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I 부 왕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 (16:21-28:20) 10. 갈등 관계에 있는 왕국들: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감 (21-23)
 예수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처음 통보하신 16:21부터 마태는 절정을 이루는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을 위해 그의 독자들을 준비시켜 왔다. 19:1에서 그는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사 유다로 들어가신다고 제시한다. 그런 다음, 그는 20:17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으로 묘사한다. 21:1-11에서 드디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253.1)
 이 입성 장면에서 우리는 예수에게 발생한 모종의 변화를 감지한다. 더 이상 그는 자신의 신분이 비밀에 부쳐져야만 하는 양 행동하고 계시지 않다. 그와는 반대로, 그가 나귀를 타고 그 성으로 들어가시는 방법 (21:1-11)이나 성전에서 유대인 당국자들과 벌이시는 그의 논쟁(21:12-17)은 공개적일 뿐 아니라 대결도 불사하고 있다. 그 쟁투는 21장의 나머지 부분 전체에 걸쳐 진행되며, 22장 전체에서도 계속되다가, 유대인 지도자들에 대한 예수의 공개적인 정죄로 인해 23장에서 극한으로 치닫는다(23:38). 일이 이쯤 되자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그 “말썽꾼”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한 마지막 노력을 기울일 모든 여건이 갖추어 진다. (253.2)
 마태복음 21-23장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뿐 아니라 투쟁이 돌아설 수 없는 다리를 건너 파열점을 향하여 나아가는 예수와 유대인 지도자들 사이의 고조되어 가는 투쟁을 묘사함으로써 첫째 복음서의 순서적 전개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 이전까지는 예수와 유대인 지도자들 사이에 긴장이 팽팽해져 가고 있었던 데 반해서, 이제는 그들이 도저히 관용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참으로 이 세 장은 이 세상의 왕국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하늘 왕국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다. (253.3)
 ■ 말씀에 들어감
 마태복음 21-23장을 한번을 읽고 주요 주제(들)을 찾아보라. 그러고 나서 21:1-22:14도 다시 읽으라. 그것은 이 세 장 전체의 구도에 어떻게 들어맞는가? 그 다음에는 다음의 질문들과 연습 문제들을 숙고해 보라. (254.1)
 1. 21:1-11의 승리의 입성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의미를 부각시켜 주는 단어나 구절들을 모두 나열하라. 이 목록을 작성하는 데 있어서, 21:8열왕기하 9:13을 비교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대는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예수의 입성과 백성들의 열광적 환호에 관하여 어떻게 느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예수의 성전 정결이 이런 느낌들에 영향을 끼치겠는가? (254.2)
 2. 관주를 사용하여 21:5의 배후에 있는 구약의 성경절들을 찾아보라. 그 성경절들은 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하여 어린 나귀를 선택하셨는지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 주는가? 나귀를 타는 일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가? 그는 어떤 종류의 왕이 되실 것이었는가? 예수께서 나귀가 아니라 말을 타셨더라면 그것은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겠는가? (마지막 질문을 푸는 데 도움을 얻으려면 요한계시록 19:11-16을 비교해 보라.) (254.3)
 3.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의 이야기는 21-23장에 기록된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 어느 곳에 해당되는가? 무화과나무와 성전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취급한 마가의 기록과 비교해 보라. 사건들의 발생 순서에 대한 두 복음서 사이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특별히 성전에서, 그리고 전체적으로 21-23장에서 유대인들과 마주치고 계셨던 문제들을 감안해 보면서, 말라버린 무화과나무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 그대의 견해를 한 문단으로 써보라. (254.4)
 4. 마태복음 21:28-22:14는 세 비유를 담고 있다. 몇 문장으로 각 비유의 중요 교훈을 요약하라. 그 비유들이 가르치는 교훈들은 어떻게 비슷하며 또 어떻게 다른가? 가르침을 주는 부분인 이 세 비유에서 그대가 얻는 종합적 이해를 기술하라. (255.1)
 ■ 말씀을 탐구함
 기존의 왕국에 도전함
 마태복음 21:1-11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을 알게 된다. 그는 홀로 계시지 않다. 그와는 반대로, 그가 나귀를 타고 그 위를 지나가시도록 가지들과 겉옷을 펴면서 그를 극진하게 예우하고 환영하고 있는 많은 “무리들”이 그와 동행하고 있다. 참으로 이것은 예사롭지 않은 경우이다. 그들은 메시야적 의미를 지닌 것이 틀림없는 직함인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치고 있다(9절). 그리고 그들이 그 도성을 들어갈 때, 무리들은 예수를 “나사렛에서 나온 [그] 선지자”(11절)로 보고 있다. “[그] 선지자”는 후일에 오실 것이었던, 모세와 같은 큰 선지자에 대한 또다른 언급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신 18:15, 18). (255.2)
