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I 부 왕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 (16:21-28:20) 9. 십자가의 생명: 왕국 시민권의 자격 요건 (18:1-20:34)
 윌리엄 바클레이는 다음과 같이 그 대조의 의미를 멋지게 요약한다: “그 요점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행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행해온 것과 어떤 방식으로도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가 그에게 빚지고 있는 것을 용서해 주셨다면, 우리도 우리 동료 인간들이 우리에게 진 빚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Barclay, 2:214). 그와 같이,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처럼 은혜롭게도 제공하셨던 그 용서를 나누는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핑계할 수 없을 것이다. (234.1)
 십자가에 비추어 본 이혼
 19:3-12에 제시된 이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여러 면에서 18장의 강연에 부합되지 않는 반면에, 다른 면에서는 그 부분이 명확하게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두 부분 모두 인간 관계들을 취급하고 있다. 반드시 이혼과 재혼은 공로 없이 얻은 하나님의 용서에 의거하여 고찰될 필요가 있다. 또한 이혼과 재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접근은 십자가에 비추어 고찰되어야 한다. (234.2)
 19:1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결국 그의 봉사의 마지막 주요 여행이 될 여행을 위해 유대로 들어가셨다는 의미심장한 진술을 발견한다. 유대에서 그는 평소처럼의 군중들을 발견하실 뿐 아니라(2절), 그를 반대하는 바리새인들도 발견하신다. 여느 때처럼 그들은 그에게서 어떤 흠을 찾아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혼의 분야에서 그렇게 하려고 하고 있다. (234.3)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3절)라고 예수께 질문함으로써 이혼에 관한 당대 유대인의 논쟁에 예수를 끌어들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논쟁은 사람이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할 때 그의 아내와의 이혼을 허락하는 신명기 24:12에 대한 바른 해석에 관한 것이다. 샴마이(Shammai) 학파는 그 구절이 간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반면에 힐렐(Hillel)을 따르는 서기관들은 그것이 그 죄보다 덜 심각한 수없이 많은 일들을 포괄한다고 보았다. 최소한도,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부득이하게 그 문제 중 어느 편 입장을 지지하심으로써, 그를 따르고 있는 무리들 중 일부를 이간시키기를 바라고 있다. (234.4)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그들의 책략을 피해 가신다. 그는 “더욱더 최초일수록 더욱 더 중요하다”는 전제에 기초된 랍비식 논쟁 방식을 사용하심으로써 당대의 유대인의 논쟁 전체를 피하셨다. 예수께서는 그 논증을 창세기까지 갖고 올라가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세상 창조처럼 일찍 발생한 것이 모세가 상당히 후기에 입법한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시사하신다. 이런 형태의 논증은 모세의 규정들을 폐지시키지 않으면서도, 모세는 더 초기의 진술들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였다. (235.1)
 마이클 그린(Green, 181, 182)은 바리새인들에게 답변하시면서 예수께서는 결혼에 관한 여섯 가지 중요한 요점을 말씀하셨다고 지적한다. 첫째, 결혼은 하나님에 의해 창시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인 계약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이다. (235.2)
 둘째, 결혼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규례이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 하나님의 의도는 남녀 구별이 없는 세계가 아니었다. 그린이 표현하듯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차이와 상보성(相補性)이 있다. 그것은 대단히 분명하여, 동성연애가 결혼에 대한 그 못지 않은 타당한 대안으로 간주되게 된 이 20세기 말엽에도 그 사실은 너무도 분명하여 그에 대한 증거 제시 없이 그저 그렇다는 진술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235.3)
 셋째, 결혼은 영구적이 되도록 의도되었다.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결혼 관계는 어떤 “수치되는 일”로라도, 샴마이, 힐렐 혹은 그 어떤 다른 사람이 그 표현을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결코 깨어지도록 의도되지 않았다. 결혼의 영속성으로부터의 여하한 일탈(逸脫)도 이상(理想)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235.4)
