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장에는 두 개의 주된 이야기, 즉 예수의 강론과 그의 공중 봉사에 곁들인 간략한 결언(結言, epilogue)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장은 예수의 공중 봉사와 그의 수난과 죽음의 “때” 사이의 전이점(轉移點)의 역할을 하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베다니 잔치에서 마리아가 행한 “예수의 장사를 위한 기름 부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1-8절). 그분에 대한 대제사장들의 음모를 상기시킨 후에(9-11절), 두 번째 이야기는 다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16절), 예루살렘으로 향한 개선의 입성을 간단히 묘사하고 있다(12-19절). 예루살렘 주변 어느 곳에서, 아마도 성전 경내에서, 몇 명의 헬라인들이 예수를 뵙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그에게 그의 죽음의 “때”가 이르렀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20-36절). 요한복음 12:1-36 전체는 예수께서 제공하시는 생명이 생명 시여자(施與者)의 죽음을 통해서만 이르러온다는 역설적인 주제로 가득 차 있다. (250.1)
 요한복음 12장의 나머지 부분은 이 복음서의 첫 번째 주된 부분에 나오는 몇 개의 관건이 되는 운동들의 요약된 결언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행한 표적들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를 믿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 후에(37-43절), 결언은 예수의 기별에 대한 간단한 요약으로써 마무리짓고 있다. 즉 그분은 아버지를 드러내러 오셨고(44-46절), 그분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하신 말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47-50절). (250.2)
 ■ 말씀에 들어감
 요한복음 12장을 적어도 두 번 읽은 후에 다음의 질문들에 대답하라. 가능하면 이 장을 여러 번역으로 읽은 후에 번역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점들을 살펴보라. (251.1)
 1. 마리아와 유다의 행위들은 그것들이 발생한 상황에 따라서 악한 것일 수도 있고 유익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이 이야기 속의 마리아는 칭찬을 받았고 유다는 정죄를 받았는가? 그대의 대답을 설명해 보라. (251.2)
 2. 요한복음 12:12-1615절에 인용된 문맥인 스가랴 9장과 비교해 보라. 12:20의 헬라인의 도착이 스가랴 9:9의 문맥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요한은 예수의 왕권의 본질에 관하여 어떤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예수의 왕권에 대한 자신의 관점과 요한복음 12:9-19의 군중들의 관점 사이의 차이점에 있어서 어떤 점을 강조하고 있는가? 한두 단락으로 설명해 보라. (251.3)
 3. 그대는, 25, 26절에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이 행하도록 요청하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의 일상 생활 속의 어디에서 예수가 발견되어야 하는가?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을 실제적으로 따르는 것인가? (251.4)
 4. 본문의 문맥에 기초해 볼 때, 예수께서 27절에서 번민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헬라인들은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251.5)
 5. 성구 사전의 도움을 받아, 요한복음에서 심판(judgment), 심판자 또는 심판하다(judge)와 연관된 구절들을 모두 찾아보라. 요한에 의하면, 심판에서 하나님, 예수, 성령, 그리고 각 개인이 하는 역할들은 무엇인가? 이 본문들이 12:3112:47, 48에 어떤 빛을 비추어 주는가? 노트에 그대가 내린 결론을 한두 단락으로 써 보라. (252.1)
 ■ 말씀을 탐구함
 문단의 구조
 12:113:1을 비교해 보면, 의도적으로 이 복음서의 시작에 있는 “주일(週日)”(1:29, 35, 43; 2:1)과 대구를 이루는 한 “주일”의 사건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창세기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신 일곱 날들에 대한 대구도 볼 수 있다. 원래의 창조에서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셨고(창 1), 그분의 일이 다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고(창 2:1, 2),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던 것처럼(창 2:2, 3), 예수의 마지막 일도 엿새 동안 계속되었고(12:1), 그분의 일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고(19:30), 안식일에 무덤에서 안식하셨다(31, 42절; 20:1). (252.2)
 문단의 세부 사항
