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 다니엘은 누구인가?
 다니엘과 그 시대
 예수님은 십자가 수난이 있기 전인 화요일에 제자들을 감람산에 모으시고 세상의 마지막 사건들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600년 앞서 살았던 다니엘이 남긴 이야기를 환기 시키시면서 그를 “선지자 다니엘”이라고 호칭하셨다(마 24:15). (11.1)
 실로, 다니엘은 예사 선지자가 아니었다. 그는 특별한 선지자였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에스겔은 교수와 설교로 평생을 보낸 선지자들이었다. 이를테면. 그들은 “목사” 선지자들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평신도” 선지자였다. 십대 후반에 바벨론으로 잡혀간 그는 그 곳에서 정치가와 정부 고문(政府顧問)으로 장년의 생애를 보냈다. 그의 문장에 돋보이고 있는 실용성(實用性)은 날마다 복잡 다단한 국제 정치 사건을 다루어야 했던 그의 경험의 결과였다. 하나님이 한 포로 소년을 높이시어 그를 사로잡아 온 왕의 모든 “박사들”의 어른이 되게 했다는 이 간결한 이야기는 읽는 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는다. (11.2)
 다니엘은 기원전 622년경에 팔레스타인의 지배 계층의 가계(家系)에서 출생하였다. 다니엘은 청소년기를 유대 땅에서 보내고 장년기를 바벨론 땅에서 보냈다. 그는 자신의 생애 전체를 오늘날 세계의 이목을 모으고 있는 중동 땅에서 보낸 것이다. (11.3)
 지도를 보면, 유대 땅은 지중해의 동해안에 위치해 있다. 현대의 이스라엘이 점유하고 있는 영토의 남반부에 해당하는 면적이었다. 바벨론은 유프라테스 강 연안에 위치하였으며, 이라크의 현(現)수도인 바그다드에 가까왔다. 쌍동이 강(江)이라 할 수 있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가 동부의 산악지역과 서부의 사막 지역 사이의 광활한 평원을 관류하였는데, 그리하여 이 평원을 양하 사이(兩河間)의 지역 곧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Meso; 사이, 間, potam; 河川)라 부른 것이다. (11.4)
 다시 지도를 놓고 눈길을 유대 땅으로부터 시작하여 지중해 동해안을 북상하여 올라가서, 다시 유프라테스 강을 가로질러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따라 남하하여 페르시아만(灣)에 이르러 보자. 이로써 하나의 반월형(半月形)의 윤곽이 형성된다. 반월형의 이 지역은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산악과 사막 지역과는 대조적으로, 농경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리하여, 이 지역은 그 비옥함과 이러한 모양 때문에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성경에 그 이름이 두드러진 앗시리아 제국이나 바빌로니아 제국이 모두 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 안에서 혹은 그와 인접하여 세워졌던 왕국들이다. 실상, 바빌로니아의 영토는 한창 그힘이 왕성할 때라 해도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벗어나 본 일이 없다. 그러나,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왕들은 자신들이 통치하던 영토가 마치 세계의 전체라도 되는 듯이 호언하였다. 이 점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다. (11.5)
 오늘날에도 “세계”라는 용어가 항상 “지구”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렵지 않게 사용하는 사업계(事業界), 음악계(音樂界), 신세계(新世界) 등의 용어들이 모두 그러하며, 이 밖에도 제 3세계, 먼세계, 이 세상, 저 세상 등 그 용례를 수없이 헤아릴 수가 있다. 글도 모르고 또 외부의 세계로부터 폐쇄된 채 사는 사람들에게는 온 세상이라고 한다 해도 자기가 살고 있는 고립된 마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12.1)
 다니엘이 태어나던 시기는 천하가 요동하던 대격변의 때였다. 300년 이상이나 초승달 지대를 지배해 왔던 앗시리아 제국의 무자비한 악정(惡政)이 그 종말에 다가서고 있었다. 세계 재패의 새로운 도전자는 바벨론이었다. (12.2)
 엄격히 말해서 바벨론은 인접한 소도시들을 거느린 일개 도시 혹은 도시 국가였다. “바벨론”이란 이름 말고도 “아카드”(Akkad) “갈대아 인의 땅” 등의 이름들이 있었다. 영걸한 사냥꾼으로 이름이 높았던 니므롯(Nimrod)이 이 도시를 건설했으며(창 10장), 그 유명한 바벨탑이 자리했던 곳이다(창 11장).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오던 때 보다 3세기 반이 나 앞서는 기원전 1800년경에 이 도시는 위대한 입법자 함무라비 대왕의 영도하에 패업을 이루고 있었다. 함무라비(Hammurabi) 대왕의 사후(死後), 바벨론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여러 다른 도시 국가들의 힘에 밀려 무력하게 되었다. 그 후, 바벨론은 그 주변의 여러 도시 국가들과 함께 앗시리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다니엘의 출생시인 기원전 626~612년 간에, 바벨론 왕 나보폴랏사르(Nabopolassar) 쇠잔해 가는 앗시리아의 세력을 분쇄하고 신(新) 바벨론 제국을 창건하였다. 그의 아들 네브카드넷자르(Nebuchadnezzar) 2세의 치세 중에 신 바벨론은 그 황금 시대를 맞이하였다. (12.3)
 다니엘(書)에 등장하는 느부갓네살 왕이 바로 네브카드넷자르 2세인 것이다. 이 왕의 바벨론 원명(原名)은 나부 쿠두리 우수르(Nabu-Kudurri-usur)로서, “나부 신에게 보호를 기원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다. (12.4)
