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길 제 4 편 성소 제16장 하늘 성소로 들어가시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관련한 시편들”
 많은 시편은 예수님께서 지상 생애 동안에 겪으실 경험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눅 24:44)이라고 표명하셨다. 그분께서 하늘에 있는 성소로 들어가시는 사건과 관련된, 시편 22, 23, 24편을 함께 살펴보자.1) (131.1)
 “갈바리, 즉 골고다의 시”라고 불리는 시편 22편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당신은)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는, 예수님의 고뇌 어린 울부짖음으로 시작한다. 이 시는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시 22:31)라는 문구로 끝을 맺는데,이 히브리어의 원래 의미는 “다 이루었다!”(요 19:30)이다.2) (131.2)
 시편 23편“부활의 시”라고 불리는데, 이는 그분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신 다음에 부활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이 시편은 예수님께서 “골짜기”를 통과 하실 때의 말할 수 없는 고뇌의 경험을 예언한 것이다. 특별히 시편 23편은 마지막의 가사에서 믿음의 놀라운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131.3)
“내가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131.4)
 시편 24편“승천 시”라고 불린다. 이 승리의 시편은 앞의 두 시편의 절정이다. 이 시편은 지상 뜰로부터 하늘 성소, 즉 “참하늘”(히 9:24)로 들어가시는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한 놀라운 경험의 일부를 예언한다. (131.5)
 AD 31년에 성취됨
 이 시편들에 예언된 경험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마지막 유월절과 오순절, 예수님의 못 박히심과 부활, 승천과 취임으로 성취되었다. 이때 지상 성소에서 제사장 봉사의 신성한 의미가 끝났고,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봉사가 시작되었다. AD 31년에 두 번의 유월절이 준수되었다. 하나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통상적인 축하 의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유월절 하루 전에 지킨 것이다. 전자는 아빕월 14일 “해질(저녁) 때에” 지정된 시간에 준비되어, 아빕월 15일이 시작되는 다음날 저녁에 먹는 것이었다. 출애굽 당시부터 십오 세기 동안, 유월절 제도는 계속 지켜져 내려왔었다. 이로부터 “어떤 이는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함께 나누었던 식사는 정규 유월절 식사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공관 복음의 기록은 그들이 나누었던 식사는 유월절 식사였다고 명백하게 증언하고 있다. (막 14:12, 16, 17; 눅 22:7, 8, 13-15; 시대의 소망, 642, 652 참조).”(R. F. Cottrell, in R&H. 1955.6. 9.). 이 말을 잘 기억해야 하는데, 이 유월절이 때때로 오해의 여지가 있는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132.1)
 이 마지막 참된 유월절 음식은 언제부터 준비되어 먹었는가?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유월절을 예비하여 ∙∙∙ 먹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유월절 양을 잡을” 그 축제의 첫날에, “저희가 ∙∙∙ 유월절을 예비하니라”(막 14:12; 눅 22:1, 7, 8, 13). 이 준비는 원래 유월절로 지정된 시간보다 하루 전인, 아빕월 13일 목요일에 이루어졌으며(출 12:6), 다음 날인 아빕월 14일에 유월절 어린양을 죽이는 역사적인 사건이 뒤따를 것이었다. “저물 때에(아빕월 14일 시작),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저희가 먹”(마 26:20, 21)었다. 이것 역시 유월절을 먹는 지정된 시간보다 하루 전이었다. “가장 유력한 천문학적 정보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때는 니산(아빕)월 14일로, AD 31년 4월 27일 금요일이었다”(R. F. Cottrell, 상동). (132.2)
 왜 하루 전에 유월절을 지키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왜 오랫동안 잘 지켜 오던 관습을 벗어나셨는가? 그렇게 하신 분명한 한 가지 이유는 그분의 죽음이 유월절 양의 죽는 시각과 일치하므로, 완전하게 표상을 성취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132.3)
 또 다른 이유는,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자기 사람들을 ∙∙∙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그 시련을 미리 준비하기를 갈망하셨다(요 13:1, 19). 더 나아가 유월절 양의 죽음은 세상의 구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표상하기 때문에, 그 사건은 구속 사업의 결코 잊을 수 없는 “영원한 규례”(출 12:17)가 되었다.3) (132.4)
 이제 유월절 표상은 사라지고, 또 다른 예식이 대신하여 세워짐으로 구속의 기념을 영속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예식은 단번에 이루어져야 했다. 왜냐하면 곧 일어날 일로 인해 그날의 마지막에는 주께서 무덤에 누워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예식이 온전히 지정되지 않는다면 구속의 계획에서 하나의 큰 연결 고리가 빠지는 것과도 같았다. 그런 여러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지정된 시간 하루 전 날에 유월절을 드실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들은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라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133.1)
 주의 만찬이 제정됨