 넷째, 결혼은 배타적이다. 둘—셋, 넷 혹은 다섯이 아닌—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함께 결합되어야 한다. 그 이상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편의적인 “정사”(情事)와 고대인들의 일부다처제를 배격한다. 명백히 구약에서 일부다처제를 하나님께서 관용하신 것은 굳게 확립된 관습과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이상에 미달되는 양보적인 처사였다. 그 외에도, 그것은 독립적인 시민으로서 아무런 권리도 가질 수 없었던 여성들과 주변에 충분한 남성들이 없었던 문화권들에서 여성들을 위한 안전과 보호를 제공해 주었다. (236.1)
 다섯째, 결혼은 핵가족 단위를 창조한다. 여기에는 자신의 부모를 떠나 배우자와 연합하는 것이 포함한다. 그와 같이 결혼은 모든 인간 관계 가운데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236.2)
 여섯째, 결혼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이 10-12절에 암시되어 있다. 제자들은 결혼의 본질에 관한 예수의 강의의 엄정함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샴마이보다도 더 가혹하셨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만일 결혼에서 놓여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아마도 첫째로 결혼 관계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제일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236.3)
 예수께서는 이러한 제안을 곧바로 부정하지는 않으시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런 다음 그는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위하여”(12절) 결혼할 그들의 권리를 포기할 것이라고 부언하신다. 예수 자신, 침례자 요한 그리고 명백히 성년(成人) 바울의 신분이 이러하였다. (236.4)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이상에 미달되는 행위로서의 이혼에 관하여 추호의 의문도 남기지 않는다. 그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나는 이혼하는 것을 ... 미워하노라”(말 2:16)고 말씀하신 구약과 의견을 같이하신다. (236.5)
 그러나 이혼은 재혼과 마찬가지로 완전치 않은 세상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두 번째 결합은 확실히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이상에 못 미친다. 그는 그것을 간음 행위로 언급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남자—한 여자’라는 이상(理想)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서 재혼이 간음이 되지 않는 유일한 예외는 19장에 주어져 있는데, 그 이상이 이미 다른 배우자에 의해 산산조각 났을 때에 한(限)한다(9절). (236.6)
 결혼을 구(救)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지만 결국은 이혼했지만 결혼 관계 안에 있고 싶어하는, 하나님이 주신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분명 달가운 사상은 아니다. 비록 몇몇 성자(聖者)들이 그렇게 만들려고 분투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다행히도 이혼과 재혼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아니다. 우리는 1-12절의 이혼과 재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이 18장에 있는 그의 용서에 관한 가르침들의 그늘 속에 들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혼과 재혼이란 절망적인 거미줄에 붙들려 있는 남녀들이 십자가의 빛 안에 서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혼과 재혼은 여타의 죄들과 마찬가지로(성령에 대해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것을 제외하고[12:30-32])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용서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이런 상황에 처한 남녀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이상에 미달되었으며, 정결케 하시는 그의 은혜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용서받을 수 있고 또 용서받을 것이다. (237.1)
 어떤 이유에서건 이혼과 재혼 문제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뿐 아니라 교회의 동정도 필요로 한다. 마태복음 18장은 이런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뿐 아니라 용서할 인간들의 의무도 제시한다. 그리고 용서를 넘어 마태복음 18:10-14는 이런 상처나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라고 명령한다. 진심어린 회개를 하는 그들의 형제자매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비평적인 사람들은 그들에게 베풀어진 바 된 하나님의 용서를 잊은 사람들이다. 이런 비평자들은 18:32-34의 불의한 종과 18:6의 연자 맷돌 상급을 받기가 쉽다. 십자가의 교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바, 이해심 깊은 자비를 끊임없이 기억할 필요가 있으며, 그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 또한 그 동일한 자비를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237.2)
 ■ 말씀에 들어감
 19:16-20:34를 두 번을 읽으라. 그러고 나서 다음의 질문들과 문제들을 조사해 보라. (2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