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I 부 왕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 (16:21-28:20) 10. 갈등 관계에 있는 왕국들: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감 (21-23)
 그 도전은 지도자들이나 일반 백성들이건 이제 무시하기에는 불가능하게 된다. 평민들은 성전에서 예수께로 몰려들어 그가 버림받은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치실 때 “다윗의 자손”에게 메시야에게 해당되는 찬양의 외침들을 발한다(14, 15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 모든 찬양에 대하여 분노를 나타낸다(15절). 무리들의 열광은 그 도성 내에서도 썩 불쾌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그들 자신의 특별 영역에까지 들어와서 돈벌이가 되는 그들의 성전 내에서의 장사를 극히 나쁜 시각으로 보이게 만든다. (257.4)
 성전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서, 우리는 예수의 원수들에 대한 기술(記述)에서 한 전환점을 발견한다. 마태복음에서 지금까지는 대제사장들이 오로지 3번밖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나머지 부분에서는 32번이나 더 언급될 것이다. 성전을 정결케 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공적 종교 권력 구조에 도전장을 내미셨다. 지금으로부터, 대제사장들은 전에 없이 단호하게 그를 제거하기 위하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더불어 공동 전선을 구축한다. 성전을 정결케 하심으로써 그는 자신이 위험한 원수라는 것을 참으로 나타내 보이셨다. (258.1)
 무화과나무의 행동화된 비유(18-22절)는 12-17절의 성전 이야기에서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겪으신 예수의 경험들에 대한 상징적 속편(續篇)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 사건들 사이의 관계는 그 나무 이야기가 이틀에 걸쳐 일어났고, 성전을 정결케 하신 일은 무화과나무 이야기의 전반과 후반 사이에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는 마가복음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막 11:12-31). (258.2)
 그와 같이 무화과나무의 비유의 의미는 그 두 복음서 중 어느 것도 그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진 않지만 매우 분명해 보인다. 겉보기에는 생명을 약속한 듯했지만, 아무 열매도 산출해 내지 못한 무화과나무에 대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 국가와 그 성전 예배에 대한 좌절된, 이루어지지 못한 약속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나무의 열매 없음은 성전이 황폐하게 되리라는 예수의 선언을 예표하고 있다(23:38; 또한 24:1, 2도 보라). (258.3)
 무화과나무 이야기 후에 일단의 고위 인사들이 성전에 계신 예수께 나아와 그의 권위의 출처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본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인바, 이는 그가 성전 정결과 승리의 입성 두 사건 모두에서 명백하게 권위(심지어 메시야적 권위도)를 가지신 양 행동하셨기 때문이다. (258.4)
 예수의 권위는 마태가 백성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7:28, 29)고 기록했던 산상설교의 끝 부분 이래로 마태복음에서 계속 명백히 드러나 있었다. 백성들이 예수께서 학식 있는 유대인의 서기관들과 다르셨다고 본 것은 확실히 옳았다. 그들은 해석을 하는 데 있어서의 그들의 권위의 토대로 이전의 랍비들의 판결들을 인용한 반면에, 그는 자신 속에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 말씀하셨다. “...하였다 하는 것을 너희는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5:27, 28, 31, 32). (259.1)
 예수께서 학식 있는 랍비 밑에서 공부하지 않았다고 하여 이전의 경우들에서 그의 권위에 이의가 제기되었었지만(13:54-57; 요7:15), 그 당시에는 그가 그리 대단한 위협적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으로의 그의 승리의 입성과 성전을 정결케 하신 그의 행위는 그런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그 결과로, 유대인의 교수(敎授) 신임장들을 발급해 주는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하여 그의 권위가 도전을 받고 있다(21:23). (259.2)
 예수께서는 반격하는 질문을 던지신다. 그는 침례자 요한의 권위의 출처를 되돌아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그의 권위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25절). 이것은 주의를 딴 데로 쏠리게 하는 그런 전술이 아니다. 결국, 예수의 권위는 그를 자신 뒤에 오실 분으로 가리켰던 요한의 그것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3:11). (259.3)
 요한의 봉사를 이미 배척했었기 때문에, 그들이 정직하게 답변한다면 그 답변이 어떠할지는 분명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정직성보다는 외교적 수완을 선택하여(이는 평민들이 듣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의 권위의 출처가 어디로서인지 모른다고 대답한다. (259.4)
 그러자 예수께서는 요한에 대한 그들 자신에 반응을 기초로 하여 그들에게 답변하신다. 만일 그들이 요한의 권위의 출처에 관한 그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이 또한 그의 권위의 출처에 대한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실 하 등의 의무가 없다(27절). 물론 예수 편에서의 이런 빈틈없는 처리 솜씨는 종교 지도자들의 사랑을 받게 하는 데는 별 기여를 하지 못한다. (259.5)
 아버지와 아들을 배척하는 일의 결과
