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 다니엘 4장 하나님과 느부갓네살의 교만 II. 지도력에 대한 하나님의 존중
 다니엘 4장 17절에서, 하늘의 순찰자가 우리에게 강조하고자 하는 사실은

 (1)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2)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신다는 것이다. (66.1)
 오늘날에는 누구랄 것 없이 지도자를 헐뜯는다. 우리의 지도자들을 그 자리에 앉히신 분이 바로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있는가? (66.2)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우리는 앞서 다니엘 1장을 공부하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주저하시며 저 완고한 유다 왕국을 느부갓네살 왕에게 포기하셨는가를 살펴보았다. 하나님이 유다 왕국을 위하여 제일 처음에 결정한 선택은 훨씬 덜 비참한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으로 하여금 유다를 느부갓네살에게 포기토록 한 것은 유다 국민들의 죄악이었다. 속담에 있듯이, 백성들은 숙명적으로 그들의 분수에 알맞은 지도자들을 갖게 되는 것이다. (66.3)
 다니엘 4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의 궁극적인 통치자이며 따라서 그분은 이 사람에게서 권력을 뺏어 저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좋다고 판단될 때는 언제든지 지도자들을 교체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때 위안이 될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그 시대 최강대국의 왕이었으나, 하나님은 순식간에 그를 왕좌에서 내려오게 하여 일개 황소처럼 들판에서 풀을 뜯게 하신 것이다. (66.4)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느부갓네살을 돕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이 회개하여 당신께로부터 용서를 받고 영생을 얻게 하고자 하셨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사랑하신다(요 3:16). 그리하여, 그분은 충동적이며 후덕한 듯 하면서도 잔인한 저 느부갓네살도 사랑하셨다. (66.5)
 신약 성경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딤전 2:1, 2)고 하였다. (66.6)
 기도와 도고와 감사!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지도자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린 것이 얼마 전 일인가? 나쁜 정부일지라도 약간의 공익성은 가지고 있다. 악정도 무정부보다는 낫고, 악법도 무법보다는 낫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정부하에서들지 그 속에 있는 선한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66.7)
 의견을 일치한다는 것과 무례와는 서로 다른 것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지도자들에 대하여 무례히 말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리스도인 가정들이 정부의 지도자들에 대하여 정직성과 이해심을 가지고 토의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66.8)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지도자들에 대해 존경의 태도를 보여 주셨다. 어느날, 한 무리의 지도자들이 한 개인을 공개적으로 정죄하기 위하여 그분 앞에 난폭하게 끌고 왔을 때, 그분께서는 그녀에게 죄가 있지만 그녀를 끌고 온 자들의 죄가 더 악함을 대번에 간파하셨다. (66.9)
 그분께서는 얼마든지 그 자리에서 그 남자들을 난처하게 만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대신에 허리를 꺾고 앉아 맨땅 위에 손가락으로 그들의 죄상을 쓰셨다. 그 지도자들은 그분이 쓴 글들을 보고는 묵묵히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들이 모두 떠나간 후, 그 기록은 그 자리를 지나가는 무심한 발자국에 밟혀 흔적 없이 사라졌다(요한복음 8장 1~11절을 보라). (67.1)
 예수님은 그 죄 많은 지도자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으므로 그들을 존중하였다. 그분은 언젠가 당신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하셨다. (67.2)
 그분께서 지도자들의 죄상을 공개적으로 나열하시면서 설교하신 경우도 물론 있었다(마 23장). 그러나, 그렇게 하신 것은 당신 이 십자가에 달릴 날이 이 제 3 일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그 지도자들을 구원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죄상을 나열하는 주님의 음성은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안고 있는 여인의 음성 그것이었다. (67.3)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기별은 로마서 13장에서 계속하여 반복되었다. 여기에서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어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하였다(롬 13:1~5). (67.4)
 때때로,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은 국법의 특정 사항에 대한 순종이 양심의 법을 거스리는 것이 되는 어려운 처지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한 사정은 말세가 가까울수록 더 늘어갈 것이다. 사도행전 5장 29절에서 베드로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다. (67.5)
 그러나,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항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순종에는 국가에 대한 순종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통치자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롬 13:4). 만약에 양심상 국법을 어겨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양심을 인하여”(롬 13:5) 복종하라는 성경 말씀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다. (67.6)
 국법을 불복해야 할 경우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서도 우리의 양심이 안전한 안내자일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의 양심은 “군에 입대하여 적군을 살해하라”하고, 어떤 사람의 양심은 “입대를 거부하여 평화주의 자가 되라” 한다. 또 제 3자의 양심은 “국가가 징집 요구를 할 때는 입대할 것이지만 성경에 살인하지 말라 하였은즉(출 20:13) 그것을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는 사람을 치료하는 기회로 사용하라” 한다. (67.7)
 양심 하나로는 안전한 안내자가 될 수 없고, 성경만이 유일한 안내자이다. (67.8)
 청년 다니엘은 참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당시의 바벨론 국립 한림원(대학)에 등록하는 일이 여간 난처한 것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 학교가 우상 숭배와 의사(凝以)과 학의 원리들로 부패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국왕이 그에게 등록을 명했을 때, 등록을 거부하라는 명령이 성경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왕명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금지된 식물들이 제공되자(레 11장), 그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먹기를 거절하였다. (67.9)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두말할 필요 없이, 두라 평지에 나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을 것이다. 혹독한 시련에 직면해 선다는 것은 도덕적인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왕이 그들의 출석을 명했으며 성경이 왕명 거역을 명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은 왕명을 순종하였다. (67.10)
 그러나, 성경은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엄정히 지시하였으며(출 20:4~8), 그래서 그들은 풀무불의 위험을 무릅쓰고 절하기를 거절하였다. (6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