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I 부 왕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 (16:21-28:20) 9. 십자가의 생명: 왕국 시민권의 자격 요건 (18:1-20:34)
 이 경고들은 명백하지만, 우리는 그 표현이 문자적이기보다는 비유적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불행히도 각 시대를 통하여 몇몇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적용시켜왔다. 예컨대, 오리게네스(Origen, AD c. 185-c. 254)은 음욕적인 생각들에 관한 자신의 진지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 구절들(그리고 19:12)을 문자적으로 순종하여 자신을 거세(去勢)해 버렸다.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예수의 말씀의 취지는 자기 몸의 자기 절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자신들로부터 죄를 힘차게 내던져 버리고, 그들을 죄로 인도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거나 궁리하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구적인 해석의 논리적 극단은 하늘 왕국을 위하여 자살하는 것일 것이다. 결국, 죽은 사람들은 전혀 죄를 짓지 않지 않는가! (229.2)
 하나님은 죽음을 원하시지만, 그러나 그것은 고집스런 죄 된 본성의 죽음이다. 다행히도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해 주시는 은혜는 그의 자녀들이 견인불발을 통하여 정복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 그러는 동안, 비유적인 언어는 우리의 관심을 붙잡아 우리로 하여금 죄 된 행동들의 심각성을 보도록 돕는다. (229.3)
 10-14절에서, 그 논조와 그 주제가 다시 변한다. 이번에 그 논조는 약속의 논조나 경고의 논조도 아니고 관심의 논조이다. 그 관심은 모든 신자들, 특별히 “하찮은” 혹은 연약한 자들과 어린이들에 대한 것이다. 아버지는 그의 지상의 자녀들 각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실 뿐 아니라 그들 각자에게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한 특별한 천사를 가지고 있다. (「새영어성경」[NEB]은 천사라는 단어 앞에 수호자(guardian)라는 말을 덧붙이지만, 헬라어에는 이 말이 암시되고 있기는 하지만 덧붙어 있지는 않다.) 10-14절에 대한 자연적인 결론은 교회 교인들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처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그와 똑같이 돌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비추어, 우리의 모든 관계들은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지배로서가 아닌 그들에 대한 겸손한 봉사에 의거하여 위대함을 보게 될 때 더욱더 돌보는 관계가 될 것이다. (229.4)
 누가복음 15장은 잃은 양에 관한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지만, 거기에서 그 이야기의 취지는 복음 전도적(잃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인 데 반해, 여기서는 목양적(신자들이 충실함을 유지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 목양적인 관심은 15-17절까지 계속 이어진다. (230.1)
 십자가에 비추어 본 용서
 겸손하고 돌보며 관심을 가진 그리스도인들(1-14절)은 또한 아량(雅量)이 있을 것이다. 이 장에서 용서에 관한 마태의 취급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15-20절)는 죄를 범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개괄하고 있다. 둘째(21, 22절)는 무제한적인 용서를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셋째(23-25절)는 용서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그 복을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예시하는 비유이다. (230.2)
 15-20절은 두 그리스도인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다루는 규칙들을 제시한다. 이 규칙들을 더 자주 따른다면, 교회는 확실히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할 것이다. 첫째, 그 문제를 사적으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해결하려고 노력하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 문제가 사적으로 풀릴 수 있다면 그 죄를 대중 앞에 내놓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빈둥빈둥 놀면서 혼잣말로 불평을 해대거나 다른 사람에 관하여 다른 사람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것도 유익하지 않다. 예수께서 상처를 받은 사람(피해자)이 주도권을 취하라—“가라”—고 명령하시고 계심을 주목하라. 그것은 그의 원수들과 화해를 이루어 내도록 그의 아들을 보내셨던 하나님과 같이 되라는 명령이다(창 3:8, 9; 눅 15:4, 8, 20, 28; 롬 5:6, 8). (230.3)
 이 개인적 방문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때에 가서야 그 피해자는 다른 한두 명의 그리스도인을 대동하게 그에게 가야 한다. 양편 모두의 주장과 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하여 투입된 성실성 모두에 대해 증인들이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16절). (231.1)
 이런 노력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면, 그때는 묶고 푸는 기능을 갖고 있는 교회에 그 문제를 제출해야 한다(17, 18절). 우리가 16:19에서 보았듯이 그 기능은 표준을 정하고 행위를 규제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제기된 사안에 대하여, 교회는 그 상처를 주는 행동이 허용될 수 있는지 아니면 금지되어야 하는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양자(兩者)는 성령의 지도 아래 내려진 공정한 결정은 또한 하늘에서도 비준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교회의 결정을 준수하도록 기대되고 있다(18절). 그러나 만일 공정한 결정이 내려졌어도 범법자가 그것을 배척할 때, 그의 불쾌한 행위와 회개치 않는 태도로 인해 그 사람은 교회에서 출교된다(17절). (231.2)
