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I 부 왕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 (16:21-28:20) 9. 십자가의 생명: 왕국 시민권의 자격 요건 (18:1-20:34)
 예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26절)고 대답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들로 예수께서는 20장의 은혜에 관한 위대한 비유를 말씀하시기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고 계신다. (242.3)
 은혜의 “불공정한” 성격
 줄잡아 말하더라도, 베드로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신 예수의 답변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대단히 인간적인 질문으로 반응한다. 그는 부자 젊은 관원과는 달리 그와 다른 제자들이 그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한 후에,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27절)라고 묻는다. 달리 말해서, “우리의 희생의 대가로 우리가 무엇을 얻겠습니까?”라는 말이다. (242.4)
 예수께서 짜증스런 견책으로 베드로에게 응수하시기가 아주 쉬웠을 것이다. 그는 베드로에게 그의 질문은 영적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그와 나머지 제자들에게는 누가 가장 크냐? 우리가 무엇을 얻을 것이냐 등과 같은 자기 중심적인 질문들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대단히 당연한 길을 따르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동정과 존중심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베드로에게 답변하신다. 결국, 제자들은 참으로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았던가? (242.5)
 예수의 답변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은 베드로 자신의 입장에서 그를 대하시는 직설적인 답변인 반면에, 두 번째는 다소간 은근한 견책을 담고 있는 비유이다. (243.1)
 그의 직설적인 답변 부분에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그들이 참으로 그들의 신실함에 대한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재림 때 그들은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28절) 것이다. 그 심판은 아마도 판결을 내리는 심판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구약에서처럼 통치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의 사사[judges]들은 통치자들이었다.) 이 구절로부터 제자들의 받을 상급이 정확하게 어떤 성격의 것인지, 그리고 그들의 상급과 다른 그리스도인의 상급이 어떻게 다를지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예수의 말씀의 요점은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랐으며,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243.2)
 이 구절을 떠나기 전에, 성경의 말씀들을 너무도 자구적으로 해석하여 일점 일획 모두를 어떤 신학적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에 관해 주목해야 할 한 가지 사항이 있다. 열두 제자들이 열두 보좌 위에서 통치자로 좌정할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한 가지 말하자면, 유다가 빠져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교훈은 우리가 영감을 축자적으로 무오적으로 만들려고 하기보다는 각 구절에서 요점을 찾아내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변적인 것들에서 어떤 흥분적인 “새 진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심 기별을 찾기 위해 읽으라.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후자의 길을 따름으로써 다소 대단히 성화되지 못한 결과들을 얻고 있다. (243.3)
 29절에서 예수께서는 그 주제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로 돌리신다. 제자들 뿐 아니라 그를 따라온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상급을 받을 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너무 자구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결국, 일백 명의 아버지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예수의 말씀의 요지는 상급이 희생보다 훨씬 클 것이라는 것이다. (243.4)
 19:30-20:16에서, 우리는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의 답변의 두 번째 부분을 발견한다. 그것은 포도원의 비유이다. 그 비유는 20:16이 역순(逆順)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30)이라는 진술로 시작하고 끝난다. 그 반복과 역순은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 대한 예수의 은근한 경고와 견책이다. (244.1)
 이 비유는 그의 포도원을 위해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하러 나간 집주인(하나님)에 관한 것이다(이스라엘은 자주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언급되고 있다—사 5:1-7 참고). 하루 열두 시간에 이르는 노동이 시작될 때, 지주(地主)는 하루 품삯으로 1데나리온을 지불하기로 인부들과 공적인 계약을 맺는다. (244.2)
 그러나 그 농부는 필사적이다. 포도는 익었을 때 즉시 수확해 들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많은 포도들이 망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농부는 더 많은 일꾼들을 고용하기 위하여 다시 돌아온다. 그가 마지막으로 들른 것은 하루가 거의 끝나갈 갈 무렵인 제11시(오늘날의 오후 5시)이다.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뜻은 늦게 부름을 받은 이 일꾼들은 그리 뽐낼 처지가 못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벌써 고용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에, 어쨌든 일을 찾아 나타난다. 그러나 지주는 맨 먼저 부름을 받은 일꾼들에게만 하루 품삯으로 정확하게 얼마를 지불할 지를 말해준다. (244.3)
