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전략적으로 정밀성이 부족하게 가르치신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정밀성의 결여야말로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말씀의 의미를 통찰하려고 노력하면서 재림에 관한 그의 가르침들을 계속 다시 생각하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 기법은 13장에서 비유를 사용하신 그의 방법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거기서, 그는 직설적인 언어가 아닌, 비유들로 가르치셨는데, 왜냐하면 이런 가르침은 참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하신 말씀의 궁극적 의미를 알기 위해 씨름하도록 내몰아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넌지시 비추셨다(10-15절). 마태복음 24장도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의 몇몇 진술의 정밀성 결여야말로 독자들로 하여금 그 주제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도록 내몰아 왔던 것이다. 그 결과로 재림에 관한 자각과 그것에 관한 계속적인 관심이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이 기법은 그 장의 요점—깨어 예비하라—을 밝혀내는 데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어 왔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으로 주님의 돌아오실 시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82.3)
 징조의 역할
 마태복음에는 기적적 표적(징조)을 보이라는 요구가 거듭거듭 등장해 왔다. 이전의 장(章)들에서, 그런 요구를 한 사람들은 항상 유대 지도자이었고(12:38, 39; 16:1, 4), 예수께서는 그가 “부활” 전에 물고기 속에 “묻힌 채” 3일을 보낸 요나의 표적 외에는 그들에게 어떤 것도 제공하기를 거부하셨다(12:39; 16;4). (283.1)
 그러나 24장에서, 제자들이 마침내 징조(표적)를 보여 달라고 예수께 요청한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 재림, 그리고 시대의 마지막에 대한 징조를 알기 원한다(3절). 예수께서는 5절부터 시작하여 긴 목록의 징조들을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그의 목록은 거짓 그리스도들, 난리와 난리의 소문들,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일, 기근, 그리고 지진을 포함한다(5-8절). (283.2)
 불행히도 이런 징조들은 우리에게 시대의 끝에 관하여 많은 구체적인 정보를 주지 않는다. 결국, 항상 거짓 메시야들, 지진들, 기근들, 그리고 전쟁들이 있어오지 않았는가. 특별히, 이런 징조들로 인해 깜짝 놀라지 말라는, 자주 간과되고 있는 6절8절의 진술들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징조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 그것들은 자연계의 추세(趨勢)에 속하지만, “끝은 아직 아니니라.”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조들이지만, 진짜 끝을 알려주는 징조들은 아니다. 이런 사상은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말하는 8절에 의해 강화되고 있다. (283.3)
 이 장에서 이런 징조들과 대부분의 다른 징조들은 홍수 후 그의 언약에 대한 기념물로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셨던 무지개 징조와 유사하다. 그처럼, 노아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결코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던 하나님의 신실성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신실히 지키시겠다는 징조였다(창 9:12-16). (284.1)
 전쟁, 기근, 그리고 지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각각은 세상이 병들었음을 상기시켜 주며, 신실하신,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아직 구원의 계획을 마치시지 못하였다는 징조이다. 이들 징조들 하나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1:21) 구원해 내시는 일을 완성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다른 징조들의 대부분—박해, 거짓 선지자들, 배반, 사랑의 식어짐(9-13절), 달과 해가 어두워짐(암흑일들), 그리고 별들의 떨어짐(29절)—에 대해서도 동일한 말을 할 수 있다. 떨어지는 모든 별, 모든 식(蝕), 신뢰에 대한 모든 배반은 아직 그의 일이 마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징조이다. (284.2)
 그러나 그 분문을 조심스럽게 읽어보면, 마태복음 24장에서 적어도 세 가지 징조는 재림과의 관련성이 훨씬 더 분명하다. 그 첫째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주장하는 14절에서 발견된다. 처음 그 말씀을 들은 소수의 갈릴릴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도전처럼 들렸었겠지만, 그리스도 교회는 로마 제국 전체와 그 경계를 넘어서까지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그리고 200년 전에 현대 선교본부들이 설립되면서부터, 기독교는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선교 지향적 종교가 되었다. 그것은 땅의 머나먼 오지들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그러나 그 선교적 과제는 아직도 완성되지 못했다. 다음과 같은 R. H. 마운스의 말이 옳아 보인다: “교회가 그들의 전세계적인 복음화 사명을 완수했을 때에야만 파루시아[재림]가 더 이상 지체되지 않을 것이다”(Mounce, 231). (284.3)
 마지막 때에 대한 두 번째 구체적인 징조는 27절에서 발견된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물론 이 징조는 끝이 가깝다는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그것이 발생하고 있다는 징조이다. (284.4)
 마태복음 24장에서 실제로 징조로 불리는 유일한 징조는 30절31절에서 발견된다.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 나타난다. 다시 한번 이것은 예수의 강림의 임박성에 대한 징조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께서 “그의 천사들”“큰 나팔소리”,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살아 있는 신자들의 승천이 동반되는, “능력과 큰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예수께서 오실 때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또한 살전 4:16, 17; 고전 15:51-54를 보라). (285.1)
