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야고보서 제IV부 긴장 (4:1-5:6) 9. 경제적 긴장 (4:13-5:6)
 “안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증기”“연기”로 번역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문맥에서, 해상 상인들이 공격의 초점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안개의 개념이 가장 적절하다. 바다로부터 몰려와서 갑자기 사라지는 지중해의 안개는 그들이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그 상인들의 덧없고, 비현실적인 성품에 대한 완벽한 비유이다. (199.2)
 야고보는 아마도 실제적인 지리적 현상을 그의 생각 속에 끌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심중에 구약 성서적 용례도 고려한 것 같다. 예를 들어, 호세아서에서는 안개의 심상이 심판의 문맥에서 사용되었으며, 야고보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적인 언어로, 호세아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연관시킨다. 그는 기록한다: “이러므로 저희는 아침 구름 같으며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우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호 13:3). 그들의 거만한 확신 속에서, 이 건방진 상업적 책략가들은 인생의 덧없음, 즉 그들은 필멸의 인간 피조물임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며, 그래서 그들의 계속적인 존재와 계획도 그러함을 인식하는데 실패했다. (200.1)
 대신에, 야고보는 모든 상업적이며 경제적인 활동에 “주의 뜻이면”(4:15)이라는 전제가 포함되어야만 한다고 제안한다. 이 표현은 본질적으로 비유대적이며 헬라, 로마, 아랍지역에서의 일반적인 표현임을 주목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져서 사업이 착수되기 전의 필수적인 사항으로 유대 랍비들에 의해 간주되어졌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그럴듯하게 사용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표현은 그것의 깊은 종교적 내용이 결여되어 있다. 야고보는 그 표현을 경박하게 사용하여 권면하고 있지 않다. 그는 진정으로 책임 있는 자의 인식을 촉구하고 있다. (200.2)
 그런 궁극적인 인식을 갖기보다는, 이 부유한 사업가들은 “자랑하고 뽐낸다”—문자적으로, 그들은 그들의 거만함을 자랑한다(16절). 자랑하다(kauchaomai)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긍정적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칭의의 결과 중 하나로, 바울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자랑한다”(롬 5:2). 하지만 여기 야고보서에서 자랑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이 아니라 교만(alazoneia)이다. 교만이라는 단어는 흥미로운 어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방랑하는 사기꾼(초기 미국과 다른 비서방 세계의 “주술사”의 병행어)과 관련된다. Paul Cedar는 주장한다: “이 사기꾼은 치료법이 아닌 치료법을 제공한다; 그는 할 수 없는 것들을 자랑한다”(89). 하지만 야고보서의 상인들은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 알고 있으며, 그들의 목표가 확실하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들은 “비현실적인 가공의 세계에서 방황하며, 그들이 그곳에서 발견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있었다”(Tasker, 104). 야고보는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4:16)고 말한다. (200.3)
 태만죄
 야고보는 부자에 대한 두 개의 일련의 비난 중 이 첫 번째 부분의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는 나머지 구절들과 잘 맞지 않는 듯이 보일 정도의 금언을 발설한다. 그는 기록한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17절) “이러므로”는 야고보가 이 구절들에 대한 결론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상인들에 대한 문맥임을 고려해볼 때, 야고보가 이 사업가들이 더 잘 알고 있지만 정확하게 행하는 것에 실패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은 죄 되다. (201.1)
 우리는 너무나 자주 태만죄를 우리의 잘못에 대한 등급에서 대수롭지 않은 수준으로 격하시킨다. 이러므로 어떤 일을 거절하는 사람은 단순히 순종에 대한 기회를 상실한 것이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그런 사람은 죄를 지은 것이다. 이것이 가난한 자의 사회적 실체와 관련되었을 때에는 특히 그러하다. 야고보서에서는, 2:14-26에서의 고발이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행하기에 실패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말씀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믿음을 가졌지만, 가난한 자에게 거할 곳과 먹을 것을 제공치 않는 것은, 여전히 죄인의 부류에 처한 것이다. (201.2)
 Douglas Moo는 성경에서 “태만의 죄는 위임의 죄만큼 실제적이요 심각한 것임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한다. “위탁받은 돈을 사용하는데 실패한 예수님의 비유에 나온 종(눅 19:11-27);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실패한 ‘염소들’(마 25:31-46)-그들은 그들이 실패한 일에 대해 정죄받는다. 예수님의 또 다른 가르침은 여기의 야고보의 말을 매우 강력하게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눅 12:47)”(158). 이 문맥에서, 야고보는 예수님의 모본을 첨가한다: 이들 상인들과 상업적 기업가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이 거만하게 그들의 사업을 수행한다. 그리고, 야고보서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들이 그들의 사업을 통해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것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압제자가 됨이 추론된다. 그런 사업가들은 단지 어리석거나 약간의 잘못을 행한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그들이 죄를 짓고 있음을 단언적으로 말한다. (202.1)
 ■ 말씀에 들어감
 5:1-6을 두세 번 읽으라. 이 구절을 잠시 명상하라. 기도하라. 그분의 말씀을 읽을 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 간구하라; 그후에 아래의 과제를 하라. (202.2)
 1. 마태복음 6:19-34누가복음 6:20-36을 통독하라. 각 구절에서 야고보의 말과 비슷한 예수님의 말씀의 목록을 작성하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무엇인가? (202.3)
 2. 부자와 나사로의 예수님의 비유(누가복음 16:19-31)와 이 구절을 비교 및 대조하라. 그 같은 사치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203.1)
 3. 요한계시록 18:9-24을 읽으라. 부자들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저주와 야고보서의 비난을 비교하고 대조한 목록을 작성하라. (203.2)
 4. 야고보서의 이 구절에는 회개에 대한 요청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이 구절에서 몹시 비난한 죄에 대해 회개하도록 부자들에게 요청하는데 실패한 이유를 설명하라. (203.3)
 ■ 말씀을 탐구함
 저주
 4:13-17에서 야고보는 거만한 재정 계획에 대한 정신을 비난했다. 이제 그는 더욱 사악하고 불쾌한 정신을 언급한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포학하고 압제적인 정신이다. 그 행동은 너무나 압제적이며 착취적이어서 고통받는 자의 부르짖음이 “만군의 주의 귀에”(5:4) 이르렀다. (203.4)
 4:1과 마찬가지로, 연설의 시작하는 말은, age nun(“이제 들으라”로 번역됨), 의도적이다; 그것은 강제적이며 퉁명스럽다. 여기서의 반복으로 야고보의 비난은 더욱 높은 단계까지 도달한다. 이것은 이 구절의 거친 언어 속에서도 예증된다. 부자들을 향한 그의 기별은 친화적인 것이 아니다. 서두에 대한 AV(the Authorized Version) 성경번역은 다른 현대 성경 번역서들보다 휠씬 더 야고보의 의도와 느낌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전형적인 단어들을 발견한다, “그런 게 아니야!, 지금 너희 부자들아”(5:1). (203.5)
 야고보는 부자들을 경건치 못한 사회적 부류로 보고 있다. 이는 그가 그의 문법 구조에서 헬라어 호격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의 증거가 되고 있다. 그는 한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는 한 계층을 강조한다. 그것은 그들이 불경건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4:13-17에서 야고보는 그들이 그들의 계획에서 하나님을 떠나있음에 대해 격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불경건한 사회적 계층 즉, 한 부류이다. 이것이 아마도 그들이 회개하는 한 마디의 말이 없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그 부류에 속해있는 한 어떤 부자도 소망이 없다. 저자는 오직 심판과 저주만을 약속한다. (2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