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우리를 건드리지 않은 채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우리는 그 교사(Teacher)에게로 더 가까이 나아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물러나서 비참하게 된다. 우리는 존 버년(John Bunyan), 헬렌 켈러(Hellen Keller)와 같은 사람이 되거나—아니면 무신론자가 된다. (254.3)
 오, 얼마나 아름다운 도성인가!
 히브리서 12:14-24는 우리의 위대한 특권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면전의 영광스러운 미래로 가는 도상(途上)에 있는 순례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기뻐할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구원은 우리의 앞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다! (255.1)
 이 부분의 세 문단은 두 줄기의 생각을 전개한다. 첫 번째 것인 14-17절에서 우리는 부정적 예(例)로부터 우리의 특권들에 대하여 배운다. 에서는 영적 얼간이였다—그는 정말로 중요한 것을 그저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그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었다. 하나님을 바라고 미래를 내다보는 어떤 것으로서의 믿음에 대하여 말한다면—에서는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 그의 삶은 여기—지금[現世]에 있었다. 그의 배를 채우는 것은 장자권의 어떤 모호한 축복보다 그에게 더 큰 의미가 있었다. (255.2)
 그러므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그리고 우리에게—경고가 큰 소리로 분명하게 다가온다. 저 위대한 구원을 기억하라. 예수님을 기억하라. 하나님이 그대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것을 기억하라. 그리하여 그대의 우선 순위들을 순서대로 놓아라. (255.3)
 에서에 대한 사도의 취급은 6:4-610:26-31의 그의 강한 말씀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세 구절 모두에서 우리는 어떤 귀중한 것을 상실한다는 것과 그것이 영원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할 수 없나니”(6:4, 「개역한글판」은 6:6),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10:26)라는 말을 우리는 일찍이 들었다. 이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13:17)라는 말을 듣는다. (255.4)
 우리는 이 구절들의 각각에서 동일한 취지를 발견한다. 비록 12:16-17이 셋 중에서 가장 짧은 것이긴 하지만, 그 사상은 앞서 취급된 두 개와 동일하다. 6:4-6은 예수님의 구원에 수반된 높은 특권들에 초점을 맞추고, 10:26-31은 만일 우리가 그의 구속적 죽음을 멸시한다면 이르게 될 심판의 확실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에, 12:16-17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 축복들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으면 그것을 틀림없이 상실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255.5)
 에서의 서글픈 예와는 대조적으로, 그 다음의 두 문단은 예수께서 가져오신 축복들을 탁월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는 그가 앞서 강조했던 요점들을 단순히 반복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 요점들을 대단한 힘과 미(美)를 지닌 한 예증 속에 모은다. 접근, 확신, 피, 언약, 우월성—첫 열 장에서 세부적으로 발전된 이 놀라운 사상들이 다시 나타나지만, 지금은 더 좋은 도성, 새 예루살렘이라는 주제 아래 함께 묶여 있다. (256.1)
 서로 인접한 두 문단의 지배적인 사상은 예수님이 갖다 주신 하나님을 향한 완전하고도 방해받지 않는 접근이다. 바울은 출애굽기 19- 20장에 있는 율법 반포의 이야기를 들추어 그것의 두려운 측면들을 강조한다—어둠, 암울, 그리고 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찌른 말씀들; 나팔의 울림; 그리고 특히 거룩한 산을 침범하지 말라는 금령(심지어는 동물까지도 산을 오르면 돌로 쳐죽여야 했다), 등등. 모세 자신도 두려움으로 떨었다. (256.2)
 시내 산에 대한 이 묘사는 구약에서 끌어온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흔히 제시하는 것들과는 예리한 차이가 있다. 주께서 친히 모든 개인과 모든 사회의 근간이요 기초인 도덕법을 발표하셨을 때, 우리는 그 사건의 위엄과 장중함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256.3)
 시내 산에 대한 두 그림은 모두 정확하다. 둘 다 동일한 사건에서 나오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전 설교를 관류(貫流)하고 있는 옛 것과 새 것을 비교하고 대조하는 양상과 부합하는 그 장엄한 사건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retelling)이다. 우리는 히브리서의 서두 문단에서 그 공식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여기서 다시 본다. 옛 것은 나쁘지 않다—결국,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그러나 새 것이 더 좋다. 그러므로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무서운 광경과 소리 배후에 계셨다(비록 그가 “말씀하시는 음성”으로 완곡하게 언급되긴 하셨지만). 그러나 시온 산, 곧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환영하신다. (256.4)