 유월절 엿새 전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 마지막 주일의 토요일 밤일 것이다(12:1—요한에 의하면, 그 해의 유월절은 금요일 해질 때에 시작되었다; 13:1; 19:31, 35-37). 예수께서는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가 사는 곳인 베다니에 다시 도착하셨는데(11:17, 18), 이곳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2마일(3.2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예수께 영예를 돌리기 위한 만찬이 거행되었는데,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 나사로가 그의 옆에 있었다(12:2). 물론 마르다는 마리아가 예수의 발을 씻기는 일에 분주한 동안, 평상시처럼 봉사하고 있었다(2, 3절; 참고 눅 10:38-42). 순수한 나드(nard)는 동방에서 수입된 향료로 매우 비싼 것이어서, 이 사건은 만찬에 참석한 사람들 모르게 진행될 수가 없었다(요 12:3). (252.3)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이야기는 예수께 대한 그녀의 믿음과 사랑을 가야바(11:49, 50)와 유다(12:4-6)의 냉정한 이해 타산(利害打算)과 대조를 이루기에 좋은 위치에 놓여 있다. 유다에 관한 간략한 이야기는 이 복음서에 기록된 역설적인 해학에 관한 대작(大作)들 중의 하나이다. 유다는 장례를 위하여 향유를 부어 소비하는 것이 낭비의 행위라고 주장했으나(5절), 예수를 배반함으로써 그는 그것이 필요하게 만든 책임의 대부분을 져야 할 사람이 되었다. 유다는 가난한 자들을 염려하는 표현을 했으나 돈궤에서 돈을 훔침으로써 그가 돌보아야 할 유일한 가난한 자는 바로 자신이었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5, 6절)! 이 복음서 후반부에서 제자들은 유다가 사실은 예수를 배반하러 나갔지만(13:21, 26, 27, 30), 가난한 자들에게 뭔가를 주기 위하여 다락방을 떠났다고 생각했다(13:29). 하지만 이 복음서의 궁극적인 풍자(irony)는,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게 했을 때 그가 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253.1)
 마리아와 유다를 비교함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사항은 동기에 관한 문제이다.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부은 것은 무아적인 사랑과 희생이 동기가 된 것이다. 반면에 마리아에 대한 유다의 비평은 탐욕과 기만이 동기가 된 것이다. 다시 한번 예수께서는 그가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계심을 드러내셨지만 유다의 동기를 공중 앞에 드러내시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는 사회적 활동(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십자가를 떠나서는 궁극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심으로써 마리아를 옹호하셨다(7, 8절; 참고 23-26절; 마 25:34-46). 하지만 유다는 예수를 영예롭게 하는 것이 재물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배우지는 않고, 잠시 후에 예수의 목숨을 은 30냥과 바꾸고 말았다. (253.2)
 전이점이 되는 두 본문들(요 12:9-11, 17-19)은 나사로라는 주제를 독자들의 마음 속에 간직하게 해준다. 왜 나사로를 살해하려고 했는가(10절)? 그것은 그가 예수에 대한 강력한 증인이었기 때문이다(11, 17, 18절). 여기서 저자는 종교 지도자들이 더 이상 이성적으로 처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에 너무도 헌신적이어서 그들이 부인하고 있는 사실들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기꺼이 살인을 자행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잘못되었고, 스스로도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체면을 살리는 것만이 우선 순위를 차지하였다(42, 43절). (254.1)
 나사로는 어떤 신성모독을 저지르거나 유대의 법을 어기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예수의 신성 주장을 뒷받침하는 예수의 권능의 산 증인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경험은, 예수께서 때가 이르면 그의 추종자들이 회당으로부터 쫓겨나고, 살인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로 여겨질 것이라고 예언하신 요한복음 16:2를 미리 맛본 것이다. 사람들이 한번 예수를 거절하면, 그들이 그분을 반대하는 정도에는 제한이 없다! (254.2)
 요한복음에서 개선의 입성(12:12-16)은 이중 언급으로 둘러싸임으로써 나사로 사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3절의 언어(“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는 헬라어로 전투나 전쟁에서 승리한 왕을 위해 마련한 개선의 행렬을 위한 전문 용어이다. 다른 한편으로 백성들이 사용한 말은 성전을 향해 나아가는 개선의 행렬의 구약적 모델에서 나온 것이다(시 118:26, 27). 예수께서는 큰 무리가 모일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선택하셔서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진 메시야임을 확실하게 선포하는 행동화된 비유(acted parable)로 사용하셨다. (2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