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I 부 왕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 (16:21-28:20) 10. 갈등 관계에 있는 왕국들: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감 (21-23)
 ■ 말씀을 탐구함
 유대인 지도자들이 반격을 가함
 이전의 세 부분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공격을 가하시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 세 비유에서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들을 불만족스러운 아들들, 악한 농부들, 그리고 정죄된 손님들이라고 정죄하셨다. 22:15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공개 토론회에서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고 그의 평판을 나쁘게 하기 위해 계획된, 세 가지 조심스럽게 꾸민 질문들의 형태로 반격을 가하는 것을 발견한다. (267.1)
 첫 번째 질문은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문제를 다룬다(15-22절). 이 질문은 피점령 상태의 팔레스타인에서는 저의(底意)가 깔린 질문이다. 그것은 예수를 딜레마에 빠뜨린다. 결국, 만일 그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불법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로마 당국자들에게 신속하게 보고되어 신속히 체포될 것이다. 반면에, 만일 그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일이 적법하다고 인정한다면, 그는 그의 백성들에게 대한 그의 영향력을 상실하실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만 왕이시며, 어떤 세상의 왕에게라도 세금을 내는 것은 그 왕권의 적법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와 같이, 예수께서 그의 명예 훼손을 꾀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답변을 하시더라도 그는 어려움에 빠지실 것이다. (267.2)
 이 상황에 교활성과 책략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이 질문에 있어서 공모했다는 사실로부터 또한 분명해 진다. 이 두 단체들은 유대인의 종교적 울타리 내에서 서로 정반대 입장이었고, 일반적으로 서로 처절하게 적대적이었다. 바리새인들은 강력하게 정통 입장을 고수하여 로마 당국자들이 요구하는 세금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던 반면에, 헤롯당은 로마 총독인 헤롯의 당에 속해 있었다. (267.3)
 예수의 답변은 독특하면서도 현명하였다. 그는 그들의 동전 중 하나를 보자고 요청하신다. 그리고 그 동전에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것을 그들이 시인하도록 만드신 후에, 그는 가이사와 하나님께 그들이 받아 마땅한 것을 바쳐야 한다는 금언을 제시하신다(21절). 이 비범한 답변으로 그 공격은 끝장이 난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그들이 그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쳐놓은 피할 수 없는 함정을 벗어나신 것을 신속하게 알아차린다. (267.4)
 아마도 예수의 답변 중 가장 비범한 사항은 가이사의 영역이 하나님의 영역과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 역사에서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국가 간의 구별이 없었었다. 그 둘은 어디서나 나란히 갔다. 왕들은 신적인 존재들의 대표자들로 간주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하시고, 교회와 국가에 관한 새로운 개념들을 위한 길을 여신다. 그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므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그의 재림 전까지는 이중 시민권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특정 국가의 시민이면서 또한 하늘 왕국의 시민들일 것이다. (268.1)
 불행히도, 결코 완전하지 못한 세상에서, 이 두 영역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이따금 충돌하게 된다. 마태복음 22장은 하나님의 왕국이 가이사의 왕국보다 상석을 차지하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혹은 둘이 동등한지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 문제는 초기 교회에 의해 해결되었다. 바울과 베드로가 세상 정부들의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대행자들이기 때문에 마땅히 순종되어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한 반면에(롬 13:1-7; 벧전 2:13, 14), 신약은 또한 지상 통치자의 명령과 지시가 하나님의 명령과 상충될 때,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해야(행 5:29)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268.2)
 예수에 대한 반격의 일환으로 유대인들이 물은 두 번째 질문은 사두개인들-바리새인들의 전통적인 원수들-에게서 온다(23-33절). 이 단체는 로마 통치자들 편에 섰을 뿐 아니라 오경(모세의 다섯 책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성경을 배척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의 신학에서 헬라 철학에 상당한 양보를 해왔었다.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사두개인들은 “영혼은 몸과 함께 죽는다”(Antiquities, 18. 1. 4)고 믿었다. 그와 같이 그들은 불멸성과 죽은 자의 부활 두 가지 모두를 부정했다. (268.3)
 이런 배척들이, 형사취수(兄死取嫂) 결혼 관습(신 25:5, 6)에 따르면 일곱 남편이 있었지만 자녀가 없었던 그 여성에 관하여 25-28절에서 예수께 던진 그들의 질문을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 때에 그녀가 누구의 아내가 될지 예수께서 공개적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한다. 진심어린 것과는 거리가 먼 그들의 이 질문은 부활이란 개념 바로 그 자체를 깔보고 무시하려는 데 분명히 목적을 두고 있다. 좀 더 깊은 차원에서 볼 때, 이 질문은 예수를 공중 앞에서 당황하게 만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269.1)