 용서에 관한 두 번째 부분(21, 22절)에서 베드로는 그의 이웃을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묻는다. 질문 형식이긴 하지만, 베드로는 아마도 일곱 번이라는 그의 제안이 아주 관대한 것으로 간주했던 것처럼 보인다. 특별히 랍비들이 사람은 세 번 이상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결국 일곱 번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매우 많은 용서이다. (231.3)
 랍비 요세 벤 하니나(Jose ben Hanina)는 이와 같이 주장한다: “그의 이웃에게 용서를 간청하는 사람은 세 번 이상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랍비 요세 벤 예후다(Jose ben Jehuda)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한 번 죄를 범하면, 그들은 그를 용서한다. 그가 두 번째 죄를 범하면, 그들은 그를 용서한다. 만일 그가 세 번째 죄를 범하면, 그들은 그를 용서한다. 그들은 네 번째는 용서하지 않는다”(Barclay, 2:213 참고). (231.4)
 이런 판결에 대한 성경적 토대는 아모스서의 서두의 장들에서 발견되는 데, 랍비들은 그 책에 자주 되풀이되는 여러 국가들의 “서너 가지 죄들”이라는 구절을 보고 하나님의 용서의 한계는 세 번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처럼 베드로는 보통이 넘는 이례적인 관대한 조치로서 유대인의 할당량의 두 배에다 덤으로 한 번을 더 보탠다. 그는 의심할 나위 없이 그의 은혜로움에 대한 따스한 칭찬을 기대한다. 여타의 제자들 앞에서 가이사랴 빌립보(16:17-19)에서 그가 받았던 축복에 대한 생각이 여전히 그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있다. 결국, 겸손의 주제에 관하여 최근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여전히 자신을 그 왕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될 수 있는 선두 주자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의 관대한 답변이 저 위대함에 대한 또 다른 증거라고 생각한다. (231.5)
 예수께서는 두 부분으로 베드로에게 답변하신다. 첫째, 예수께서는 바른 수효는 일곱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 혹은 490번이라고 말씀하신다. 자, 그것은 많은 용서(그것이 단순히 70×7번일지라도)이다. 너무 많아서 491번째 범죄(혹은 78번째라 하더라도)에 도달하기 전에 잘못 세기가 십상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용서의 산술법에 관한 교훈을 가르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용서에는 제한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셨다. (232.1)
 이것은 베드로가 기대한 답변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실로 그리스도인 사랑과 관용의 확대가 아니라 그것의 제한에 더욱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어느 시점에서 선한 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나의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중지할 수 있을지 알고, 언제 내가 사랑과 용서에 대한 나의 도덕적 할당량을 채웠는지 앎으로써, 내가 명민한 양심을 가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받아 마땅한 것을 받도록 할 수 있다면 안심이 가는 일이다. 베드로의 질문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너무도 인간적인 질문은 “언제 내가 그만 두어도 될 수 있는가? 언제 내가 내 감정을 폭발시킬 권리를 갖는가?”이다. (232.2)
 좌절을 안겨주는 예수의 답변은 그런 때는 결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관용과 용서에는 한도와 제한이 없다. (232.3)
 예수의 답변의 두 번째 부분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 주어진다(23-25절). 그 비유는 세 주요 등장 인물—왕(하나님), 믿지 못할 만큼 큰 빚을 용서받은 종(나), 그리고 첫 번째 종에게 비교적 극소액의 빚을 진 한 종(나의 이웃)—이 있다. (232.4)
 그 비유는 세 가지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장면에서, 첫 번째 종은 왕의 알현실에 불려갔고, 거기서 거대한 빚을 용서받는다. 두 번째 장면은 최근 용서를 받은 그 종이 거리에 있는 것을 보여 주는데, 거기서 그는 그가 용서해 주기를 거절하는 비교적 소액의 빚을 진 한 이웃을 만난다. 세 번째 장면에서, 그 무자비한 종은 그가 청산하기 불가능한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지옥)에 던져진다(34절). (233.1)
 그 이야기가 가르치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하셨듯이 용서성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33절). 우리는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35절). 앞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6:15)고 말씀하신 산상설교에서 그 동일한 교훈을 발견했다. (233.2)
 그 비유를 완화시키거나 그 비유의 첨예한 대조들이 왜 진짜일 수 없는지 설명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의 광대함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에게 대하여 그가 기대하시는 자비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은 바로 이런 대조들이다. (233.3)
 10,000달란트 빚(24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 즉 6,000일치 임금에 해당한다(20:2). 오늘날 시간당 최소 임금 4.25 달러를 받는 사람이 여덟 시간을 일한다면, 1달란트는 204,000달러가 될 것이며, 10,000달란트는 그 총액이 2,040,000,000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될 것이다. 그에 비해서, 100데나리론의 빚은 100일분 임금 혹은 3,400달러일 것이다. 그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100데나리온의 빚을 일을 해서 갚으려면 100일이 걸리지만, 10,000달란트를 일해서 갚으려면 164,384년(1주일에 7일씩 일하는 것으로 계산해서)이 걸릴 것이다. 그 비유에 나오는 적은 빚은 극소액인 반면에 더 큰 빚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결국, 갈릴리 지역의 l년 예산은 고작 300달란트에 불과했다. (2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