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2부—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제11장—종교개혁 시대의 안식일과 일요일
 종교개혁은 개신교 신앙의 출발이다. 개신교 신앙의 중요한 토론과 관습이 대부분 종교 개혁 시대에 이루어졌다. 이 점은 안식일과 일요일의 토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종교 개혁시대는 중세의 종교적 전통과 관습을 계승하였으면서도 이처럼 어떤 부분에서는 중대한 변화를 이루어낸 시대였다. 그리스도교의 예배와 관련하여 일주일 중에 어느 날이 제일 큰 날로 취급되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루터, 쯔빙글리, 칼빈 같은 주요 개혁자들은 일요일 신학이나 관습의 어떤 특정부분에 대해 다른 주장을 내놓았지만 대체로 중세의 일요일 신앙 관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일부 다른 개혁 그룹들은 주간의 제칠일을 하나님의 안식일로 지키는 고대의 방식으로 돌아감으로써 중세의 전통을 넘어서고자 하였다. 아래에서는 종교개혁시대에 나타난 안식일과 일요일 신앙 관습들과 그 토론들에 대해 간략히 다루고자 한다 (203.1)
 독일과 북부 스위스에서의 안식일과 일요일
 중세의 로마 카톨릭 신앙은 일요일의 준수를 위해 이중(三重)의 원칙적인 토대를 마련 했다. 그 하나는 안식일 계명이 아직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속력이 있다는 원칙이며 또 다른 하나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자신의 교권적 권위에 기초하여 성경이 안식일에 부가시켰던 모든 신성한 금지 규정을 일요일로 전가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두 번째 사실은 1563년에 종료된 트렌트의 반(反) 종교개혁 공회의(Counter-Reformation Council of Trent)에서도 카톨릭에 의해 재확인되었다.1 (203.2)
 일반적으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 그의 비텐베르크 대학의 동료들을 포함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우파적 개혁자들은 일요일 준수를 위한 로마 가톨릭의 이중적 토대를 전면적으로 배척했다. 이들은 신앙을 통한 구원만을 강조하고 종교의 형식주의를 배격하는 차원에서 중세기를 통해 일요일 준수에 부착되어진 여러가지 “안식일 준수”의 신학과 금지 규정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일요일 신앙의 관습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권에 의해 이루어진 제도라는 주장도 함께 배척하였다.2 (203.3)
 루터는 일찍이 1520년에 그 유명한「독일 민족의 기독교 귀족들에게 보내는 서한」(Address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을 통하여 중세 가톨릭 신앙에서 연유된 수많은 기념일들과 축제일등을 대폭적으로 축소시키도록 촉구하였다 즉 일요일만을 축제일로 남겨두고 그 밖의 모든 축제일등을 철폐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 루터는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생애의 끝까지 일요일을 기독교의 예배의 날로 중요시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태도는 일요일이 하나님에 의하여 예배일로 지정되었다고 믿는 어떤 신앙심에 기초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한때 그는 선언하기를 “비록 모든 날들이 하나 같이 자유롭고 열린 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위해 그 어느 한 날을 지키는 것은 유용하고 선하고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계를 질서있고 평화스럽게 다스리고 싶어하시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4 흥미롭게도 그는 이러한 주장을 하면서 십계명의 안식일을 언급하였다. “하나님은 노동을 위해 엿새를 주었으나 제칠일에는 종들과 심지어는 일하는 짐 승들에게 까지 쉬도록 요구하셨다”는 것이다.5 (203.4)
 루터는 그의 여러 글에서 구약 성경의 안식일과 안식일 계명 자체에 대하여 많이 언급하였다.6 그는 아담이 쉬었으며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쉬었던 날이 현재의 토요일인 제칠일 이라고 믿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창조주에게 존경을 표하는 날로 안식일을 지켰으며 타락 후에도 계속해서 안식일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십계명은 모세 이전에 제정된 것이고 오직 “특정한 민족(이스라엘)과 관련된 예식 법들만이 모세 시대의 법”이라고 하였다.7 그런데 참으로 이상스럽게도 루터는 논쟁적인 문맥에서는 자신이 다른 문맥에서 안식일을 강조했던 사실을 망각이라도 한듯이 안식일 계명까지도 예식법으로 분류하고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폐했다고 주장하였다. (204.1)
 루터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매 제칠일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지켰다고 믿었을 뿐 만 아니라 제칠일 안식일을 영원 자체의 예표로, 또는 영원한 시대가 이르기전에 성도들이 잠시 “잠자는” 시대의 예표로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안식일에 무덤에서 쉬고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모형으로 삼아 성도들이 “잠자는” 시대와 성도들이 영원한 삶을 누리는 시대 구분의 개념까지 만들었다. 그에 의하면 안식일로 예표되는 “잠자는 시대”앞에 여섯 시대가 있는데 아담의 때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까지가 그 기간이다.8 그리고 이 “잠자는” 시대의 다음에 영원한 시대가 이어진다. 그러나 루터는 또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이사야 66:23의 말씀을 “신약시대에는 시간에 차별 없이 모든 날이 안식일이 될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9 (204.2)