 신성한 의식으로서 유월절이 곧 끝날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 “유월절을 예표하는 동일한 사건의 기념으로”(부조와 선지자, 539)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다. 유월절의 양은 앞으로 있을 그분의 죽음을 지적해 주며, 주의 만찬은 전에 있었던 그분의 상하신 몸과 흘리신 피의 기념을 가리킨다(눅 22:16~20).4) 제자들은 주의 만찬의 신성한 상징에 참여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먼저 서로를 향하여 품은 모든 악한 감정, 높아지고자 하는 모든 이기적인 야망 등으로부터 깨끗해져야 했다. 모든 사람은 먼저 “자기를 살피”(고전 11:28)어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 준비하는 예식은 겸손과 이기심 없는 봉사를 가르치는 데 필요하다. “더 높은 영혼의 정결의 표상”(시대의 소망, 646)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다. 제자들의 주(主)와 구세주로서 친히 집전한 이 겸손 예식의 목적은 그들의 마음에서 모든 악한 생각을 제거하고, 여느 그리스도인 봉사에 필요한 자원하는 마음을 심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마음의 깨끗함이 없이는 결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갈”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찬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시대의 소망, 650)은 것이다. 그들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면,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요 13:4-17; 고전 11:26~29)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 예식을 마치셨을 때, 그분은 주의 만찬 전의 신성한 예식으로 세족 예식을 제정하셨으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고 하셨다. 이 예식은 표상이 원형에까지 이를때, 즉 “더욱 높은 정결, 모든 구속받은 자들이 어린양의 피로 씻기어질 때”까지 계속 지켜질 것이다. (133.2)
 예수께서 유월절 만찬의 표상을 이루심
 니산월 14일은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고난의 절정을 이루는 긴 하루였다. 그 전날 밤, 대제사장들은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막 14:1, 10, 11, 43-46), 예수님께서 불과 몇 시간 전에 발을 씻겨 준 유다를 돈으로 매수하여 그분을 배반하도록 했다!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마 27:18) 주었다. 대제사장들은 그분에 대하여 거짓 증언을 획책하였고, 일단의 관리들이 파송되어 그분을 결박하여 대제사장에게로 데려갔다(요 18:3, 12, 13). 날이 새자마자 그분은 대제사장의 관저에서 공회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사실 때문에, 대제사장은 그분을 신성 모독죄로 고소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눅 22:66-71; 마 26:63-66). (134.1)
 아직 이른 새벽, 그분은 관정으로 끌려 가셨는데, 제사장들은 행여 자신을 “더럽힘”으로 유월절에 참석하는 데 적당하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들어가지 않았다(요 18:28). 그들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마음의 악한 생각, 살인, 거짓 증거, 훼방, 신성 모독—임을 이해하지 못했다(요 18:28; 마 15:18-20). 그들은 관정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영향을 끼친 무리를 재촉하여, 그리스도를 사기꾼이며 협잡꾼으로 몰아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치도록 선동했으며, 그분이 밖으로 끌려나올 때, 그들은 “큰 소리”로 합류하였다(마 27:20-25, 63; 요 19:6; 눅 23:18, 23). (134.2)
 이어지는 심문을 당하시는 동안, 그분은 비난과 욕설, 비웃음과 꾸짖음을 받으셨다. 박해자들은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분의 머리를 세게 쳤다. 그들은 그분에게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주홍색 겉옷을 입혔고, 조롱하며 “유대인의 왕, 만세!”(마 26:67; 27:28~31, 킹제임스역) 하며 외쳤다. 그분께서는 이러한 모든 고통을 조용히 참으시며, 그 잔인성과 불공평에 압도당하는 대신에, 자신보다 타인을 염려하셨다. 마지막 행동의 하나는 어머님에 대한 돌봄을 대비하는 것이었다(요 19:25-27).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도, 대적들은 모욕과 비난을 계속하였다. 그분은 고통 중에 십자가에 달려 계셨지만 그들을 향하여 불친절한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도리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 지 알지 못하나이다”(눅 23:34, 신킹제임스역)라고 기도하셨다. 이 쓰디쓴 고통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사건과 시기에 있어서”(각 시대의 대쟁투, 399), “고난의 떡”(신 16:3, 4)과 “쓴 나물”“불에 구운 고기” 등 유월절 만찬의 표상을 완전히 성취시키셨다!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한 조목 한 조목씩 연구하고, 각 장면 특히 그분의 생애의 마지막 장면을 확실히 머릿속에 그릴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를 위한 그분의 크신 희생을 깊이 생각할 때에, 그분에 대한 신뢰는 더욱 굳어질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격발되고, 더욱 그리스도의 정신에 깊이 물들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마침내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통회와 겸손의 공과를 배워야 한다”(시대의 소망, 83).5) (1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