 그와 같이 마태복음 24장의 패턴은 진짜 징조들은 임박성의 징조들이 아니라 강림의 징조들이라는 것처럼 보인다. 정밀성이 약간 떨어지는 징조들은 신자들로 하여금 계속 깨어, 기다리고 그리고 일하도록 독려하기 위한 것이다. (285.2)
 예루살렘에 대한 징조
 우리는 마태복음 24장이 상당한 정밀성을 가진 또 다른 징조를 가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즉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징조로서, 그것들에 대한 심판은 재림 때 있을 전세계에 대한 심판과 멸망을 예표하고 있다. (285.3)
 예수께서는 성전의 멸망이 철저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2절) 것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마지막 6개월간의 포위 기간에 있었던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고초와 곤궁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1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죽었을 뿐 아니라 거의 10만 명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주장한다. 기근이 어찌나 심했던지 한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죽여서 구워 먹었다고 보고되었다(Josephus Wars, 6. 3. 4; 마 24:1 참고). 로마의 장군 티투스(Titus)는 마침내 성전 종합 건물을 포함해서 도시 전체를 무너뜨리라고 명령하였고, 그렇게 하여 2절의 그리스도의 예언이 성취되게 만들었다. (285.4)
 그러나 그리스도인 신자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배척했던 그런 유대인들과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마태복음 24장에서 발견하는 그리스도의 권면을 가지고 있었다. 15-22절은 특별히 예루살렘 함락에 대하여 언급한 것처럼 보이며, 언제 그리스도인들이 도피해야 할지에 대한 지시 사항들을 주고 있다. (286.1)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란 일반적인 징조를 통하여 닥쳐오고 있는 예루살렘 멸망이란 위기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은 “선지자 다니엘[단 9:27]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았을 때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해야 한다(15절)는 구체적인 권면을 가지고 있었다. 이 구절에 대한 누가의 기록은 그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해준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눅 21:20-22). (286.2)
 사건들의 추이를 살펴보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경고에 유의하였다. AD 66년 8월 체스티우스(Cestius, 로마의 수리아 지방 총독)는 예루살렘을 공격했다가 승리를 낚아챌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종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철수를 단행했다. 그러고 나서, 67년과 68년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는 갈릴리와 유대를 정복했지만, 네로 황제의 사망으로 인하여 예루살렘 포위를 연기했다. AD 70년 봄과 여름에 이르러서야 예루살렘이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Titus)에 의해 포위되었고 멸망당하였다. AD 66년의 환난과 AD 70년의 멸망 사이의 중간 어디쯤에 “거기[예루살렘]에 있었던 가납될 만한 사람들에게 계시로 말미암아 주어진 신의 말씀을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은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그 도시를 떠나 펠라(Pella)라고 불리는 페래아(Perea)의 한 읍에 정착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펠라로 이주했다”(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3. 5. 3)고 유세비우스(AD 263-339)는 우리에게 말한다. (286.3)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그리스도의 경고와 유세비우스가 기록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 선지자를 좇아 그 성을 도망하여 그 멸망을 피했다. 저 멸망과 그 파멸로부터의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둘 모두 예수의 재림과 세상 끝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징조들이었다. 마태복음 24장의 문맥에서, 그것들은 죄악적 세상의 최종적인 멸망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궁극적 구원에 대한 보증의 역할을 한다. 엘렌 화잇은 그 사상을 이렇게 멋지게 요약한다: “예루살렘의 징벌에 대한 주님의 예언은 아직도 하나 더 성취되어야 한다. 예루살렘의 파멸은 장차 올 것과 비교하면 아주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택함을 받은 도성의 멸망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스린 ... 세상의 운명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의 때와 같이 그때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화잇, 각 시대의 대쟁투, 36, 37). (287.1)
 32-36절에서 예수께서는 재림에 대한 인간의 지식에 관하여 두 가지 큰 진리를 우리에게 주신다. 첫째는 무화과나무의 교훈이다. 무화과나무는 겨울을 나기 위해 그 잎을 다 떨어뜨려 버리는, 제1세기 팔레스타인에 있던 소수의 나무들 가운데 하나이다. 무화과 무에 새 잎사귀들이 돋아나는 것이 봄이 가깝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과 똑같이, 민감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 수 있다(33절). 반면에, 그들은 그가 정확하게 언제 나타나실 지는 결코 알 수 없다(36절). (287.2)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노아의 실례를 드신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자의 강림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37-39절). 그 본문에 대한 대부분의 해석들은 노아의 징조는 세상의 큰 사악함일 것이라고 시사하지만, 그런 해석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2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