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I 부 왕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 (16:21-28:20) 10. 갈등 관계에 있는 왕국들: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감 (21-23)
 예수의 첫 질문(메시야가 누구의 자손인가?)에 대한 답변은 명백히 다윗이다. 유대인의 지도자들도 그렇게 대답한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동의하시지만, 이 답변은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논하신다. 시편 110편(신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약의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다윗이 메시야를 “주”로 부른다고 지적하시고 나서 그의 두 번째 질문을 던지신다. “어떻게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주(主)라로 부를 수 있는가?”라고 그는 물으신다. 그 대답은 전통적인 유대인의 지혜에 배치되게도 아들이 아버지보다 크다는 것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271.4)
 이 사실은 정복하는 장군으로서의 다윗의 이미지가 고취시킨 바,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진 메시야의 역할을 초월할 권리를 메시야에게 준다고 예수께서는 시사하신다. 필슨은 “적어도 예수께서는 다윗의 정치적 및 군사적 방법이 아닌 다른 길로 그 왕국을 설립할 메시야의 자유를 선포하신다”고 주장한다. “그 메시야는 군사적 정복자와 지상의 왕이기보다는 고난당하시는 종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Filson, 240). (272.1)
 이 일련의 질문들은 유대인의 지도자들의 입을 봉해 놓았다. 그들은 예수의 논리의 덫에 붙잡혀 버렸다. 배우지 못한 저 갈릴리 사람이 되레 그들을 패배시켰다. 그리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46절). (272.2)
 예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대결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벌이신 예수의 언쟁의 절정은 마태복음 23장에서 발생한다. 첫 복음서에서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 그는 그들을 깨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오셨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제 부드러운 말과 간접적 전략을 사용할 때는 지나갔다. 예수께서는 이제 사랑 가운데서 정면 공격을 퍼부으신다. 그의 때는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72.3)
 마태복음 23장은 한 가지 통일된 주제를 따라가고 있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1-12절은 제삼자에게 주어지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견책을 받은 다섯 가지 특성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특성들을 제시하시기 전에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맡은 직무의 중요성을 부각시키신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2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백성들에게 가르칠 높은 특권과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결점은 저 신성하고 중한 책임에 비추어 살펴져야 한다. 그들의 잘못들은 그들의 직임 때문에 더 한층 심각하다. (272.4)
 이 장에 기술된 부정적인 특성들을 살펴보기 전에 모든 바리새인들이 여기 기술된 그런 사람들처럼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바리새인들 자신들은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책임감이 결여된 그들의 동료들에 대하여 몇몇 동일한 정죄를 했다. (273.1)
 우리가 인식해야 할 또 다른 사항은 바리새인들의 특성들이 그리스도인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에 의해 자주 모방되고 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유대 교회의 역사적인 파당이었지만, 그들의 정신은 인간 본성에 뿌리박고 있다. 그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 23장의 비평을 예수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들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뿐 아니라 그들 자신들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다. (273.2)
 1-12절에 주어진 바리새인들의

 첫 번째 특성은 자신들이 전파하는 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3절).

 둘째,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이 규정하는 것들을 그들 자신의 생활에서는 실천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42절).

 셋째, 그들은 그들의 종교적 행동들의 과시적 가치를 사랑한다(5절).

