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32편 용서의 기쁨
 마음이 정결한 사람은 나사렛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예언에 나타난 구세주이심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빌립과 나다나엘,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다른 이들로 더불어 기독교의 기초가 놓이게 되었다. 교회는 예수께 드리는 시몬 베드로의 고백에 바탕을 둔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 진리를 믿기 위해서 사람의 마음이 우선 하늘 아버지에 의해 열려져야만 한다(마 16:17; 행 16:14). 그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용서하시는 권세를 가지셨음을 믿을 수 있다. (265.1)
 병자를 치유하시고 문둥병자를 정결케 하신 예수님의 행적은 영혼을 죄로부터 깨끗게 하시는 당신의 고귀한 사명에 관한 하나의 본보기였다.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보다 더 값진 선물은 없으며, 또한 예수께서 죄를 뉘우치는 어떤 죄인에게 용서보다 더 절실히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란 없다. (265.2)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 하시리라”
(사 55:7)
(266.1)
 죄의 용서는 언제든지 신실한 죄의 고백으로 즉시 연결 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들에게 한결같은 진리이다. (266.2)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266.3)
 우리는 아마 이렇게 확신할 수 있으리라. “우리를 죄에서 깨끗게 하사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그의 뜻이다”(시대의 소망 1권, 367). 이 사실은 간음 현장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잡혀 왔던 그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극적으로 묘사되 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그 여인을 예수 앞에 들이대며 따지고 들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5).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266.4)
 그들이 함구한 채 슬그머니 가 버린 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자가 “주여 없나이다” 하니,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0, 11)고 하셨다. (267.1)
 이 말씀의 의미는 다음의 묘사에 나타난다. (267.2)
“그녀의 마음은 녹아 버렸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울먹임으로 나타내며, 자신의 죄를 처절한 눈물로 고백하면서 예수님의 발 아래 자신을 던지고 말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는 새로운 생애, 정결함과 평화로운 생애의 시작이 었다. 이 타락한 영혼을 들어 올림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가장 고통스러운 육신의 병을 고치시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다. 그분께서는 영원한 죽음으로 이끄는 영적 질병을 치유하셨다. 이 회개한 여인은 그분의 가장 확고한 신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그분의 용서하시는 자비를 자기 희생의 사랑과 헌신으로 보답하였다”
(시대의 소망 2권, 249).
(267.3)
 그리스도께서는 칭의와 성화 이 둘을 하나의 선물로 제공하신다. 이 이중적 상태가 시편 32편 2절“마음에 간 사가 없”는 자로 암시되었다. 이스라엘의 잠언은 용서 받은 죄인의 이런 생동하는 상태를 강조하였다. (267.4)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 28:13)
(268.1)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죄의 구속하는 능력에서 그를 구하고자 당신께서 오셨다는 명백한 증거로서 절망적인 중풍병 환자를 치유하셨다(막 2:1~12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그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당신의 능력의 부인할 수 없는 증거로서, 당신의 창조 능력으로 죄에 눌린 썩어 가는 이 사람의 육신을 치유하신 것이다. (268.2)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 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막 2:10~12).
(268.3)
 여기서 주는 교훈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먼저 영적 치유를 베풀고자 오셨는데 그것이 바로 육적 회복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죄의 짐은 육신적 병고의 원인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위대한 의사요 영혼의 치유자로 임명하셨다. 그분의 안식은 마음에는 새로운 활력을, 육신에는 힘을 나누어 준다. (268.4)
 새로운 순종
 성경은 결코 용서받은 죄인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롬 6: 1)하는 자유를 누린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반면에, 은혜는 사람이 구주의 영광에 대한 감사의 보답으로 새로운 생애를 살도록 하는 의무를 준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성경적으로 볼 때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시편 32 편은 그 말미에 이 생생한 진리를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269.1)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시 32: 8, 9)
(269.2)
 여기에 불법과 방탕의 정신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있다. 용서받은 죄인은 용서 받은 자답게 행동하도록 요구되었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구세주시요 주님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은 변개되지도 약해지지도 무효화되지도 않았다. 용서 받은 죄인은 오히려 하나님과의 신성한 조화로 변화되고 이끌린다. 이제는 그도 주님의 뜻을, 행복한 생애를 위한 고귀한 가르침과 거룩한 조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시 1, 19, 37, 119편 참조). (269.3)
 어거스틴(Augustine)은 시편 32편 8절을 이렇게 주석하고 있다. “내가 그대에게 자복에 따르는 예지를 주려는데 이는 그대가 마땅히 가야 할 길에서 멀어져 벗어나지 않도록 하려 함이니라. 그대가 그대 자신의 능력을 의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270.1)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권위를 거부하며 자신 스스로의 통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죄를 자복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우리 생애의 지도자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말이나 노새는 억지로—“자갈과 굴레로 단속” —되어 배우게 되는 것을, 용서받은 신자는 자발적으로 배우게 될 것이다. 이사야도 이 점을 강조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 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1:19, 20). (2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