 이 시점에서 두 가지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이 무리들이 다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왜 이다지도 열광적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요인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첫째, 이 때는 유월절 시즌이라서 길마다 유대인 세계 전역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는 사람들로 문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와 같이 예수께서 걸어가고 계신 같은 길로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있었던 수천 명의 갈릴리 지방 순례자들이 있다. 갈릴리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들에 깊은 인상을 받아 온 수많은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255.3)
 둘째, 요한 복음이 지적하듯이(11장; 12:12-19), 죽은 자 가운데서 나사로를 일으키신 이적은 방금 전에 발생했었다. 이 현저한 이적은 예루살렘과 인근 지역들에 광범위한 흥분을 야기시켰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도록 만들었다. 이 일로 인하여, 유대인의 당국자들은 나사로도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다(요 12:1-11). 예수께서 갈릴리의 궁벽한 곳에서 기적들을 행하는 것과 예루살렘의 뒤뜰인 베다니에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256.1)
 기존의 흥분은 예수께서 그 도성에 입성하기 위해 선택하신 그 방법으로 말미암아 부추김을 받아 백열(白熱)의 불꽃이 된다. 마태는 그가 나귀 새끼를 타고 그 읍으로 들어가신다고 우리에게 말한다(2-7절). 그것은 갈릴리에서 여기까지 계속 걸어온 사람이 하는 일 치고는 대단히 흥미로운 처신이다. 확실히 그가 마지막 2마일(약 3.2킬로미터)을 남겨 놓고 노새를 타고 들어가실 아무런 신체적 필요가 없다. 더욱이 예수 지금까지 항상 걸어 다니셨다. 성인(成人) 예수께서 짐승을 타고 가시는 것은 복음서들 가운데서 이곳에서만 발견된다. 그가 하고 계시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256.2)
 그 의도성은 예루살렘의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고 말하는 스가랴 9:9의 예언에 의해 유도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입성 방식을 통하여 매우 명확하게 자신이 메시야란 주장을 하시고 있고, 무리들은 그 점을 놓치지 않는다. 그들의 흥분은 한도가 없다. 유대인의 지도자들 또한 거기에 함축된 의미를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즐거워 해야할 어떤 것이기보다는 일종의 도전이다. (256.3)
 스가랴 9:9에 대한 예수의 의도적인 성취에 관하여 주목해야 할 한 가지 다른 사항이 있다. 그 예언은 메시야이신 왕은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호전적 지도자이기보다는 “겸손한” 왕이시리라는 것이 명시되었다. 말을 타고 입성하는 것은 호전적인 지도자를 의미했을 터이지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장하는 것은 “평강의 왕”(사 9:6)으로서 메시야의 평화로운 도착을 상징하였다. (257.1)
 예수께서는 재림하실 때에는 말을 타고 들어오실 것이다. 그는 그때에는 그가 초림하셨을 때 유대인들이 기대했었던 정복하시는 메시야로 오실 것이다(계 19:11-2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방식이 메시야적 진술이라고 한다면, 성전을 정결케 하신 것은 그가 그리스도라는 진술과 진배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두 가지 행동은 모두 유대인의 지도자들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다. 바클레이가 표현하듯이, “만일 예루살렘으로의 입성이 대담한 도전이었다고 한다면, 여기에는 도전에 덧붙여진 도전이 있다”(Barclay, 2:268). (257.2)
 성전을 정결케 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원수의 진영의 바로 심장부로 싸움을 옮겨가신다. 성전에서 하신 그의 시위는 승리의 입성으로 인한 순간적 흥분으로 인해 분기된 열광이나 의분의 폭발이 아니다. 마태복음을 읽으면 그런 인상을 받을 수 있겠지만, 마가는 그 성전 정결이 발생한 때가 입성 후 그 “이튿날”(막 11:12)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작지만 매우 의미심장 정보로서, 그 일이 유대인 당국자들에 대한 어떤 충동적인 도전이 아니었음을 명확히 지적해 주기 때문이다. 그와는 반대로, 입성과 성전 정결 사이에 하룻밤이 끼어 있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의 관심을 예수의 사명에 강력하게 환기시킬 목적을 가진, 사전에 계획된 도전을 우리가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준다. 그처럼 성전을 정결케 하신 일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을 메시야로 주장하시고 유대교의 바로 심장부에서 그의 메시야적 권위를 행사하고 계심을 발견한다. (25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