 21장의 중간 부분까지, 예수께서는 도발적이면서도 상징적인 두 가지 (승리의 입성과 성전을 정결케 하는 일) 일을 행하셨다. 이 두 행위는 모두 그의 메시야적 역할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 사이에 점점 틈이 벌어지고 있음을 지적해 준다. 지도자들은 예수를 배척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반면에 후자(後者) 그룹은 거듭 거듭 예수에 대한 열광을 드러낸다. (260.1)
 이런 행동들에 뒤이어, 마태는 예수께서 성전 구내에서 가르치시고 대화하고 계신 모습을 기록한다(23절). 이 대화에서 첫 번째 부분은 23-27절에서 예수의 권위에 관한 문제이다. 이 이야기에 뒤이어 마태복음에는 세 가지 대결적(對決的) 비유들이 이어진다. 각 비유는 그 나름의 교훈이 있고, 그것이 모두 합쳐지면 누적(累積)되고 상승적인 영향을 발휘한다. 세 비유 모두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 겨냥된 것이며, 모두 누가 하나님께 가납될 수 있느냐와 관련되어 있다. 이 세 비유는 다른 복음서들보다 마태복음에서 한결 더 두드러진 주제-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공식적인 이스라엘의 실패와 그에 따른 하나님에 의한 이스라엘의 배척-를 끄집어낸다. 그 주제는 3:7-10에서 침례자 요한에 의해 맨처음 명백히 드러났는데, 거기서 요한은 유대인의 지도자들을 “독사들”이라고 칭했고,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선언하였다. 이 진술과 결부된 것은 하나님께서는 필요하다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일으키실 수 있다고 암시하는 진술이다. (260.2)
 메시야에 대한 공식적인 이스라엘의 배척과 버림받은 자들의 받아들임이란 저 이중(二重) 주제는 8:11, 12, 12:38-42, 13:10-17, 15:1-9, 그리고 16:5-12 등과 같은 본문들에서 반복되었다. 21:28에서 22:14에 실려 있는 세 비유들은 각기 그 주제를 취하여 그것을 강력하게 전개하고 그 자연적 결론에 도달하게 만든다. (260.3)
 첫 번째 비유는 한 아버지(하나님)와 두 아들(21:28-32)의 비유이다. 맏아들(세리들과 창기들 그리고 다른 버림받은 자들을 대표함)은 구두(口頭)로 아버지의 포도원에서 일하기를 거부하였지만 뉘우치고 어쨌든 일하러 간다. 둘째 아들(유대인의 지도자들을 대표함)은 구두로 순종하겠다고 해 놓고서 그의 말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 (261.1)
 탁월한 교수 기법을 사용하여 예수께서는 그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이 그 비유의 교훈에 스스로 도달하도록 참여시키신다. 그는 청중들에게 물으신다. 어떤 아들이 아버지가 원한 일을 했는가? 그 대답은 자명하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첫 복음서 어디에선가 명백하게 납득했었던 답변이기도 하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다(마 7:21). 마태의 복음서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요 그것을 행하는 자이다. 의는 수동적인 받아들임이 아니라 활동적인 순종이다. 믿음(faith)은 행동하는 신념(belief)이다. 신조는 일상 생활에서 드러난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것이 행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기별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가슴에서 자연적으로 흘러나온다고 하는 제시인 것이다. (261.2)
 그처럼 예수의 말씀들은 변화된 생활이기보다는 단순히 받아들인다는 말만을 할 것을 기대하는 감정적 신앙 부흥 운동의 복음과 반대 입장에 선다. 마찬가지로 이 비유는 어떤 교리적 진리를 믿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제시하는 거짓을 단속한다. 그리고 또한 이 두 아들의 비유는 구원을 칭의의 순간에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과 동등시하는 경향이 있는 그런 형태의 그리스도인 구원의 보증의 심장부를 강타한다. 구원의 보증(확신)에 관한 마태의 가르침은 예수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 같은 생활을 사는 것, 이 두 가지 모두에 기초되어 있다. 이런 가르침은 결코 헌신에서 행동을 분리하지 않는다. 또한 마태복음에서 거듭거듭 그리스도인 생활은 미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7:21-23; 16:27; 18:23-35; 22:1-14; 25:14-46). (261.3)
 마태복음에서 순종은 표면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엘렌 화잇이 표현하듯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노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나갈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화잇, 실물교훈, 279). 우리는 주의 포도원에 일하러 갈 뿐 아니라 옳은 정신으로 가야만 한다. 이 사실은 산상설교에서 율법에 관하여 하신 예수의 가르침으로 살펴볼 때 명백하다. 그리고 그것은 22:36-40에서 “가장 큰 계명”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서 더욱더 명확해질 것이다. (262.1)
 두 번째 대결적인 비유는 소작인들의 비유이다(33-44절). 이 비유는 그 결론을 향하여 성큼 거보를 내딛는다. 두 아들들의 비유가 하나님에 대한 유대인의 저항을 수동적인 형태로 묘사한 데 반하여, 이번 것은 그 저항이 능동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너무도 농동적이어서 그것은 선지자들에 대한 반역과 아들을 죽이는 것 둘 모두를 가리킨다. (262.2)
 어떤 유대인 청중도 포도원에 관한 기술에서 하나님의 많은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들을 거의 놓칠 수 없을 것이다. 저 포도원은 이사야 5:1-7에서 아주 유사한 용어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서 그 잘못은 포도나무에 있는 반면에, 여기서는 소작인에게 있다. 두 경우 모두 실패의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2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