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사무엘 상∙하 제 Ⅳ 부 다윗: 정상까지 올랐다가 내려옴 (삼하 2-12) 제 8 장 이스라엘에서 세력을 잡음 (삼하 2-6)
 그러나 다윗의 외교 노력은 분명히 지리적 불리함과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의 움직임 때문에 진척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유다를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 위에 왕으로 세웠다. 야베스처럼 요단 동편에 있는, 그리고 야베스와 유다 사이에 있는, 마하나임을 본거지로 삼았다. 그러므로 야베스가 다윗을 지지하려고 한들 아브넬과 이스보셋이 문자 그대로 중간에 끼여서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215.1)
 이스보셋은 단지 아브넬의 야심의 앞잡이인 얼굴 마담처럼 보인다. 어떤 학자들은 이스보셋이 무능했다기보다는 그저 나이가 매우 어렸다고 생각한다—2:10에 언급된 것처럼 마흔 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울의 통치 초기의(삼상 13:1) 문제성 있는 연대기는 저자의 연대기 정보가 항상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가 아브넬에게 “내 아비의 첩” 리스바와 왜 동침했느냐고 아브넬을 비난한 것은 이스보셋이 어렸다는 것을 말해줄 수도 있다(3:7). 아마도 이스보셋이 나이가 들었다면 이미 리스바를 취했을 것인데, 아버지의 첩은 관습적으로 아들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다(압살롬과 다윗의 첩들의 관계와 비교하라: 16:21, 22). (215.2)
 이스보셋이 2년을 다스렸다는 것도 또 하나의 문제이다. 다윗이 7년 동안 헤브론에서 왕 노릇한 것과 관련해서(11절; 5:5), 이스보셋이 2년을 다스렸다는 것은 5년간의 오차다. 그 5년이 사울의 죽음부터 이스보셋의 통치까지의 공백인지, 아니면, 이스보셋의 암살부터 다윗이 온 나라의 왕으로 군림하기 사이의 공백이든지, 이것들 중 어느 것도 이야기의 흐름과 잘 조화되지 않는다. (215.3)
 보충 설명: 부끄러운 이름
 이스보셋의 이름 속의 “보셋”이란 말 뒤에는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있다. 역대상 8:339:39에 사울의 넷째 아들은 “에스바알”이지 “이스보셋”이 아니다. 그와 같이 요나단의 아들은 “므비보셋”이 아니라 “메립바알”이다(대상 8:34; 9:40; 비교 삼하 4:4). 이 이름의 변화에 대한 가장 인기 있는 설명은 히브리어 바알의 바뀐 운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215.4)
 원래 바알(baʽal)은 호세아 2:6에서 사용된 것처럼 “주” 혹은 “주인”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동일한 이름을 가진 가나안의 다산(多産)의 신(神)과 관련되기 시작하면서 이 단어는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원들이 동무(comrade)라는 말을 망가뜨리고, 동성연애자들이 게이(gay)라는 말을 망가뜨렸듯이, 가나안 사람들이 바알(baʽal)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여 다른 이들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곤란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사무엘하의 초기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경건한 서기관들이 바알(baʽal)을 보솃(bosheth)으로 바꾸었다. 보솃(bosheth)은 “수치”라는 뜻이다. 이것은 독자들에게 이스보셋므비보셋의 이름의 한 쪽이 부끄러운 이름인 바알(baʽal)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216.1)
 역대기 저자의 명단은 이런 운명을 피하였다. 심지어 사무엘하의 어떤 지명들처럼. 유별난 것은 사무엘하는 다윗이 여호와를 부를 때에 바알이라고 부른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있다. 블레셋을 쳐서 이긴 후에,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 앞에서 내 원수들을 깨뜨리셨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 장소는 바알브라심(Baʽal Perazim, 5:20)이라고 불리었다. 「새국제역」의 각주에는 “깨치고 나오신 주께서”라고 정확하게 번역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다윗을 구원하기 위하여 깨치고 나오신 바알이었다. (216.2)
 평범한 단어들에서 고유한 이름이 되는 과정은 성경에서 중요한 두 다른 단어(그리스도사단)들의 변천 역사에도 적용되었다. 원래 그리스도(Christ)는 헬라어 크리스토스(christos)에서 왔는데, 그것은 히브리어 마쉬아흐(mashiaḥ, “메시야”)를 번역한 것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면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단어였다. 그러므로 모든 “기름부음 입은” 제사장이나 왕은 그리스도(christ)이다. (216.3)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사단(satan, 사탄)도 원래는 단순히 “대적자”(“adversary”) 혹은 “비난자”(“accuser”)라는 뜻이었고, 보통 사람들을 일컬을 때에 상용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에돔 사람 하닷은 솔로몬을 대항한 “사단”(대적자)이었다(왕상 11:14).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도 역시 그러했다(23, 25절). 사단(satan)이 이미 인간 이상의 존재로 나타나고, 영어에서 대문자 S로 시작하는 사단(“Satan”)이 되어 가는 도중의 존재를 가리키는 구약의 세 문맥에서, 그 원래의 “대적적”인 요소는 분명히 나타나 있다(대하 21:1; 욥 1:6-12; 2:1-7; 슥 3:1,2). (216.4)
