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약속들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해 보라! 지금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기쁨과 장차 영원히 그와 함께 지낼 기쁨을 형상화해 보라! 이 세상의 일생은 너무나 짧다. 손상된 것이긴 하지만 대단히 감미로운 일생이다.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이 기쁘다. 여러분들도 그럴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가 살아 계시고 우리가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와 우리 가족들이 우리의 의식과 잠재 의식 속으로 부활의 실재와 그리고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제시된 생명의 약속을 가져 올 수만 있다면 우리는 도발을 받거나 유혹을 받을 때 옳바르게 행동하고자 하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도덕적 토대를 개발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한 모든 상황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도움을 상기시킬 것이다. (118.2)
 사려 깊은 경고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개인적인 성숙을 진척시키는 약속들을 제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나치게 자부심을 갖게 될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다. 사데 교인들과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아무 문제없다고 너무 자신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적 의식을 상실한 잠자는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118.3)
 

아버지가 정직히 세금 내는 것을 보면서 자란 소년은 후일에 커서 세금을 포탈하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118.4)
 에베소 교인들은 첫사랑을 잃어버렸다. 지나친 자신감이야말로 그리스도교에서 대물려 내려온 위험의 하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그리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러나, 이렇듯 놀라운 사랑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상관치 않으신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쉽게 빠질 수가 있다. (119.1)
 여러분은 친척들에게, 휴가를 즐기고 돌아가는 길에 여러분의 집을 들려가라고 초청한 일이 있는가? 그들이 어린아이들과 송아지 만한 개만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산더미 같은 빨래감까지 여러분에게 안기지 않던가? 여러분들은 하루 밤 자고 가라고 초청했는데 그들은 일 주일이나 머물고 가지 않던가? 그리하여, 냉장고는 바닥이 나고 소파는 찢어지고 양탄자도 온통 더러워지고, 꽤 속이 상하지 않았는가? (119.2)
 그러나, 어쩌겠는가. 여러분들이 그들을 초청했던 것이고 그들의 형편 그대로를 받아 들였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던 식대로 여러분의 집에 와서도 행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119.3)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는 음식이나 흰옷이나 정금에 대해 값을 지불할 수가 없다. 그분은 우리가 값을 지불하는 것을 원치도 않으신다. 또 값을 지불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가 좋은 성품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善)하심을 말해 주고 그들도 하나님의 영감의 도우심을 얻을 수 있음을 모본을 통해 보여 주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또 우리들의 가족 모두가 전체 이웃들에게 하나의 영감으로 감화를 끼치기를 바라신다. (119.4)
 가족들은 가족들대로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면에서 변화되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주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119.5)
 회개의 요청
 우리는 아직 이상(理想)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곱 편지에서 거듭하여 나타나는 주제는 회개의 요청이다. 회개(悔改)란 “심령이 변화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늘은 어제와 달리 생각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특별히 우리가 어떤 류의 사람이 되는가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마땅히 그러해야 할 만큼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가 견고히 서야 할 때 자주 타협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이해심을 나타내야 할 때 완고하고 화를 낸다는 것, 또 자기 자신을 너무 과대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기를 바라신다. 회개에는 자신에 대한 진실을 인 정하고 적절히 응답하는 것이 포함된다. (119.6)
 적절한 응답의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다른 사람이 되고야 말겠다고 용기있게 결단하는 것이다. 적절한 응답의 또 하나는 우리가 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사과하는 것이다. (119.7)
 필자는 자주 아들에게 화를 내곤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왔다. 또 집 사람에게도 너그럽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해왔다. 사과로 말미암아 관계는 악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진된다. (119.8)
 워터게이트 사건을 생각해 보라. 미국 대통령이 정직하지 않다고 처음으로 깨달은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 당시 당신의 기분이 어떠했는지를 기억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상상할 수 있는가? (119.9)
아나운서: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 미합중국 대통령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대통령:친애하는 미국 시민 여러분, 본인은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그 일을 이행했을 당시는 본인이 정당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본인의 잘못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사과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의 신뢰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만 본인이 끼친 손해를 치유하는 일에 여러분이 협조해 주시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119.10)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의지가 약한 행동이며 위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대다수 미국 시민들이 “그가 참 어려운 일을 했다”라고 평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대통령의 사과로 신뢰성의 간격은 좁아졌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향상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120.1)
 우리들 대부분은 회개하고 사과하기를 꺼린다. 우리가 어떤 과오를 인정하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진실로 그렇게 한 것으로 믿게 된다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과오를 벌써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가? (120.2)
 여러분은 잘못해서 딸기에 설탕 대신에 소금을 친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일이 있는가? 그는 본래 짠 맛의 딸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그가 실수했다고 부인에게 실토하기를 꺼려한 끝에 10 년 이상이나 소금 친 딸기를 좋아하는 사람인 양 딸기에 소금을 쳐 먹었다는 것이다. (120.3)
 우리의 과오들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왜 우리가 그 과오들을 깨닫지 못 하는지 답답해 한다. (120.4)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 대해 하신 말씀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들은 눈이 멀어 자신들의 과오를 인식치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벌거벗었으며 가난하며 맥빠진 상태에 있었다. (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