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사도는 옛 제도의 속죄제로부터 설교적 교훈을 이끌어 낸다(11-13절). 피가 성소 안으로 들여졌을 때(제사장들이 성소 안에서 제물의 일부분을 먹었던 것같이, 때로는 다른 절차가 뒤따랐다. 실례로 레위기 6:24-30을 보라). 동물의 시체들은 진영 밖에서 사뤄졌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시고 “영문 밖에서” 돌아가셨다고 바울은 시사한다. (264.2)
 영문 밖이란 말은 사막에서 방황하는 지파들과 관련하여 구약에 여러 번 나온다. 그것은 문둥이들이 배회하였고, 범죄자들이 처형되었으며, 속죄제로 사용된 동물의 시체들이 사뤄지던 부정한 장소, 이별과 죽음의 장소를 시사한다(레 13:46; 24:14; 신 23:14). (264.3)
 그리고 그곳이 바로 예수께서 돌아가신 곳이다! 성전 안에서도 아니고, 희생 제물들을 위하여 성별된 장소도 아니고, 심지어는 거룩한 도성의 경내(境內)도 아니었다. 오히려 범죄자들이 처형되었고, 문둥이들이 배회하였고, 동물의 시체들이 사뤄지던 그 불경스런 땅, 그 부정한 장소에서, “성문 밖에서” 돌아가셨다. (264.4)
 오, 우리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의 경이(驚異)여! 우리의 제사장—예수님—을 바라보라. 그를 위한 어떤 화려한 의복도 없었고, 랍비들의 학문에 대하여 배우지도 않으셨고, 심지어는 제사장이라 주장할 수 있게 하는 혈통도 없으셨다. 우리의 제사장은 가문도, 후견인도, 소유도, 어떤 인간 후원자도 없으셨고, 오로지 자신뿐이셨다. (264.5)
 그리고 그의 희생을 보라! 인민 재판(kangaroo court)에 끌려 다니셨으며, 조롱과 굴욕의 대상이 되셨으며, 심지어는 그를 따르는 비천한 추종자들에 의해서도 버림을 받으신 그는 로마인들에 의하여 처형되어 중죄인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죄를 위한 하나님의 제물이셨으며, 자기 자신이 제사장이요, 자기 자신이 희생 제물이셨다. (265.1)
 그러면 그의 성전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시온 산에 있는 어떤 황금빛 건물이나 대교회당이나 궁전을 가리킬 수 없다. 그는 구유에서 탄생하셨으며, 그는 아무런 성전을 가져 보지 못하셨다. 그러나 그의 성소는 지상 성전들이 그것의 희미한 모형에 불과했던 참된 성소, 진정한 성소이다. (265.2)
 그러므로 사도는 “영문 밖으로” 나가서 그와 합류하자고 말한다. 우리는 이제 지상 성전의 부분이 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에게 속한다. 거기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심오한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다. 예수께서 불경한 장소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는 이 지상의 성전들과 성소들의 모든 분리들을 제거하셨다. 그의 십자가가 모든 “영문 밖”—모든 세속적 장소—을 거룩하게 하였다. 그는 진영 밖에 그의 십자가를 세우심으로써 이 모든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셨다. 우리는 더 이상 성(聖)과 속(俗)으로 분리된, 두 칸으로 된 세계에 살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우리의 모든 행위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265.3)
 그리하여 15-16절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는 거룩하며, 따라서 우리 모두는 제사장들이며, 찬양과 선행의 제물들을 드린다. (265.4)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사도는 그 “도성”을 언급한다(14절).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시온 산, 곧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렀다”고 사도가 말할 수 있었던 12:22와는 달리, 여기서 그는 “우리가 장차 올 한 도성을 고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우리가 도달하였으나,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265.5)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이미(already)”“아직 아니(not yet)”의 긴장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고, 이미 그는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이미 그는 우리를 위하여 하늘 성소로 들어가는 문을 여셨고, 이미 그는 우리를 우리의 부정에서 정결케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우리의 최종적 본향으로 가는 도상에 있는 나그네들이요 순례자들이다. 우리가 도착하였으나, 아직 우리는 그 도성을 보지 못하고, 아직 우리는 그 성전을 보지 못하며, 아직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오직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보지만, 그러나 아직 아니다. (265.6)
 그 도성은 하나님의 안식과 같다(3:7-4:13). 그 안식은 이미 있고, 안식일은 그것에 대한 하나의 예증이지만, 그 충만한 안식은 아직도 우리 앞에 놓여 있다. (266.1)
 사실, 신약 전체가 이미/아직 아니(already/not yet)라는 그 동일한 긴장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일찍이 “나라(kingdom,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것을 발견하는데, 거기서 어떤 본문들은 현재의 나라(왕국)를, 다른 본문들은 미래의 나라(왕국)를 가리켰다(예컨대, 마 5:3; 6:10; 25:34; 눅 17:21). (266.2)
 축복과 고별
 사도의 축도(20-21절)는 특별히 이 설교에 적합한 것 같다. 이 축도의 전반부는 “영원한 언약의 피”에 대한 언급으로써 이 문서[히브리서]의 신학을 반향하는 한편, 나머지 부분은 독자들의 생애 가운데 이루어지는 이 신학의 실현을 가리키고 있다. (266.3)
 형태에 있어서 우람하고, 언어에 있어서 장엄하고, 개념에 있어서는 기본적인 이 축복은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힘있게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의아해 한다-이 축도는 저자가 성령의 감동을 받았을 때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인가, 아니면 이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는 축복을 여기서 활용한 것인가? (266.4)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저서들 중에서 축도에 관한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후자의 가능성 쪽으로 기울어진다. 이 놀라운 설교 전체를 기록한 사람이 13:20-21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도 확실하지만, 나는 그가 왜 이 늦은 시점에서 두 개의 사상들—그리스도의 부활과 목자/양의 주제—을 소개하는지에 대하여 의아(疑訝)해 한다. 이 사상들 중 어느 것도, 비록 그것들이 신약의 다른 기록들에서는 흔히 있는 것이지만, 히브리서에는 다시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사도가 기존의 축도를 인용했거나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예전(禮典) 언어를 도입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266.5)
 마치는 절들(23-25절)에 이르러서야, 신약 서신의 특징인 개인적 안부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이 책 전체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바꾸지는 않는다—그것은 “권면의 말씀” 곧 설교이다. (267.1)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설교인가! 개인적으로 나는 이 말씀이 설교되는 것을 듣기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리고 나는 그 사상들이 오늘날 온 땅의 설교단들에서 울려 퍼지는 것을 얼마나 듣고 싶어하는지! (267.2)
 나의 소망과 나의 기도는, 히브리서에 대한 이 연구가 그 책의 영광들을 파악하고 열어 주기에 미흡할지라도, 이 설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불을 지피기 위해 그 나름으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설교자들이 그처럼 믿음을 북돋우고 그처럼 시대에 맞는 히브리서의 기별들을 취하든지 않든지 간에-우리 각자는 그것들을 접하고 있다-우리는 그 설교를 가지고 있고, 성경을 가지고 있다. 우리 각자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기를 바란다. (267.3)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의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26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