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2 부 안식일과 거룩 제 2 장  안식일, 합일의 거룩을 이룬 안식의 언약
 한 육체를 이루는 비밀이 크도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함이라”(출 31:13). (151.1)
 제칠일 안식일은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기념일일 뿐만 아니라, 사람을 하나님의 인격적 사랑의 동반자로 삼으신 언약의 기념일이다. 제칠일에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안식에 초청하여 사람을 자신의 깊은 사적 경험에 동참시키고 자신의 깊은 곳, 곧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서 사람을 자신에게 속하게 하였다. 하나님은 제칠일 안식일에 사람을 당신의 여자로 거룩하게 하셨다. 참으로 제칠일은 사람을 거룩하고 귀하게 만든 사람의 날이다. 사람을 위한 날이다(막 2:27). (151.2)
 사람에게 제칠일 안식일은 창조의 제6일에 하나님의 호흡을 나누어 받아 생령, 곧 산 사람이 된 창조의 기념일이며, 제칠일 안식일에 하나님의 안식의 호흡을 나누어 받아 하나님의 정혼한 여자로 거룩하게 된 기념일이다. 그런데 제6일의 숨과 제칠일의 숨은 같은 차원의 숨이 아니다. 제6일의 숨은 모든 동물들이 내쉬는 숨과 다를 바 없는 목숨의 숨이다. 무릇 살아 있는 것들이 살기 위해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제칠일에 사람과 함께 나눈 숨은 하나님이 주신 보통 숨이 아니다. (151.3)
 그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개인적인 숨, 하나님이 은밀한 깊이에서 내쉬는 하나님 혼자만의 숨이다. 하나님 스스로 “제칠일에 쉬어 평안하였다”고 하신 안식의 숨이다. 하나님이 “쉬어 숨을 돌렸다”고 하신 안식의 숨이다(출 31:17). 세상에 대해 천국으로, 생명에 대해 영생으로 비교될 수 있는 그런 호흡이다. 신랑이 신부와 더불어서만 나누고 싶어하는 숨, 신랑이 신부를 품에 안고 쉬는 숨, 신부가 그 신랑으로부터만 나누어 받는 숨, 신부가 신랑의 품에 안기어서만 내쉬게 되는 그런 숨이다. 부모가 자식을 갖고서 비로소 경험하기 시작하는 숨, 자식이 부모의 품에서 호흡하는 숨, 이 숨이 제칠일에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나누어 쉬고자 하는 쉼이다. (152.1)
 사람이 제6일에 나누어 받은 호흡은 생명을 나누어 받은 호흡이고, 제칠일 안식일에 사람이 하나님과 더불어 쉰 호흡은 하나님과 더불어 한 육체를 이루는 합일의 호흡이다. 신부를 거룩하게 하는 사랑의 호흡이다.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성령의 호흡이다. 제칠일 안식일에 재연되고 재현되는 호흡은 생명의 호흡만이 아니라 사랑의 이 호흡, 성령의 이 호흡인 것이다. 이 호흡을 나누기까지 사람은 인생(人生)이다. 인구(人口)이다. 생구(生口)의 하나이다. 동물 같은 사람이다. 동물의 하나 같은 인생이 인간으로 거듭난 날이 제칠일 안식일이다. (152.2)
 그러면 인간(人間)은 누구인가. 사이로서의 사람이 인간이다. 누구와 무슨 사이에 있고 누구와 무슨 관계에 있는 사람이 인간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인 사람, 남편과 아내의 사이인 사람, 형제와 이웃의 사이인 사람이 인간이다. 누구에게 어떤 사이도 아니고 아무에게 아무런 관계도 아닌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인생일 뿐이고 인구일 뿐이다. 목숨일 뿐이고 입일 뿐이다. (152.3)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어떻게 남녀가 남편과 아내의 사이가 되는가. 남녀가 한방에서 쉼으로써 그렇게 된다. 남녀가 한방에서 쉼의 언약을 나눔으로써 그렇게 된다. 함께 서로의 깊은 호흡의 언약에 동참함으로써 그렇게 된다. 함께 언약의 잠을 잠으로써 그렇게 된다. 하나님과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가 되고 남편과 아내의 사이가 된 것도 같은 방식으로 되었다. 제칠일 안식일의 쉼을 같이 나누고 안식의 잠을 같이 잤기 때문이다. 언약의 쉼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제칠일 안식일 안식은 하나님과 만물에게 남남이었던 우리 인생을 하나님과 만물에게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 곧 인간으로 만든 언약의 날이다. (153.1)
 사람의 관계에는 둘이 있다. 천륜의 관계와 인륜의 관계이다. 천륜의 관계는 혈연의 관계이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관계이다. 부자의 관계, 형제의 관계이다. 그런데 인륜의 관계는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혈연적으로는 남남이었지만 언약을 통해 특별한 사이가 된 관계이다. 부부의 관계이다. 부자보다 가깝고 형제보다 더 가까운 관계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제6일의 창조를 통하여 천륜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천륜의 관계는 관계 당사자의 개인적 결의에 상관없이 성립한다. 하나님은 이 천륜의 관계 위에 인륜의 관계를 추가하셨다. 하나님과 사람의 개인적 결의 위에 세운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더욱 심화시키고 고양시키고자 하셨다. (153.2)
