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I 부 왕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 (16:21-28:20) 10. 갈등 관계에 있는 왕국들: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감 (21-23)
 우리는 소작인의 비유에서 여러 가지 교훈들을 배울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다. 그는 그저 한 번 보내시지 않고 계속 보내신다. 땅 주인(하나님)은 그의 포도원을 위하여 그가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실 뿐 아니라(사 5:4 참고), 소작인들이 그들을 학대함으로써 그를 거듭거듭 실망시킴에도 불구하고 종(선지자)을 잇달아 보내신다. 그 이야기는 땅주인의 끈덕진 사랑과 돌보심에 관하여 말할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262.4)
 그 비유의 두 번째 교훈은 아주 대단히 명백하다. 즉 소작인들(유대인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의 사악함이다. 그 복음서의 주요 주제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상쇄시키는 주제는 그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배척이다. 그 비유와 역사, 이 둘 모두의 비극은 그의 제의를 물리쳐온 것은 너무도 자주 하나님 자신의 선택된 백성들이었다는 것이다. (262.5)
 이 비유의 세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아들의 파송의 중심성과 최종성이다(히 1:1, 2 참고).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렇게 기록한다: “이 비유는 예수께서 자신이 유일 무이한 [유(類)가 없는] 존재라는 주장, 그보다 앞서 보냄을 받은 자들 중 가장 큰 자들과도 다른 존재라는 주장 중 가장 명확한 주장들의 하나를 담고 있다”(Barclay, 2:291). 그러나 저 명료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전(以前) 특성들과 일치되게도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죽인다. 그 비유는 소작들인들에게 심판을 가져오는 데 있어서 그 행위가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263.1)
 소작인의 비유에서 비롯되는 네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심판은 오는 데는 더딜지 몰라도,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하며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1장의 특정 소작인들에 대한 심판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더불어 올 것이다(24장을 보라). (263.2)
 그 비유의 다섯 번째 교훈은 이스라엘 국가로부터 새 백성에게로 향한 하나님의 왕국의 이전(移轉)이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마태복음에서 그 주제에 관한 그의 가장 명백한 진술을 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나라, 「개정표준역」)이 받으리라”(43절). 저 “나라”는 유대인과 이방인, 둘 모두로 이루어진 그리스도 교회일 것이다. 앞서 주목했듯이, 그 교회는 마태의 신학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263.3)
 그러나 이 시점에서, 교회 또한 조심스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교회에 대한 약속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이스라엘처럼 동일한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열매를 맺”어야(43절) 한다. 즉 그것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역할을 하고서 성공할 수 없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고서 성공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18-22절).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 아들이 되어야 하지, 단순히 말로만 예수께 갈채를 보내는 그런 아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열매 맺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와 그 각각의 신자들 모두의 삶에서 항상 중대한 요소이다. (263.4)
 이 3부작 비유에서 마지막 것은 결혼 잔치의 비유이다(22:1-14). 다른 두 비유에서처럼 이것 또한 아버지나 아들을 배척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끝난다. (264.1)
 결혼 잔치의 비유는 자연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것은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의 역사적인 초청을 다루며, 7절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명백한 언급으로 끝을 맺는다. 이 비유에서 이 부분은 소작인들의 비유의 많은 주제들, 즉 기별자들을 거듭거듭 보내는 일, 유대인들의 사악성과 폭력성, 그리고 그들에 대한 왕의 심판 등을 포함하여 많은 주제들을 되풀이 한다. (264.2)
