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생활은 하나같지 않다. (115.1)
 필자가 알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짧은 결혼 관계는 구급차와 죄수 호송차가 결혼식 리셉션 장에 도착하면서 끝났다. 구급차는 신부와 그쪽 참석자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으며 죄수 호송차는 신랑과 그 친지들을 데리고 그 지방 형무소로 갔다. (115.2)
 그러나, 그렇게 많은 결혼 관계가 단기간으로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이혼율이 높기로 소문난 미국에서도 처음으로 결혼한 부부의 절반 이상이 “죽음이 둘을 떼어 놓을 때까지” 함께 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평생을 함께 산다고 해서 이들이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다. 일부 결혼 관계는 사실상 원한을 안은 채로 계속 유지되고 있다.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을 하는 여자에게, 이혼을 생각해 보면 어떻냐고 물으면 “이혼이라니? 말도 안 된다!”며 잡아뗀다. 그러나, 남편을 살해함으로써 결혼 관계를 끝장내는 것이라면 매일이라도 좋다고 생각한다.5 (115.3)
 이렇게 많은 부부들이 해로(老)는 하고 있지만 그들 중 많은 수가 진정한 결합이 아니라 단순한 존속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은 슬픈 현상이 아닐 수 없다. (116.1)
 사람들은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한다. 진정으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의 특징적인 성격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성숙”이라는 것이다. 흔히 이야기되는 교과서적 표현을 빌어 말한다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려가 깊고 신축성이 있고 사교적이며 자신감이 있고 정서적으로 의존적인”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6 (116.2)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이상적인 인간성의 소유자로 소개되고 있다. 예수님이 만약 결혼하셨다면 얼마나 훌륭한 남편이 되었을 것인가! 남성답고 용기있고 자신감있는 분인 데다가 사려 깊고 사교적이어서 어린아이들과도 잘 어울렸다. 개인적인 원수들을 선선히 용서하시고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까지 사로잡고 그 깊은 지혜의 말씀을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예화로 말씀하시는 능력이 뛰어나신 그런 분이셨다. 그는 자신의 높은 원칙을 실천하시는 고매한 인격자이셨다. 그리고, 그는 그 시대의 “체제”에 용감히 맞섰다. 그는 혼자서 협잡꾼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었다. (116.3)
 우리는 대부분 예수님을 숭배하고 만약 그것이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라면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유혹에 부딪치면 그 좋은 결심들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좀더 훌륭한 생활을 하고 좀더 성숙한 개성의 소유자가 되는 데 있어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우리를 격려하는 일련의 유인(誘引)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16.4)
 일곱 편지에서 예수님은 그의 무리들에게 그를 닮은 선한 특징들이 있음을 평가하셨다. 우리들의 가정에서도 우리들은 식구들의 훌륭한 자질들을 평가해 주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수시로 그들의 “수고”, “인내”, “믿음”(또는 “성실”), “봉사”, “사랑”에 대해 칭찬의 말씀을 하셨다. (116.5)
 용기를 주는 약속들
 우리는 예수님께서 특정 시기와 장소에 따르는 특정한 유혹을 이기는 사람들에게 제시하신 굉장한 약속들에서도 용기를 얻는다. 일곱 편지에 언급된 유혹들은 비록 형태는 다를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예컨데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의 세 교회를 괴롭힌 강력한 유혹은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는 당시 이방 문화의 어떤 국면들과 타협하는 문제였다. 그때나 오늘이나 상당수의 사람들이 특정 문화 현상과 기독교가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 문제가 생긴다. (116.6)
 젊은 신자들이나 새 신자들, 그리고 신앙의 기둥과 같은 교인들로서 피로에 지친 사람들이 성경이 금지한 일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의 표적이 된다. 어리거나 약하거나 지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니골라 당이나 발람의 무리나 이세벨의 무리와 유사한 동료 그리스도 인들의 유혹을 물리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116.7)