 그 이야기는 20:8에서 특별히 흥미진진해지는데, 그 날의 일이 마치자 지주는 자신이 고용한 사람들의 순서가 아닌, 그 역순으로 일꾼들을 줄 세우고서는 품삯을 지불한다. 그와 같이 하여 마지막에 온 사람들이 맨 먼저 돈을 지급 받는다. 그 주인은 다른 사람들이 훤히 쳐다보고 자리에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들에게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을 지불한다(9절). (244.4)
 자, 이제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오가고 있으리라고 그대는 생각하는가? 그들은 곱셈을 시작했다(20:10). 과수원이나 건설 현장에서 일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일꾼들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안다. “저 사람들이 1시간 일하고 하루 품삯을 받는다면, 우리는 열이틀치 품삯을 받을 만하다. 안식일을 뺀다면 2주일치 수입이 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드디어 우리는 우리를 출세하게 해줄 한 고용주를 발견했다!”하고 그들은 기뻐한다. 달리 말해서 그들의 관심은 19:27의 베드로의 질문, 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이다. (244.5)
 그러고 나서 돌발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모든 사람들이 정확하게 같은 액수의 품삯을 받는다! 그들이 불평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11절). 필자가 처음으로 마태복음 20장을 읽을 때는 청년으로서 건설 노동자였다. 이 말씀을 읽고 나는 그들과 함께 불평했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공의를 우습게 만드는 처사다. (245.1)
 13-15절은 그 이야기의 주요 논점을 전개한다. 농부는 완전히 공정했다. 그는 하루 종일 일해 온 자들에게 그들이 받기로 동의한 액수를 지불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받을 만한 품삯보다 더 많이 주었다. 그들이 받을 만한 것보다 더 많이 좋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은혜의 행위이다. 그와 같이, 먼저 부름을 받았던 일꾼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에 대해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농부가 관대하다고 하여 마음이 상한다. (245.2)
 16절에서 예수께서는 그 비유를 시작할 때 하신 말씀을 되풀이하시면서 이번에는 역순으로 하신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비유에 내포되어 있는 진정한 의미는 먼저 된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에 관한 그들의 불평을 극복하고 자신의 상급에 관해 너무 과도하게 집착하는 일을 버리지 않는 한 아예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적 사랑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받아 마땅한 것을 주지만,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써 그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은혜로운 태도를 계발하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받아 마땅한 대로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인해 감사드려야 마땅하다. (245.3)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것”이라는 예수의 진술을 마무리짓기 전에 우리는 그 비유가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물을 필요가 있다. 우선 베드로와 제자들이 확실히 마음에 떠오른다. 이는 베드로의 질문이 예수께서 그 비유를 말씀하실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먼저 온 일꾼들이 취한 태도를 지닐 위험에 빠져 있다. 어떤 성경 해석자들은 이 비유를, 이방인들이 그 왕국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던 유대인 백성들에 대한 언급으로 본다. 우리 시대에는 노년에 회심한 사람들 대(對) 평생 예수를 섬겨온 자들, 혹은 지역교회를 재정적으로 돕고 육성하는 데 애써 온 오래된 교인들 대(對) 좀 늦게 교회에 들어왔지만 지도자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교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245.4)
 우리는 실제적으로 그 비유의 기별이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너무 선하고 거룩하여 다른 사람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불평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다. 그렇게 한다면, 비록 출발은 먼저 했을지라도 마지막이 될, 전혀 부럽지 않은 입장에 우리를 버려둘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이 “놀람”과 심판 때의 놀람을 취급하는 그리스도의 몇몇 다른 비유들과 비교한다면, 마지막이 된다는 뜻은 영생이 아닌 어떤 것을 받는다는 것과 동등시 할 수 있다(예컨대, 25:46 참고). (246.1)
 아직도 왕국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
 마태복음 19:1은 예수께서 유대로 들어 가셨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20:17에서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에게 닥쳐오는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경고할 또 한번의 기회를 주게 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또한 16:21; 17:9, 12, 22, 23을 보라). 머지 않아 발생할 그 사건을 앞두고, 예수께서 이번에는 앞서는 언급하지 않으신 몇몇 사항들을 덧붙이신다. 그는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그를 사형에 처하도록 정죄한 후에 “이방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알려 주신다. 여기서 처음 말씀하시는 다른 사항들로는 그가 고난받으실 방법—능욕과 채찍질—과 그가 죽임을 당할 방식—십자가에 못박힘—이다(20:18, 19). R. T. 프랜스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 말씀의 취지는 그 배척의 총체성(유대인 지도자들과 이방인들) 뿐 아니라 굴욕과 극심한 고통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순교가 될 것이지만, 험악한, 야비한 살육이 될 것이다. 그처럼, 그가 제3일에 살아나실 것이라는 것을 여기서 다시 한번 읽는 것은 한결 더 인상적이다”(Franc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291). (2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