 더 좋은 도성에 대한 묘사는 거룩한 기쁨으로 뛰면서 노래한다. 무수한 천사들은 죄된 혹성(惑星)으로부터 구원받은 남녀들과 함께 하는 하늘의 예배를 함께 드린다. 그들은 사랑의 왕의 종들로서 함께 교제를 나눈다. 그리고 지구에서 온 이 사람들—그들은 구석에 앉거나 저 위에 시야가 잘 안 보이는 발코니의 좌석에 앉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그들은 “완전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이 제공하신 영광스러운 구속에 의하여 다시 온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배적인 주제인 ‘접근’ 사상이 8:1-10:18에서 보인 온전케 하고/정결케 하는 유익과 결부된 것을 보게 된다.) (257.1)
 그리고 이 찬양의 장관(壯觀) 한가운데에 예수님이 서 계신다! 그는 죄의 용서와 부정(不淨)의 정결을 가져오신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그의 뿌려진 피는 수백만의 동물 희생 제물들이 우리를 위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것을 이루는 능력을 가졌다. 예수님은 그 한가운데에 계신다. 왜냐하면 그분에 의하여, 그리고 그분 안에서만 우리가 하늘 도성의 경축 행사에 참여할 권리를 얻기 때문이다. (257.2)
 그의 피는 말한다! 그것은 “더 좋은 말씀”을 한다! 소망의 말씀. 위로의 말씀. 정결의 말씀. 능력의 말씀. 환영의 말씀. (257.3)
 율법은 시내 산으로부터 말하고, 그 말씀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제외시킨다. 율법—거룩하고, 의롭고, 선한—은 하나님의 표준, 곧 그의 요구를 제시한다. 그 목표가 우리의 가능성 너머로 너무나 멀리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보고 경탄할 뿐이고, 실망 중에 돌아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일은 우리의 상실됨, 우리의 소외됨, 우리의 실패, 우리의 부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257.4)
 그러나 예수님의 피를 통하여 우리는 더 좋은 말씀을 듣는다. “자녀들아, 본향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너희는 여기에 속한다! 하늘의 예루살렘에 온 것을 환영한다. 땅에서는 나그네요 순례자들이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기들을 통하여 고대해 온 도성에 온 것을 환영한다. 천사들의 찬양대로 환영한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끝없는 즐거움이 있는 곳으로 환영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한다—예수님의 피를 통하여 환영한다.” (257.5)
 히브리서 12:18-24는 성경 전체 가운데서 가장 감동적이고 찬란한 구절들 중의 하나를 제시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언급하는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하고, 설교자들도 그것을 주석하려고 거의 노력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을 소홀히 하는 이유는 모호하고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정말이지 그것은 어렵다—만일 그 책의 나머지 부분으로부터 격리시켜 그것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정말 어렵다. 그러나 독자들이, 저자가 시작한 1:1로부터 시작하여 히브리서 전체를 훑어 내려간다면, 그는 친숙한 사상들이 거기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들은 설교 전체의 주된 신학적 주제들인데, 이것들은 큰 힘과 미(美)를 가진 하나의 최종 구조물에 함께 모아져 있다. (258.1)
 하지만 12:18-24로부터 오는 하나의 질문은 아직도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도가 어떻게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은 이미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렀고, 천사들의 환희에 찬 모임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전 설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4:14);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8:1);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10:19); 그리고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0:22). (258.2)
 그의 생각의 열쇠는 11장에서 온 위대한 사상—믿음—이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붙들며, 믿음은 미래를 보증한다. 예수님이 실제 인물이듯이 그가 봉사하시는 하늘 성전도 그렇고, 하늘의 예루살렘도 그렇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 성전에 들어가며, 우주의 왕의 면전에 나아간다. 그리고 믿음으로 우리는 이미 거룩한 도성의 예배에 참여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258.3)
 믿음이 어떻게 관습적인 척도를 뒤집어엎어 놓는지를 살펴 보라. 우리의 감각의 증거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아라비아의 산은 진짜라고 하지만, 믿음은 “아니”라고 한다! 진짜는 우리가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진짜는 시온 산이다. (25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