 오늘날에 있어서도 현대 문화의 이러한 죄된 국면들이 사실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고 설득하는 친구들을 물리친다는 것이 용이한 일이 아니다. 수년 전에 역사가 윌리암 와렌 스위트(William Warren Sweet)가 다음과 같이 지적한 일이 있었다. 미국의 노예 제도 문제로 양분되었을 때 교회도 같은 문제로 양분되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각각 북군과 남군의 복장을 나누어 입고 나가 서로 죽였다. 미국이 1920년 대에 고립주의 외교 정책 노선을 펴자 해외 선교 활동에 대한 미국 그리스도인들의 지원도 약해졌다.7 1840년 대에 수백만의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노예 제도를 열렬히 옹호하였으며, 1860년 대에는 그들이 노예 보유자들을 죽이러 나갔다. 1920년 대에는 해외 선교를 위한 자신들의 서약을 파기하고 미국 내에 거대한 교회들을 건축하는 데 자금을 사용했다. (116.8)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자위하였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그 시대의 일반적 풍조를 따르고 있었다. 니골라 당이나 발람의 무리와같이 그들은 그 당대의 문화적 경향에 저항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 하지 않고 그 시대의 유혹에 열심히 굴복하고 있던 것이다. (117.1)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에 대한 대학생들의 관심이 높아가자 크게 기뻐했다. 미국에 있어서는 1920년 대 중반, 1950년 대 초반, 1960년 대 후반, 1980년 대 중반이 이러한 때였다. 가톨릭 대학(Catholic University) 사회학 교수이며 학장인 R. 호우그(Hoge)는 종교적인 헌신에 있어서의 이 같은 경향을 연구한 결과 이러한 경향들이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대학의 사회적 규범에 대한 순응” 같은 다른 관심 사항들에 대한 대학생들의 관심과 뚜렷하게 병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학생들도 좋고 나쁜 것이 그들의 동배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8 (117.2)
 이 모든 것들이 뭐 그리 놀라운 것이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여기 또 다른 사실을 하나 소개하겠다. 유니스 케네디 시라이버(Eunice Kennedy Shriver)는 조셉 P. 케네디(Joseph P. Kennedy) 재단의 부회장이다. 그는 십 대의 임신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데 언젠가 말하기를 “우리의 젊은이들은 지지를 받고 가치관을 갖고 싶어한다”고 하였다. 그의 결론은 필자가 알고 있는 많은 청년 활동가들의 결론과 유사하다. 그는 “사회 자체가 십 대의 성 생활을 조장하면서 그 결과에 대해서만 위선적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 그는 십 대 소녀들과 함께 지내온 25 년의 경험을 토대로하여 “그들에게는 피임약 대신에 생활의 규범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예증하기 위하여 10 대의 소녀들로 구성된 특정의 학급을 방문하고 관찰한 경험을 제시하였다. 그 학급의 선생님이 일련의 그럴듯한 화제(話題)로 이야기했을 때는 단 한 명의 학생도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 친구의 요구에 대해 ‘아니’라고 대답하면서도 그 친구의 사랑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토론하고 싶은가?”라는 선생님의 질문에는 학급 학생 전체의 손이 올라갔다는 것이다.9 (117.3)
 시라이버 여사의 논지는 많은 젊은이들이 선량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은 만약 그들이 방법만 안다면, 그리고 적절한 격려만 받는다면 동배의 압력을 물리칠 것이라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겉으로 나타난 반항적인 행동의 이면에 가치 의식을 지니고 있고 “도움을 바라고 있다.” (117.4)
 성경은 만약 젊은이들이 그들의 생활 속에 성경을 깊이 끌어넣기만 한다면 능히 그들이 원하는바 도움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약속한다. (117.5)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9~11).
(117.6)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약속의 일부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제시되어 있다.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이기는 그에게는(즉 유혹을 극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 2:26), “이기는 자는 이와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계 3:5),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117.7)
 자동차 뒷 좌석에 앉아 무겁게 숨을 몰아쉬는 젊은 남녀들에게 이런 약속을 처음으로 소개한다는 것은 너무 때늦은 것이다. 그들은 데이트를 시작하기 전에 이러한 약속들을 알았어야 했다. 그리스도인 사업가는 그들이 소득세를 속이기 전에 그리고 자선 기금으로 희사할 수도 있었던 수백 불($)의 돈을 칵테일 파티에서 소비하기 전에 이러한 약속들을 알아야 한다. (1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