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32편 용서의 기쁨
 「다윗의 마스길」 (253.1)
 시편 32편 (253.2)
 전통적으로, 이 서른 두 번째 시편은 일곱 개의 참회 시 중 하나로 분리되어 왔다(시 6, 38, 51, 102, 130, 143편과 더불어서). 오늘날 이 기쁨의 노래는 일반적으로 받은 용서를 되돌아보는 감사의 시로 특징 지어지고 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에 속죄 제물을 가져오는 의식 후에 부르는 노래로 적합하리라(레 4, 5장). (255.1)
 죄의식과 내적 긴장의 고뇌를 체험한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심한 우울로부터 벅찬 행복으로 인도하셨는지를 간증하기 위하여 예배 회중 가운데로 들어간다. 그의 “마스길”(부제 참조)—예술적이며 또한 교훈적으로 생각되는—은 다른 사람들도 또한 즐거움으로 이끌어 주고 있다. (255.2)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시 32:11)
(255.3)
 우리의 가장 큰 문제점
 죄인이 느끼는 커다란 공포 가운데 하나는 죄가 밝히 드러나 징벌을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다윗 왕의 문제는 사실 그가 유죄인가 아닌가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의로 인정하는가 아니하는 가였다. (255.4)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시 32:3)
(256.1)
 그는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했었다. 유죄 인정 거부는 자기 의를 위한 전형적인 인간의 충동을 나타내 준다. 어쩌면 다윗은 내적 좌절 때문만 아니라 어떤 병 또는 외적 위협 때문에 의기 소침해 있었으리라. 그는 하나님께서 “홍수의 범람”(6절)으로부터 자신의 “은신처”가 되셨다고 노래하고 있다. (256.2)
 시편 기자가 이 시에서 그의 육신적 질병과 치유를 자신의 참된 기쁨으로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 그리고 무거운 죄의 짐을 덜어 주심에 역점을 둔 것은 놀라운 일이다. (256.3)
 모두를 위한 교훈
 행복이란 하나님과 완전한 일치됨을 의미한다. 다윗의 경험이 보여 주는 이 교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졌다(6절). 이 시는 감사와 교훈의 동기를 한데 결합시키고 있다. (256.4)
 시편 32편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죄에 대한 자백의 필요성을 이처럼 강조하는 시는 없다. 기별은 분명하다. 하나님께 자복하지 않고서는 죄 사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실제적으로 적용한 것이다(레 5:5과 비교). (256.5)
 이것은 우리의 자복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주어지거나 얻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 리에게 있어서 최상의 은혜, 거저 주시는 은총이다. 우리의 죄악감과 회개는 모두 우리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이다. 다윗은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257.1)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시 32:4)
(257.2)
 바이저(Artur Weiser)는 이 시를 “자신의 하나님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어떤 사람이 경험하는 심적 갈등과 양심의 가책에 대한 시인의 가장 힘있는 간증의 하나”라고 지적한다. (The Psalms, p. 282). (257.3)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손”시편 6편 1~3절에서 보여 주듯 하나님의 분노나 진노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하나님의 분노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야기시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 보여진다. 죄의 짐은 사람의 전체 균형과 관계가 있다. 키드너(Kidner)는 많은 사람이 약해지고 병들었던 고린도 교회에서는 자복하지 않은 죄가 불안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제언한다. 주석가들은 대개 시편 32 편사무엘하 11장에 기록된 밧세바와 관계된 다윗의 죄에 연결시키고 있다. 그의 간음 행위와 사전에 계획된 살인이 그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변화시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쾌를 무릅쓰고 다윗에 대하여 즉각적인 저주를 하지 않으셨다. 엘렌 G. 화잇은 “타락 후 일 년 동안 다윗은 표면상으로는 안전히 거한 것처럼 보였고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시는 아무 외적 증거가 없었다”(부조와 선지자 하권, 453)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양심은 하나님과 더불어 더 이상 화평하지 못했다. 인간의 양심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감은 죄를 신실하게 회개하며 자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다. 오직 이것만이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257.4)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시 32:5)
(258.1)
 죄의 용서는 회개하는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행위이다. “주께서 사하셨나이다∙∙∙.” 다윗의 자복은 개인의 하나님, 즉 “주”께 드려졌다. (258.2)
 여기서 우리는 방종한 죄의 고백을 하나님 자신께 해야 하는 것이지 여타의 하나님 대용물, 즉 땅의 제사장, 하늘의 성도, 또는 천사에게 하는 것이 아님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신다는 당신의 약속을 신뢰하는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친히 우리를 용서해 주시며, 우리 마음에 당신의 죄 사하심을 확신시켜 주신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안위가 된다. 하나님의 용서만이 절대적이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유효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 속하시는 어린 양의 보혈을 신뢰하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양심에 완전한 확신을 가져다 준다. (25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