 그러나 다시 한번 예수께서는 그 논증을 그의 명예를 떨어뜨리려는 자들에게로 돌리신다. 그의 답변은 두 가지 사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첫째, 그는 그들의 질문은 오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제시하신다. 그는 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의 능력에 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신다. 그들은 미래의 삶은 현재의 삶에 의거하여 평가되거나 측정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새 왕국은 다른 방향과 노선들을 따를 것이다. 그 결과, 결혼의 상태는 동일하지 않을 것이며 질투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부활한 백성들은 천사들과 같을 것이다(29, 30절). (269.2)
 예수의 답변 중 두 번째 부분은 사두개인들이 받아들이는 유대인의 성경의 한 부분인 출애굽기 3:6에서 온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성경의 그 부분에 대해서도 무지하다고 주장하신다. 결국,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달리 말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부조들과의 그의 언약을 잊지 않고 계신다. 그들은 죽을 때에 비존재(非存在) 영역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부활은 하나님이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증명한다. 그 위대한 부조들은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아있는 자들이며(눅 20:38), 때의 마지막에 있을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고전 15:51-55; 살전 4:16, 17; 히 11:39, 40). 플로이드 필슨(Floyd Filson)이 주목하듯이,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그의 백성들이 그와 함께 영원히 살 적합한 장소를 마련하실 것이라고 추정하고 계시며, 그렇기에 그는 이 사람들이 일으킴을 받아 저 완전한 영원한 왕국에서 그들이 있을 자리가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확실한 것으로 간주하신다”(Filson, 236, 237). (269.3)
 마태는 무리들이 사두개인들에 대한 예수의 답변에 놀랐다고 우리에게 말한다(33절). 그도 그럴 수 있는 것이,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부활에 관하여 회의적인 제사장 계층과 논전을 벌일 때 그들이 포착하지 못했던 요점을 그들이 만족할 만큼 입증하셨기 때문이다. 누가는 예수의 답변이 끝나자 몇몇 바리새파 서기관들조차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라고 그들은 그께 말했다(눅 20:39). (270.1)
 34절과 함께 이제 그 장면은 마태가 유대인의 지도자들의 반격을 묘사하고 있는 세 번째 질문을 위하여 다시 바리새인에게로 다시 옮겨간다. 이번에는 바리새파의 서기관(율법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나 던진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270.2)
 이전의 두 질문과 마찬가지로 이번 것도 저의가 깔린 것이었고, 거의 어떤 답변을 하더라도 논쟁으로 귀착되도록 되어 있다. 랍비들에게 있어서, 어떤 계명들은 다른 계명들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자명하였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그 어미의 젖에 새끼를 삶지 말라는 계명보다 더 중요하였다(신 14:21). 그들은 계명을 경한 것과 중한 것으로 나누었고, 성경의 613개 계명 중에 어떤 것이 가장 큰 지에 관해서 깊이 사색해 왔다. 그처럼 예수에 대한 이 율법사의 질문은 배경이 있는 질문이다. (270.3)
 대부분의 구경꾼들은 아마도 예수께서 십계명 중 하나를 뽑으시리라고 예상했겠지만, 그는 십계명을 지나쳐 버리시고 유대 문화권에 대단히 잘 알려진 성경절들 중 하나를 뽑으신다. 신명기 6:5셰마(Shema, 유대인의 신앙 고백)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유대인의 예배의 시작 때 사용되었고, 유대인의 아침 기도의 한 부분을 이루었다. 사실상, 예수의 답변은 종교의 핵심을 자신의 전 존재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정의한다(37절). (270.4)
 그 답변만으로도 만족스럽겠지만, 예수께서는 두 번째 위대한 계명을 언급하기로 선택하신다. 이번에는 이웃을 사랑하는 명령이 담긴 레위기 19:8을 인용하신다. 이 두 구절 모두와, 그리고 예수 가르침 전체의 밑바탕을 흐르는 가정은 다른 사람을 사랑함 없이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 문제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 (270.5)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사랑하라는 두 계명이 구약의 바로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논하신다(40절). 두 큰 계명이 십계명의 두 돌판을 요약하는 것 또한 자명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첫 네 계명의 기초를 형성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마지막 여섯 계명을 행할 동기를 부여해 준다(출 20:2-17을 보라. 롬 13:8-10; 갈 5:14; 약 2:8과 비교하라). (271.1)
 두 큰 계명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예수께서 그의 유대인 청중들의 시각을 훨씬 초월하게 이웃이란 단어를 정의하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에게 있어서, 사람의 이웃은 단순히 정통적 규격에 달하는 다른 유대인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그 용어는 자신의 원수들과 하나님께 여전히 반역하고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였다. 이웃은 심지어 이방인들도 포함하였다(5:43-47; 눅 10:29-37). (271.2)
 율법에 관한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너무도 설득력이 있어서 가장 큰 계명에 관하여 예상되었던 토론을 단축시킨다. 예수께서는 그 소강 상태를 이용하여 42, 43, 45절에서 이번에는 그 자신이 질문들을 던지신다. 이 구절에서 그 입론(立論)과 논증, 그리고 변론은 복잡하지만, 그것 또한 대단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2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