 그러나 8절에서 이 비유의 장면은 유대인을 넘어 그 잔치에 처음에는 초청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로 나아가면서 바뀌어 간다. 8-10절은 유대인들에게 대한 초기의 몰두와 전념으로부터(3-7절) 더 넓은 세계의 이방인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하는 그 복음의 초청을 예표한다. 9절28:19, 20의 위대한 복음 사명 위임과 매우 비슷한 명령-“그러므로 너희는 가서”-으로 시작한다. “악한 자나 선한 자”(22:10) 모두에게 전파하라는 명령은 그리스도 자신의 전도 봉사의 반영이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버림받은 자들과 실패자들에게 전파하시는 데서 엿보이듯이 은혜의 비차별적 성격을 거듭거듭 강조해 왔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쿰란 공동체는 흠 있는 자들이 그들의 회집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처럼 눈먼 자, 귀머거리, 벙어리, 저는 자 그리고 중풍병자들은 공동체적 축복들에서 제외되었다. 예수의 왕국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은 모든 사람이 결혼식에 초대받았다는 참으로 “복된 소식”이다. (264.3)
 그러나 오로지 협력하는 사람만이 그 혼인 잔치에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혼인 예복을 입으라고 한 그 왕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11, 12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그 잔치에 남아 있기에 부적합하다는 심판을 받는다. 그와 같이 1-7절의 유대인들은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교회의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264.4)
 결혼 예복의 정확한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상당히 많은 논의들이 있어 왔다. 필자가 볼 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 F. D. 브루너가 옳은 듯이 보인다. “마태복음의 문맥 내에서 결혼 예복은 수동적인, 입혀 주신 바 된 (바울의) 의가 아니다. 그것은 활동성이 있는, 도덕적 (마태의) 의이다(5:20).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7:21; 12:50). 그것은 율법을 준수하는 제자도(弟子道)로 말미암는 회개의 증거이다(3:7-10)”(Bruner, 2:776). 이 해석은 구속받은 자들의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해 주는 요한계시록 19:8과 조화된다. (265.1)
 그러나 브루너는 결혼 예복이 음울하고 음산한 율법주의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각별히 우리에게 주의를 준다. “개인적 의를 뜻하는 그 혼인 예복은 그 파티에 초청받는 데 필수적인 것이 아니지만-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가 초청을 받았다-그러나 개인적 의의 옷은 그 파티에 남아 있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13절)”(Bruner, 2:777). (265.2)
 다시 한 번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예수와 믿음 관계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일 것이다. 믿음은 예수가 주(主)라는 단순한 정신적 동의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사는 것이다. (265.3)
 이 비유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는 경고 문구로 끝난다. 교회 일각에서 잃어버림을 당하는 것이 어렵다고 설교하는 것이 보편화되고 인기를 끌고 있지만, 그것은 확실히 마태의 예수의 기별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실상 좁은 문의 비유(7:13, 14), 씨 뿌리는 자의 비유(13:1-23), 그리고 “많은 사람이 떠날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은 그 정반대 인상을 준다. 그것들은 22:14“적은 자들”과 같은 계열에 속한다. (265.4)
 ■ 말씀에 들어감
 22:15-23:39까지 두 번을 읽으라. 그러고 나서 그대의 마태복음 노트에 다음의 문제들을 풀어보라. (266.1)
 1. 그리스도인이 세속적 정부에 대한 책임에 관하여 22:14-22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나열하라. 어떤 사람들이 22:21을 읽고 결론을 내리듯이 하나님과 가이사에 대한 의무들이 동일한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것이 우선하는가?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로마서 13:1-7을 읽고 나서 22:21에 대하여 그대는 무엇을 더 이해하게 되는가? 사도행전 5:17-29은 어떤 이해를 더 보태주는가? (266.2)
 2. 성경의 관주들을 사용하여 22:37-39의 두 큰 계명에 대한 구약의 출처 두 곳을 찾아보라. 성구사전을 사용하여 어떻게 예수께서 그의 청중들을 위하여 이웃이라는 용어를 재정의하고 넓히셨는지 알아 보라. 그대가 발견한 것들을 요약하고 그 용어에 대한 예수의 정의를 이해하는데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가장 중요한 성구들을 언급하라. (266.3)
 3. 마태복음 23장의 개요를 적으라. 예수의 말씀의 의미를 단락별로 요약하라. 23:37-39의 의미를 설명하라. 이 구절과 24장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기질이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께서 23장에서 그처럼 강력하게 나오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그대는 생각하는가? 그런 변화가 첫 복음서에서 그의 봉사의 점진적인 흐름에 어떻게 부합되는가? (26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