 따라서 제칠일 안식일은 사람에게 있어서 일을 하지 않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안식의 날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안식의 날이다. 하나님과 사람을 한 사이, 한 관계로 묶는 안식의 날이다. 제칠일이 기념하는 사건은 사람이 하나님과 합일하는 이 사건이다. 제칠일에 재연되는 사건은 하나님과 사람이 합일하는 이 사건이다. (153.3)
 사도 바울은 “사람이. . . 그 아내와 합하여 한 육체를 이루는 이 비밀이 크도다”(엡 5:32)라고 탄복하였다. 두 남녀가 부모를 떠나 한 육체를 이루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비밀”(엡 5:32)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이 마치 사랑이 지극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여 자신을 줌과 같다”(엡 5:32)고 하였다. 남편과 아내가 합하여 한 육체를 이루는 비밀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비밀이요, 교회[아내]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이 하여 거룩하게 하시는” 비밀이다. “얼룩이나 주름이나 그 밖의 결점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아내]로 자기 앞에 세우는” 비밀이다(엡 5:25-27). 제칠일 안식일에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에게 속하게 하여 그와 더불어 합일을 이루어 낸 안식의 비밀이 이같은 비밀이다. 언약의 비밀이다. (154.1)
 하나님께서 제칠일 안식일에 사람을 거룩하게 한 비밀은 하나님과 사람 그 “둘을 하나로 만드는” 비밀이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둘 사이를 원수의 관계로 만들었던 계명의 율법을 그리스도 자신의 육체적인 죽음을 통하여 폐지하시어 자기 안에서 둘이 하나의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엡 2:14-15) 비밀이다. 제칠일 안식일이 요구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이같이 거룩한 희생적 사랑에 의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거룩한 합일이 이루어졌음을 받아들이고 그 합일에 성실하는 신앙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2)는 것이 안식일이 요구하는 믿음이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는”(요 14:10) 것이 안식일을 배척하는 불신앙인 것이다. (154.2)
 안식의 합일을 이룩해 낸 십자가의 거룩
 안식일의 합일을 이룩해 낸 하나님의 거룩은 어디에 나타났는가? 하나님과 사람을 한 육체로 화목케 한 안식의 비밀은 어디에 공개되었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비천하고 죄 많은 사람으로 매달린 골고다의 십자가에 나타났다. 그 붉은 보혈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씻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어,” 자기 안에서 둘을 한 몸으로 화목케 하신 십자가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드러났고 하나님의 안식의 비밀이 공개되었다. (155.1)
 하나님의 거룩은 죄 많고 비천한 사람을 정죄하여 멸망시키는 거룩이 아니다. 사람과 세상을 거룩케 하고 의롭게 하는 거룩이다. 죄 많은 사람 대신에 나무에 매달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울부짖은 거룩이다. 그리하여 끝내 그 부스러지고 찢어진 몸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합일을 “다 이루어 낸” 거룩이다. (155.2)
