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11 장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완성된 언약
 대조적인 이상: 새 예루살렘과 바벨론
 “새 예루살렘”“바벨론”에 관한 요한의 이상은 인류를 위한 두 대조적인 단체와 운명을 묘사한다. 요한은 바벨론을 땅의 왕들과 음행하는 “큰 음녀”라고 묘사한다(계 17:1-2). 한 천사는 요한에게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계 17:1)고 청한다. 그리고 같은 심판의 천사가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요한에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계 21:9-10) 보여준다. (198.2)
 이 반대되는 단체의 이미지는 이스라엘의 언약 역사에 대한 선지자들의 기별에서 빌려온 것이다. 요한은 이사야 54장에스겔 16, 23장에서 이스라엘을 남편이신 야훼의 아내로 묘사하는 히브리 이미지를 차용하였다. 이스라엘은 “남편”이신 언약의 하나님과 결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음탕한 “창녀”가 되었다. (198.3)
 이제 요한은 이 놀라운 이스라엘의 이미지를 제도화된 그리스도의 교회에 적용한다. 이스라엘의 배도 역사는 교회 역사에서 세계적인 차원에서 반복될 것이다. 요한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배도를 기독교 교회의 배도에서 그 원형을 찾게 되는 경고의 표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선지자적 기별의 연속성과 신구약의 언약 이미지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것을 나의 다른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98.4)
호세아 시대로부터(BC 2-19, 20세기) 구약 선지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결혼의 결합(호 2:19, 20; 사 54:5)으로 비유하였다. 그들은 이방 나라들의 신들을 경배하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도덕적 배도를 “음행”“간음”으로 정죄하였다(호 6:10; 렘 3:1-3; 특별히 겔 16장; 23장). 이러한 배경이 음녀 바벨론에 대한 요한의 묘사를 분명히 설명해 준다. 그는 계시록 17:16에서 에스겔 16:37-39에서 빌려온 용어로 하나님이 바벨론을 멸하실 것을 묘사한다. 즉 이전에 바벨론을 사랑하던 이가 뜻밖에도 그를 멸하는 자가 된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계시록 17장을 이해하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16
(199.1)
 요한의 상징적인 언어들을 선지자들의 예언과 비교하면 우리는 그의 이상에서 괴로운 문제 제기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상들은 “통치 권세들”로부터 주권과 안전을 얻으려는 “타협하는” 교회를 따르지 말고 그리스도께 충성하기를 택하여야 하는 각 신자의 책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계 17:2; 롬 13:1 참조). (199.2)
 “바벨론”은 마지막 때에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고 있고 경배를 드리는 장소이다. 하나님은 하늘에서부터 마지막 호소를 한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계 18:45). (199.3)
 우리에게 우리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시키기 위해 요한은 일곱 재앙 중에 있을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정교하게 묘사한다(16장). 이 심판의 재앙들은 출애굽기에 기록된 애굽의 재앙들과 이사야와 예레미야에 기록된 역사적인 바벨론 멸망을 혼합한 것 이다.17 (199.4)
 요한이 이스라엘의 언약 용어들을 차용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의 약속들과 위협을 그리스도에 의해 실현하기 위하여 다시 활동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200.1)
 요한은 세계적인 바벨론의 멸망(16:12-21)과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21-22장)을 계시록의 예술적인 구도 속에서 균형을 맞추어 제시한다. 그는 먼저 “아마겟돈 전쟁”에서의 바벨론의 멸망을 묘사한다(16:16; 17:12-14; 19:11-21). 그리고 바벨론의 사망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영원한 영광과 극적으로 대조 하면서 제시한다. 종말을 지향하는 계시록에서 요한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22:4) 정결하게 된 지구에 세워질 “새 예루살렘”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모든 구속사의 우뚝 솟은 목표요 모든 언약의 약속의 클라이맥스이다. (200.2)
 계시록은 목회적인 부담을 갖고 있다. 그것은 그 책을 듣는 자와 읽는 자들이 모두 믿음으로 헌신한 하나님의 어린 양의 제자들이 되기를 초청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 양의 무리들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서 나온 144,000명의 진실한 이스라엘 사람들로 묘사한다(7:4-8). 그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14:4) 가기 위해 “시온 산”에서 어린 양과 합류한다. 이 영적 이스라엘은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계 14:1)을 갖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기 의로 말미암은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계 7:14) 하였기 때문이다. (200.3)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를 그들의 마음과 양심에 적용하는 모든 이들에게 새 예루살렘의 문은 넓게 열릴 것이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200.4)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이 “새 예루살렘”으로 불린다는 사실은 그 것은 다윗이 여부스 족속에게 빼앗아 “다윗 성”(삼하 5:7)이라고 선언하였던 예루살렘과 신학적 연속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 예루살렘은 모세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의 요약으로서의 다윗 언약의 완성을 상징한다. (201.1)
 요한은 그 도성의 문과 기초의 크기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12라는 숫자를 강조한다(21:12-17). 그는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12절)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새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옛 언약의 백성인 고대 이스라엘과의 영적 계속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14절)고 덧 붙인다. 그 사도들은 메시아적 언약 백성의 영적 선조들이다. (201.2)
 새 예루살렘은 옛 언약과 새 언약 아래의 이스라엘 하나님의 모든 진실한 제자들을 품어 안을 것이다. 모든 이들이 “미쁘신 조물주”(벧전 4:19) 하나님과 자기를 희생하신 아드님께 낭랑하게 메아리치는 화음으로 심령의 찬양과 감사의 경배를 드릴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계 15:2-3) 부른다. (201.3)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하나님의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라는 초청을 받아들인 “동서로부터” 와서 모든 세대에서 나온 헤아릴 수 없는 무리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마 8:11; 계 7:9-17; 19:7-9).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계 21:3-4)할 것이다. 땅은 그 원래의 아름다움과 목적으로 재창조될 것이고 하늘과 연합될 것이 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그의 기쁨과 평화로 가득찰 것이다. 화잇은 그것을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201.4)
대쟁투는 끝났다. 죄와 죄인들은 없어졌다. 온 우주는 깨끗해졌다. 오직 조화와 기쁨의 맥박만이 온 우주의 만물을 통하여 고동한다. 생명과 빛과 환희가 만물을 창조하신 분에게서 끝없이 넓은 우주로 퍼져나간다. 가장 작은 원자로부터 가장 큰 세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막론하고 조금도 흠이 없는 아름다움과 완전한 기쁨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포한다.18
(202.1)
 “새 땅” 전체가 “의의 거하는 바”(벧후 3:13) 구속받은 인류의 집이 될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성은 그들의 영원한 집, 곧 인류 역사에서 유일한 우주 도성이 될 것이다. (202.2)
 참고문헌
 1 Robertson, The Christ of the Covenants, 271.