 오늘날, 바알, 그리스도, 그리고 사단은 너무 그 뜻이 분명하여 원래의 “평범한” 의미로 사용했다간 오해를 피할 길이 없다. 그와 같은 이유로 경건한 서기관들이 에스바알에게 새로운 이름 이스보셋을, 므립바알에게는 새 이름 므비보셋을 부여했다. (217.1)
 가족 문제(2:12-3:5)
 “다윗의 집”“사울의 집” 사이의 다툼은 양쪽에서 친적들이 주도하는 가족적 사건이었다. 사울의 사촌 아브넬(삼상 14:50)과 다윗의 조카 요압, 즉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대상 2:16)은 공식적인 대결과 같이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양편에서 12명씩 나와 무서운 정확성으로 엉겨붙었다. 각자가 상대의 머리를 잡고 단검으로 찔렀다. “그들 모두가 땅에 쓰러졌다”(2:16). (217.2)
 그것을 뒤이은 전쟁에서 요압의 사람들은 이겼는데, 그들은 19명을 잃고 베냐민 사람들은 360명을 잃었다(30, 31절).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손실은 요압의 아우 아사헬의 죽음으로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따로 언급해야 하였다. 아브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사헬은 그를 바짝 좇았다. 결국은 아브넬이 창으로 그의 배를 뚫었다(18-23절). 해질녘에 요압과 아브넬은 휴전하기로 하였다. 군사들은 집으로 갔다. 그러나 요압은 아사헬의 죽음을 계속 기억할 것이었다. (217.3)
 3장은 두 집안의 “오래된” 전쟁에 관한 언급 즉 “다윗은 점점 강하여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가니라”(1절)로 시작한다. 그리고 저자는 헤브론에서 태어난 다윗의 여섯 아들들을 열거한다(2-5절). 매 아들은 다른 처에게서 태어났다. 여섯 중에서 셋—암논, 압살롬, 아도니야—만 다윗 집안의 계속되는 역사에 등장한다. 이 세 사람은 다윗과 그의 나라에 각기 다른 모양으로 고통을 가져다줄 것이었다. (218.1)
 아브넬과 이스보셋(3:6-21)
 3:6에서 저자는 사울의 집에 초점을 맞추면서 아브넬이 “세력을 강하게 한다”고 말한다. 분명 이스보셋을 등에 업은 것이다. 사울의 첩 리스바와 동침한 것 때문에 이스보셋의 추궁을 받자 아브넬은 불끈 나서서 이 왕국을 다윗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9절) 그를 위하여 이루겠다고 선언한다. 이스보셋의 비난이 사실인지를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그는 간섭할 힘이 없었고, 아브넬을 너무 두려워하여 그에게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11절). (218.2)
 아브넬은 몰락하는 사울의 집과 함께 하기보다는 다윗 편에 서려고 하였다. 그는 다윗에게 사자를 보내어 “언약을 자르려고”(히브리어의 문자적 의미) 했다(12절). 다윗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갈을 데려오라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13절). 다윗은 사자들을 이스보셋에게 보내어 같은 요구를 전했다. 이스보셋은 미갈을 그녀의 남편 발디엘에게서 빼앗아 오라고 명하였다(15절). 그러나 우는 발디엘을 집으로 가라고 명령한 사람은 아브넬이었다(16절). 요컨대, 아브넬과 이스보셋 두 사람은 사울 집안의 통치를 끝내려고 협력하고 있었다. (218.3)
 아브넬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관한 그의 과제를 다 했다. 20명의 동행을 받으면서 그는 다윗에게 돌아가 연합의 세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보기 좋았다. 다윗은 아브넬과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브넬은 이렇게 말하였다: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하게 하고 마음의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성경은 그가 “평안히” 길을 떠났다고 말한다(21절). (218.4)
 요압의 복수(3:22-39)
 아브넬이 떠나자 바로 요압이 공격에서 돌아왔다(22절). 그는 다윗이 아브넬과 맹약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였고, 다윗에게 그의 심정을 이야기했다(24, 25절). 아브넬은 요압이 말한 것처럼 나쁜 사람이었는가?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요압은 온 나라를 위하여는 좋은 이유 때문에 아브넬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어쨌든 요압은 사자들을 보내어 아브넬을 붙잡았다. 요압은 “종용히 말하려는 듯이 저를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를 인함이더라”(3:27). 성경은 다른 이유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2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