 은혜의 시기는 종결되었다(또한 계 22:10, 11을 보라). 그리고 그들은 재림 때 발생한 위대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다(11, 12절; 계 19:9 참고). (293.4)
 이 이야기의 교훈은 13절에 주어져 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물론 그 교훈은 이 비유 시리즈의 첫 두 비유의 이론적 근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것은 파루시아(parousia, 재림) 전에 “긴” 지체가 있을 것이며,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준비됨에 의존할 수 없다고 부언한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는 개인으로서 선다. (294.1)
 처녀들의 비유는 신랑의 오심을 위하여 우리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지적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 시리즈에서 마지막 두 비유의 주제가 될 것이다. (294.2)
 기다리고 경계하면서 일함
 열 처녀의 비유는 앞의 세 비유와 공통적으로, 주님의 재림을 위하여 예비하고 있을 것을 계속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에는 답변되지 않은 한 질문에 답변하려고 노력한다. 즉 예비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2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