 넷째, 그들은 존칭적인 직함들을 매우 좋아할 뿐더러 존경을 받는 일도 매우 좋아한다(6-10절). 그리고

 다섯째, 그들은 목회(ministry)가 그들을 행정적 고위직으로의 부름이 아니라 희생적 봉사의 직임으로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함으로써 그것[목회]을 오해하고 있다(11, 12절). (273.3)
 마태복음 23장의 두 번째 부분은 13-32절까지이며, 2인칭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 부분에 있는 정죄들은 일곱 가지 “화”들의 형태로 열거되어 있다. 이 부분의 또 다른 특성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다섯 번 “소경”으로, 그리고 여섯 번 “위선자들”(play actors, 배우들)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우리가 고대 유대인들에 관하여 너무 비평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잘못들은 “교회 놀음”(play church)을 좋아하는 자—성직자와 평신도 모두—들 가운데서, 그 무리들 특유의 특성들이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교회 놀이를 하는 것과 예수의 신앙을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273.4)
 1-12절의 다섯 가지 특성들처럼 일곱 화(禍)들은 논문 초록(抄錄)들처럼 읽혀지기에는 너무도 익히 아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보편적인 인간의 특성들에 대해 말한다. 그 첫째는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이 들어가는 것도 막는 것이다(13절). 이런 막음은 위선자의 역할을 행하여 다른 사람들을 낙담시킴으로써, 성경의 가르침들을 왜곡시킴으로써 혹은 사랑 없는 생활을 삶으로써 발생할 수 있다. 불행히도, 다른 사람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는 데는 많은 기술이나 헌신이 필요치 않다. (274.1)
 두 번째 화는 사람들을 개심시켜 그들의 율법주의적 방식들을 따르게 하려고 진력을 다하는 그런 자아 중심적인 형태의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다. 그 결말은 이런 개심자들이 그 선교사들의 왜곡된 종교 개념을 발견하기 전보다 한층 더 비참해졌다는 것이다(15절). (274.2)
 세 번째 화는 맹세의 그릇된 사용과 이런 행습들을 둘러싸고 있는 율법주의적인 논증들을 겨냥하고 있다(16-22절). 네 번째 화는 왜곡된 가치 개념을 취급하고 있다(23, 24절). 종교의 사소한 문제들에 있어서 그처럼 까다로운 사람들이 율법(22:37-40)과 참된 종교(5:17-48; 25:31-46) 모두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랑과 공의를 실행하는 데 한결같이 실패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장 작은 곤충들을 삼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극단으로 치닫는 반면에 분별없게도 근동의 가장 큰 부정한 짐승을 삼키고 있는 백성들에 비유하신다. (274.3)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화는 네 번째 것을 취하여, 외적인 올바름과 내적인 순결(25-28절)을 구별하는 데 있어서의 실패에 초점을 맞춘다(25-28절). 그 교훈은 외적인 엄격보다는 내적 생활의 순결이 참된 종교의 본질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상, 내적인 것 없는 외적인 것은 치명적인 기만인 것이다. (274.4)
 마지막 화는 많이 조직화된 종교의 “기념물 관리와 간수”를 직접적으로 강타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선지자들을 기념하여 기념물들을 세웠기 때문에 그들의 상속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은 고대의 선지자들을 죽인 그런 정신에 참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시사하신다(29-32절). 결국, 그들은 바로 그때에 그를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지 않는가? 참된 종교에 대한 가장 큰 기념물은 큰 종교적 사건들과 과거의 인물들을 경축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들 자신의 삶 속에 살아있는 선지자들의 정신이다. (274.5)
 마태복음 23장의 마지막 부분은 33-39절이다. 33절에서 예수께서는 3:7의 요한의 말을 취하여 말씀하신다(“독사의 자식들아!”). 이어서 아벨(창 4:8)로부터 성전 뜰에서 돌에 맞아 죽은 사가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기별자들에 대한 인간의 저항에 대한 정죄가 뒤따른다(대하 24:20-22; 슥 1:1). 역대하(사가랴의 죽음을 보도하는)는 히브리 성경의 마지막 책이고 창세기(아벨의 죽음을 보도하는)가 첫 번째 책이기 때문에 “아벨로부터 사가랴까지”는 그들의 신앙 때문에 순교당한 구약의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속기”(速記) 표현이다. 그는 그런 사람들의 순교는 그를 적대하고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동일한 정신에 의해 유발되었다고 말씀하신다. (275.1)
 그러나 모두가 정죄만은 아니다. 마태복음 23:37은 그의 동료 유대인들에 대한 그의 가장 부드러운 말씀들 중 몇 가지가 들어 있다. 그는 위험이 다가오고 있을 때 암탉이 그렇게 하듯이 그들을 보호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 구절로부터 예수의 견책들조차도 사랑 가운데서 주어진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23장“거친 사랑”(tough love), 너무 늦기 전에 그 청중들의 마음속으로 돌파하여 들어가기 위해 필사적인 전술들을 사용하는 사랑의 한 예증으로 보여질 수 있다. (275.2)
 그러나 그 복음서 이야기의 큰 비극들 중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의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로 뚫고 들어가는 데 실패하셨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3장은 유대인의 황폐에 대한 선언과 재림에 대한 암시로 끝난다(38, 39절). 이것들은 24장25장의 주제들을 위한 현관의 역할을 한다. (275.3)
 ■ 말씀을 적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