 2 R. Bauckham, GOD Crucified (Grand Rapids, MI: Eerdmans, 1998), 46.

 3 Ibid., 54. 구약의 보좌 모티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Daegeuk Nam, “The ‘Throne of God’ Motif in the Hebrew Bible” (Ph.D. diss., Korean Sahmyook University, 1994), 444-65.

 4 참고하라. K. A. Strand, “A Further Note on the Covenantal Form in the Book of Revelation,” AUSS 21, no. 3(1983): 251-64.

 5 Ibid., 262.

 6 깊이 있는 분석을 위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R. M. Davidson, “Sanctuary Typology,” in Symposium on Revelation-Book II, D. & R. Com Series vol. 6, ed. F. B. Holbrook (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1992), 99-130.

 7 G. K Beale, The Book of Revelation: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M: Eerdmans, 1999), 235.

 8 E. G. White (MS 103, 1902); SDABC, 7:401에 인용.

 9 E. G. White (B.H, Jan. 26,1897); SDABC, 7:433에 인용.

 10 Strand, “A Further Note,” 264.

 11 R. Badenas, “New Jerusalem-The Holy City,” Symposium on Revelation-Book II, D. & R. Com. Series, vol. 7, ed. F. B. Holbrook (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1992), 264.

 12 Ibid., 265-266; 265쪽의 유익한 도표를 참조하라.

 13 See Roy Adams, The Sanctuary: Understanding the Heart of Adventist Theology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1993), 37-38.

 14 C. Feinberg “Tabernacle,” ZPEB, ed. M. C. Tenney (Gtand Rapids, MI:Zondervan, 1976), 5:583.

 15 E. G. White (RH, June 8,1897); SDABC, 7:434에 인용.

 16 Hans K LaRondelle, Light for the Last Days: Jesus’ Endtime Prophecies Made Plain in the Book of Revelation (Nampa, Idaho: Pacific Press, 2000), 152.

 17 마지막 재앙에 대한 표상학적 분석을 위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of the Bible (Sarasota, Fla: First Impressions, 1999), 제30장.

 18 E. G. White, The Great Controversy, 678.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