 신 바빌로니아는 느부갓네살의 전성 시대에도 한때 앗시리아가 통치했던 오리엔트 지역 전체를 장악하지 못했다. 앗시리아를 무너뜨리는 일에 갈대아 인들과 연합 전선을 형성했던 메디아 인들도 계속해서 자신들의 자주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니엘 시대의 중동은 이집트, 리디아, 메디아, 바빌로니아(갈대아 족) 등 4강(四強)의 세력이 각축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생시에는 분명히 신 바빌로니아가 그 패자(題者)의 위치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사후(死後)에는 메디아의 세력이 크게 신장하여 . 이 웃의 페르시아를 병합하여 메디아-페르시아 연합 제국을 형성하고, 이어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와 리디아를 차례로 정복하여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하였다. (12.5)
 다니엘이 아직 소년이었을 때, 이집트는 여전히 강대국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니엘의 조국인 유대는 바빌로니아의 침공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기 위하여 이집트와 군사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605년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유다 왕 여호야김으로 하여금 이집트와의 동맹을 파기하게 하고 대신 바빌로니아와 군사 동맹을 체결케 하였다. 그러 나, 느부갓네살이 회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호야김은 이집트와의 옛 동맹 관계를 재개하였다. 중동 지역의 국제 외교는 당시에도 상당히 불안정하였다. (12.6)
 느부갓네 살은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예루살렘을 침략하였으며, 회수를 거듭할수록 그의 징계는 가혹해 갔다. 앞서 언급한 첫 원정 때에, 그는 솔로몬이 세운 웅장한 성전의 보배로운 기명들을 많이 탈취해 갔다. 뿐만 아니라, 유능한 청년들을 엄선하여 포로로 잡아 갔다. 기원전 597년에 있었던 제2차 원정을 맞고 여호야긴 왕은 바벨론에 대한 반역을 포기하고 느부갓네살에게 굴복하였다. (12.7)
 이 때에도, 느부갓네살은 상당량의 성전 기물들을 약탈하였으며, 1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사로잡아 갔다, 그 후 유다왕 시디기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느부갓네살은 세번째로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기원전 586년에 드디어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고 성전을 파괴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그땅의 “빈천한 자 외에는” 거의 모든 거민들을 사로잡아 갔다(왕하 24:25). (13.1)
 에스겔 선지자는 느부갓네 살의 제2차 예루살렘 침략때에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으며, 다니엘은 첫 원정 때 포로로 잡혀 갔다. (13.2)
 느부갓네살은 그가 정복한 다른 나라들에서도 많은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이주시켰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최소한 “70년이 차면” 유다의 포로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렘 29:10). 이 약속은 다니엘이 70년의 기한이 거의 마쳐지는 “고레스 왕 원년(B.C. 538/537)까지 있으니라”고 한 말씀을 상기 시키고 있다(단 1:21). (13.3)
 고레스(키루스) 대왕은 바빌로니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메디아—페르시아 제국을 세운 정복 군주(征服君主)이다. 그의 통치를 받았던 여러 민족들에게, 고레스 왕은 언제나 선한 왕으로 기억되었다. 그가 불시에 사망한 다음에도 수세기에 걸쳐, 그는 중동 전역에서 아브라함 링컨과 같은 이상적 인간상(人問像)으로 추모되었다. (13.4)
 고레스 왕이 바빌로니아를 패망시킨 후에 행한 최초, 최대의 선행은 바빌로니아에 잡혀 온 모든 포로들과 그의 후손들에게 그들이 원한다면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조서를 내린 것이었다. 이 같은 자유 조치는 유대 민족을 포함하여 느부갓네살에 의해 사로잡혀 온 모든 민족들에게 적용되었다. 고레스 왕은 이 밖에도 느부갓네살이 탈취해 온 여러 민족들의 신상(神像)들을 본 고장으로 돌려보내는 조치도 취했다. 신상을 섬기지 않는 유대인들에게는 이 조치가 곧 성전 기물들의 귀환과 국비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뜻했다. (13.5)
 이리하여, “고레스 왕 원년(元年)”은 유배 생활을 하던 모든 민족들과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해(年)였다. 죽지 않고 살아서 고레스 왕 원년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야말로 놀라운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다니엘의 수명은 고레스 왕 원년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묵시는 고레스 왕 3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으며(단 10:1), 당시 그의 나이는 87세에 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13.6)
 이 마지막 묵시에서, 하나님은 다니엘의 기록이 “마지막 때”에 가서 충분히 이해될 것이며,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다니엘은 “끝날”에 가서 자신의 “업”(業)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단 12:4, 13). (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