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와 로마 군대 제4장 그리스도교 군복무관의 체제화 B. 유세비우스가 본 그리스도인 병사 콘스탄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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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회를 위해 취했던 여러 조치들과 그 방식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근대의 학자들은 크게 두 개의 극단적인 진영으로 나뉘어지고 있다. 알핼디(A. Alfőldi)에 의해 대표되는 그 한 그룹의 주장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는 신앙심이 돈독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그리스도교회의 안녕을 위해 헌신한 황제이며 그의 그같은 신앙적 확신의 배경에는 밀비아 교 전투가 하나의 전기를 이룩했다고 한다.1 그 반대쪽 그룹은 앙리 그레고아르(Henry Gregoire)에 의해 대표되는데 이들은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제국의 통일을 위해 그리스도교를 이용했다고 한다.2 (206.1)
 그러나 진실은 이 두 주장의 중간 지점에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쉽사리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야심적인 정치가였을 뿐 아니라 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종교인으로서 그는 모든 인간 문제의 성패가 직접적으로 신의 행위에 달려있으며 신의 축복은 인간의 종교적 헌신도에 따라 인간에게 부여된다는 그 시대의 일반화된 종교적 경향을 함께 나누어 갖고 있었던 것이다. (206.2)
 그러나 본 연구의 일차적인 관심은 콘스탄티누스의 친그리스도교 정책의 진실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 그리스도교회에 콘스탄티누스의 호소들과 조치들이 어떻게 비쳐졌는가 하는 것과 그리스도교회의 그 같은 판단이 교회의 로마 군대관 및 그리스도교 군복무관에 어떻게 작용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이를 위한 우리의 가장 손쉽고 유력한 증인은 유세비우스이다. 즉 유세비우스의 콘스탄티누스관을 통하여 당시 그리스도교회의 콘스탄티누스관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207.1)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회를 위해 이룩한 업적과 그 방식에 대해 어떠한 해석을 갖고 있었는가? 앞에서 밀비아 교 전투에 대한 유세비우스의 설명을 논의할 때 언급한 바와 같이 유세비우스는 그 전투와 그것에 후속 되는 모든 전투를 교회를 위한 싸움으로 받아들였다. 막센티우스를 이교 점성술의 신봉자로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3 교량이 붕괴되고 막센티우스가 물에 빠져 죽은 사건을 출애굽시대의 이집트 왕 파라오의 군대가 홍해에 빠져죽은 사건의 일종으로 다루었다.4 콘스탄티누스의 도발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리키니우스에 대해서는 교회를 박해하고 선을 증오하는 간악한 짐승으로 묘사하였다. 반면 콘스탄티누스는 박해받는 교회를 동정하고 라바룸으로 군기를 삼아 휘하 부대를 전투에 대비시키고 있다.5 (207.2)
 유세비우스는 종교 문제가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싸워야 하는 중심 문제가 되고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휘하 병사들에 행한 리키니우스의 연설 내용을 거론하고 있다.6 그는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요약했다.

 (1) 콘스탄티누스는 조상의 종교를 버렸다.

 (2) 그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신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

 (3) 그는 우리와 우리의 전통에 대항하여 전쟁을 도발했다.

 (4) 이 전쟁은 누구의 신이 승리자가 될 것인지를 결판낼 것이다.

