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32편 용서의 기쁨
 논란의 여지 없는 확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는 또한 인간의 소망과 마음의 동기를 재창조하는 기적을 이룬다. (259.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 1, 2)
(259.2)
 “∙∙∙자는 복이 있도다” 라는 말은 “∙∙∙자는 행복하다”는 뜻이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의도하지 않았던 일반적인 죄로부터 의도적인 죄, 그리고 고의적인 반역에 이르기까지 히브리 어의 세 가지 다른 단어를 나열하여 강조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암시해 준다. 그는 완전히 정죄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죄과를 덮어주는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멀리 완벽하게 미치는가를 동시에 보여 주고 있다. 다윗은 구원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세 가지 다른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하시고, 가리우시며, 정죄하지 않는다고 했다(1, 2절). 히브리 어 동사 “사함”은 죄가 하나의 짐처럼 양심으로부터 “옮겨졌다” 또는 “갚아졌다” 라는 뜻이다. “가리움”은 자복된 죄가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시야에서 조차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죄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친히 구속의 보혈로 덮으실 때만 “가리워”지는 것이다. 끝으로 다윗은 아무런 비유법을 사용하지 않고 죄 사함이 무엇을 뜻하는지 가장 직설법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2절). (259.3)
 사도 바울은 시편 32편의 이 시행을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인용하였고, 다윗의 간증을 하나님께서 “일한 것 없”(롬 4:6)는 신자를 “의”로 여겨 주시거나 또는 일컬어 주신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오는 의의 선물을 부어 주심으로 값없는 은혜로 죄 사함을 베풀어 주신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영혼이 당신과 더불어 다시 올바로 관계하도록 해주신다는 것이다. 루터가 시편 32편“바울 시편”이라고 부른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바울은 다윗 왕도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복음의 본질—죄 사함—을 경험했었다고 주장한다. (260.1)
 죄 사함은 하나님과의 합법적 또는 당위적인 관계를 회복시켜 준다. 그러므로 그것은 “칭의” 라고 불리어진다(롬 3:28; 4:4~8). 죄인을 의롭다 여기시는 하나님의 칭의에 근거해서 불안한 양심이 안정을 찾게 된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바울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논쟁조차 불사하고 있다. (260.2)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 니라”(롬 8:33, 34). (261.1)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논란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죄 사함에 대한 확실성을 역설하셨다. (26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33, 34)
(261.3)
 선지자 예레미야는 죄 사함이라는 말을 이스라엘의 죄를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고 있다. 기억하다라는 동사는 히브리 성경에서 과거에 대한 단순한 지적(知的) 회상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약속이나 저주를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의 행 위를 또한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출 2:24; 6:5, 8; 레 26:40~45; 눅 1:54, 72; 23:42; 계 16:19; 18:5절과 비교). (262.1)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실 것임을 약속하실 때, 그분께서는 우리를 대하여 우리의 죄를 더 이상 헤아리지 않으실 것과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 더 이상 책임지지 않도록 해주실 것과 그리고 우리를 더 이상 징계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놀라운 확신을 나타내 주신다. 다윗은 이 확신을 다른 노래에서 예증하였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 이 구절은 다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시거나 징계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뜻과 결정을 생생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262.2)
 하나님께서 마치 기억 상실증을 앓으셨던 것처럼 우리의 과거를 잊어버리게 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의 본성과 뜻을 지적하고 있다. (262.3)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103:8,9)
(263.1)
 선지자 미가는 주님의 독특한 사랑의 뜻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 (263.2)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 7:18, 19)
(263.3)
 성화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에 간사가 없”(2절)다고 하는 다윗의 결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같은 마음의 정결함이 죄 사함을 받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란 말인가, 아니면 죄 사함의 열매를 뜻하는 것인가? 이 점에 있어서 해석상의 의견 차이가 있다. 죄 없음의 상태는 분명히 사죄의 전제 조건이 될 수 없다. 참된 회개만이 조건이 된다. (263.4)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여기에서, 용서하시는 은혜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바로 정결한 마음속에 있는 하나의 새로운 심령을 말한다. 시편 51편에 따르면, 밧세바와의 죄 이후에 다윗은 이렇게 탄원하였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절). 왕은 용서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 즉 정결한 마음을 구하였다. (264.1)
 이 용서하시는 은혜의 경험은 쉐키나(Shekinah)—주님의 가시적(可視的) 임재—의 영광이 거하며 거룩한 중보가 이뤄지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 레위 제사장 아삽은 시편 73편에서,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이후에 맛본 마음의 변화와 영혼의 탈바꿈을 증언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시 73:1)로 결론을 짓는다.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에는 항상 “마음이 정결한” 영적 이스라엘이 존재했었다. 예수 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마 5:8)라고 말씀하실 때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계셨다. (264.2)
 이 마음이, 정결한 하나님의 사랑의 이끄시는 힘에 응답하는 자들, 그리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찾기 시작한 자들의 마음 가운데 이미 이 순간 형성되어진다(시 24편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무화과나무 아래서 하늘 빛을 간구하며 기도드리던 나다나엘을 보셨었다. 빌립이 예수께로 그를 이끌었을 때, 주님께서는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7, 48)고 말씀하셨다. 이에 대하여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49)라고 응답하였다. (26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