 제칠일 안식일, 곧 하나님의 “나의 안식일”에 사람을 초청하여 사람을 하나님의 거룩에 소속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법은 하나님이 사람의 비천함과 죄 많음과 간곤함의 “짐을 나누어짐으로써 성취하는 그리스도의 법”(갈 6:2)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의 안개가 자욱한 제칠일의 침방, 하나님의 거룩한 호흡이 샘솟는 사랑의 숨골, 바로 “지존자의 은밀한 곳”인 하나님의 “나의 안식일”로 사람을 초대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이스라엘이 “그 간역자로 말미암아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롬 3:7),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시 23:4)로 이스라엘을 찾아 “내려오신” 하나님이시다.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어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부터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너희의 하나님이 되신” 하나님이시다(출 6:6-7). 이스라엘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시고”(시 81:6),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우리의 구원”이 되신 하나님이시다(시 68:19). (155.3)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처소는 죄 많은 삶이 끝나는 세상의 저쪽이 아니다. 대신에 삶의 울부짖음이 “들리고” 삶의 고통이 “보이는”(출 3:7), 그리고 삶의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골고다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이다. 거기가 지존자의 은밀한 곳이며, 하나님의 깊은 품이다. 그리고 구원의 절규와 구원의 “다 이루심”이 선포되는 십자가의 시간이 지존자의 은밀한 시간이다. 그리스도의 안식, 곧 하나님의 “나의 안식일”은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서 이루어지고, 그 “다 이루어진” 그 거룩한 합일의 더 깊음이다. 그 합일의 지성소(inner most)이다. (156.1)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 지성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 십자가의 희생이 더 높고 더 깊은 차원에서 재연되고 재현되는 곳이다. 하늘로 올리운 골고다의 십자가가 하늘의 지성소이다. 거룩하게 피어난 연꽃이 검고 짙은 흙탕에 그 뿌리를 두었듯이 하늘 지성소에서 베풀어지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과 안식은 그리스도의 골고다 희생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늘 지성소의 밑은 그리스도의 땀과 눈물과 절규와 피투성이의 골고다이다. 골고다 십자가의 거룩과 합일이 하늘 지성소의 높이와 깊이로 옮기어 완성에 이르듯이, 제6일의 거룩한 희생과 합일이 제칠일의 높이와 깊이로 옮기어 완성에 이르렀다. 때문에 창세기 기자도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에 이르러 마치니”라고 읽는다. (156.2)
 제6일에 골고다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희생적 합일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는 제칠일을 무덤에서 보냈다. 제6일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 둘을 한 몸으로 화목케 하는” 합일을 “다 이루시고” 제칠일에는 사람과 함께 합일의 안식을 누리셨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이 무덤의 안식일조차도 단지 일을 하지 않는 안식이 아니라, 합일을 확대하고 심화시키는 안식일이었다.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벧전 3:19) 안식일이었다. 그리스도가 이룩한 하나님과 사람의 합일이 한 차원 더 깊어지고 한 차원 더 확대된 하루였다. 천상과 지상의 합일을 넘어 지하의 깊이로까지 합일과 화목이 깊어졌다. 하늘의 지성소, 그 안식과 합일의 지성소의 밑은 지상의 골고다가 아니라 숨진 예수가 파묻힌 무덤이었다. 이 무덤, 이 지옥의 정복으로 그리스도의 합일이 다 이루어졌다. 이제 천상, 천하, 지하의 그 어느 곳에도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이룩된 이 거룩한 합일의 햇빛, 곧 제칠일 안식일이 상징하는 삶의 햇볕이 미치지 못한 영역은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156.3)
 제칠일 안식일의 거룩은 이렇게 이루어진 합일의 거룩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이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는” 날이다. 하나님이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큰 비밀”은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화목의 비밀이다. (15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