 (5) 승리하는 신이 숭배되어야 한다. (208.1)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도 전투를 위해 종교적으로 준비태세를 정비했다. 병영의 울타리 밖에 특별히 설치한 한 막사에서 그는 그가 섬기는 신의 영감과 지도를 간구하였으며 전투가 발생할 때마다 그곳에서 얻은 영감을 가지고 전선으로 뛰어갔다.7 콘스탄티누스의 종교적인 습관에 관한 유세비우스의 이같은 보고가 정확한 것이라면 콘스탄티누스는 분명히 군대의 종교 전통과 충돌하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앞장에서 보았듯이 병영의 울타리 안에서는 오직 공식적인 신들만이 신봉될 수 있었으며 비공식적인 신들은 병영 울타리 밖에서만 숭배되었기 때문이다.8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전통적인 신이 아닌 그리스도 신을 섬기기 위해 본영 밖에 별도의 막사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휘하 군대의 안전을 위해 금식하고 기도했다.9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의 전쟁에서 이긴지 여러 해가 지나서 부터는 그 막사를 사용하는 태도에 있어서 점점 대담해갔다. 막사가 크게 확장되었고 궁정에서 불러온 그리스도교 감독들을 직원으로 배치시켰다.10 A. H. M. 존즈(Jones)는 이 감독들을 최초의 그리스도교 군목이라고 일컬었다.11 (208.2)
 아마도 종교가 군대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유세비우스는 전투에 나타난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사례들을 언급하였던 것 같다. 이를테면 살아있는 병사들의 행진에 앞서 콘스탄티누스의 병사들의 유령들이 리키니우스의 도시들을 공략했다.12 리키니우스가 전투장에 도착해보니 또 하나의 초자연적인 무기인 라바룸이 기다리고 있었다.13 (209.1)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는 라바룸 앞에서 적군이 패주하는 사실을 깨닫고 취약한 전선에 라바룸을 이동시킴으로써 적군을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직접 유세비우스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군대 내에서 가장 신망이 두터운 병사로 기수를 삼았던 로마 군대의 전통적인 방식을 쫓아 50인 부대로 하여금 라바룸을 보호하게 하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주장에 따르면 전투 중에 라바룸의 기수가 겁을 먹고 라바룸을 다른 병사에게 팽개치고 도주했는데 그 때 즉시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그 병사가 살해되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리키니우스는 휘하 병사들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콘스탄티누스의 라바룸을 피하도록 지시했다.14 (209.2)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매우 훌륭한 직업 군인으로 묘사되었다. 그는 결코 항복하는 적군을 살해하지 않았으며 오직 무장한 적군들만을 공격했다.15 적군의 생명을 구해준 병사는 상금을 받았다.16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이같은 행위가 모두 하나님에 대한 그의 헌신에서 결과되었다고 했다. (210.1)
 로마군대 종교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의 개혁은 점진적인 것이었다. 보수적인 병사들에게 전통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가급적 경감시키려는 배려의 결과였다. 그 최초의 변화는 군대에서 일요일을 지키게 한 것이었으며17 현재 남아있는 일요일법 문서가 321년에 나온 것임을 고려할 때18 군대에 이 명령이 시행된 때는 321년 이후가 될 것이다. 그는 일요일에 병영에 남아있는 이교도 병사들을 위해 기도문까지 작성했으나 그 종교적 성격은 매우 모호한 것이었다. (210.2)
“우리는 당신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당신을 우리의 왕으로 공경하고 당신에게 우리의 구원을 간청합니다. 우리의 승리는 당신의 은총에 달렸으며 당신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원수를 억누를 수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과거에 우리에게 베푼 은혜에 대해 당신에게 감사를 올리며 장래에도 축복을 베풀어주실 것을 바라나이다. 우리 모두는 당신의 발아래 엎드려서 우리의 안전과 승리를 비오며 우리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경건한 아들들에게 건강과 장수와 승리를 보전하여 주시기를 비나이다.”19
(210.3)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라바룸의 표지를 방패에 부착하도록 지시했으며 라바룸만이 군단을 선도하는 유일한 군기가 되어야 한다고 명했다.20 그리고 그는 앞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군직을 상실한 병사들에게 군직에 복직하거나 아니면 명예 제대를 하여 불편 없는 퇴직생활을 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부여하였다.21 콘스탄티누스는 또 군과 민의 각 부서에 희생 제사를 금지시키도록 명령했다.22 그는 자신의 신앙 정신을 영속시키기 위하여 아들들에게 정치와 법률의 교육과 함께 종교와 군사의 교육을 겸하여 받도록 조처하였다.23 그리고 아들들에게는 그리스도인들만 수행토록 했으며 고위 관직에도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오를 수 있게 하였다.24 (211.1)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군대가 보인 반응을 중요히 다루고 있다. 그에 의하면 군대 전체가 콘스탄티누스의 서거에 애도를 표했으며 장례의식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25 유세비우스는 여기에서 교회와 군대의 단결을 과시하려한 듯하다. 그러나 로마 군대의 그리스도교화를 기정 사실로서 강조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콘스탄티누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진한 상태로 남아있는 군대의 그리스도교화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군대와 교회의 단결을 희망 사항으로 강조한 것 같다. (211.2)
 참고
 1. Cf. A. Alfȍldi, The Conversion of Constantine and Pagan Rome (Oxford, 1948); H. Berkhof, Kirche und Kaiser (Zurich, 1947), 60ff; K. Aland, “Die religiose Haltun Kaiser Konstantins,” Untersuchungen, 63 (Berlin, 1957), 549-600; Thimothy D. Barns, Constantine and Eusebius (London, 1981), 28-77.

 2. Cf. Henry Gregoire, “La 'Conversion'de Constantin,” Ravue de l 'Université de Bruxelles 36 (1930-31), 231-272; “La Vision de Constantin ‘liguidée’,” Byzantion 14 (1939), 341-351; “L' authenticité et l'historicité de la Vita Constantini attribuée à Eusebe de Césarée,” Bulletin de l 'Academie Royale de Belique, Classe des Lettres . 39 (1953), 462-479; A. Piganiol, “L'état actuel de question constantinienne, 1939-49,” Historia I (1950), 82-96; L'empereur Constantin (Paris, 1932); J. Moreau, “Zum Problem der vita constantini,” Historia 4 (1955), 234-245.

 3. Eusebius, Vita, Ⅱ. 36.

 4. Ibid., Ⅱ. 38, 출애굽기 15장.

 5. Ibid., Ⅱ. 3.

 6. Ibid., Ⅱ. 5.

 7. Ibid., Ⅱ. 12.

 8. Allen S. Hoey, “Official Policy towards Oriental Cults in the Roman Army,” Tansactions and proccedings of the American Philological Association, LXX (1939), 456-481 특히 458.

 9. Eusebius, Vita, Ⅱ. 14.

 10. Ibid., Ⅳ. 56.

 11. A. H. M. Jones, “Military Chaplains in the Roman Army,” Harvard Theological Review, XLVI (1953), 239-240.

 12. Eusebius, Vita, 2. 6.

 13. Ibid., 2. 7, 8, 9.

 14. Ibid., 2. 16.

 15. Ibid., 2. 10.

 16. Ibid., 2. 13.

 17. Ibid., 4. 18, 19, 20.

 18. A. Piganiol, L' Empereur Constantin (Paris, 1932), 128; Cf. Codex Justinianus, I. iii. 12. 3.

 19. Eusebius, Vita, Ⅳ. 20 (trans. C. C. Richardson in English,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ries 2. vol l, 545).

 20. Ibid., 4. 21.

 21. Ibid., 2. 33.

 22. Ibid., 4. 23.

 23. Ibid., 4. 52.

 24. Ibid., 4. 52.

 25. Ibid., 4. 65.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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