 루터는 안식일 계명 자체에 도덕적인 측면과 예식적인 측면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안식일의 “쉬라”는 명령 자체는 도덕적인 명령이고 안식일의 쉼을 주간의 특정한 날로 한정한 것은 예식적인 명령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어느날이든지 안식일로 지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1544년에 토르가우(Torgau)에서 행한 한 설교에서 루터는 강조하여 설명하기를 “우리 주님이 오신 이후로 우리는 자유를 갖게 되었다. 만약 안식일이나 일요일이 기쁘지 않다면 월요일이나 다른 날을 택하여 일요일로 삼아도 된다”고 하였다.10 뿐만 아니라 루터는 안식일 준수가 철저히 비 계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204.3)
 의심의 여지없이 안식일과 일요일에 대한 루터의 입장은 그의 비텐베르그 추종자들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루터의 가까운 측근인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on)은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이 설교와 공적인 예배를 위해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안식일 계명은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이 있는 계명이라 하였다.11 그리하여 안식일 계명의 특별한 목적이나 의도는 아직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충분히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식일 계명 안에 지명된 특정한 날 즉 제칠일이란 규정은 오직 고대 이스라엘에게만 관련되는 것이므로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은 제칠일 대신에 일요일을 지킨다고 하였다. 이처럼 멜랑히톤은 안식일 계명에 대한 루터의 입장을 다소 강화시켰다고 볼수 있다. (205.1)
 루터의 비텐베르그 대학 선배 동료였던 보덴스타인의 안드레아스 카알슈타드트(Andreas Carlstadt of Bodenstein)도 안식일 계명에 대한 루터의 강조를 제칠일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이 분야에 관한 카알 슈타드트의 주요 논문이라 할 수 있는「안식일과 그 밖의 성일들에 관하여」(Concerning the Sabbath and Commanded Holy Days)는 그가 루터와 결별한지 2년째가 되는 1524년에 나왔다. 카알슈타드트는 이 논문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안식일의 본질과 안식일의 준수 방식을 다루었다. 그리고 안식일에 개인적인 오락, 승마, 육체적인 일반작업, 말이나 소를 부리는 것들에 대해서도 항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 논문의 제 10장에서는 어느 날이 안식일로서 적합한 날이냐 하는 문제를 취급하고 당시의 통념적인 관점에 대하여 크게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는 일요일을 가리켜 “사람들이 제정한” 날이라고 말했으며 제칠일인 토요일에 대해서는 좀더 따져 보아야 한다고 유보적인 진술을 남겼다.12 (205.2)
 흥미롭게도 루터는 카알슈타드트의 이 간략하고 또 안식일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유보하고 있는 미 확정적인 주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단호한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그렇다. 만약 카알슈타드트가 안식일에 대하여 더 쓰게 된다면, 일요일을 포기하고 토요일을 안식일로 기념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를 유대인으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할례도 받게 할 것이다.”13 (205.3)
 루터는 이런 식의 반응을 안식일을 지키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타냈다. 모라비아와 오스트리아 같은 지역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이 등장하자 루터는 말하기를 “우리들의 시대에 안식일을 유대인들처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즉 안식일의 준수자들이라 일컬어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모라비아에 발생했다. 아마 그들은 같은 이유로 할례도 고집할 것이다”라고 하였다.14 이 독일의 종교 개혁자는 제칠일 안식일에 대한 존중을 유대인의 신앙 방식으로 복귀하는 행위로 규정하였다. (205.4)
 스위스 북부의 쥬리히에서는 훌드레이히 쯔빙글리(Huldreich Zwingli. 1484-1531)가 1519년부터 루터와 상관없이 자신의 독립적인 연구와 신념으로 종교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요일에 대한 그의 태도는 루터의 태도와 대단히 유사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서남부 독일의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종교 개혁사업을 추진하고 있던 미르틴 부처(Martin Bucer. 1941-1551)는 당시의 다른 개혁자들보다도 신앙 전반에 있어서 더 관용적인 태도를 나타낸 개혁자인데도 이상스럽게 유독 일요일의 준수에 있어서는 강경하리만큼 엄격하였다. 부처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왕국의 회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신경 써야 할 일의 하나가 바로 일요일을 경건하게 준수하는 신앙분위기의 확립이었다.15 부처는 일요일을 지키는 방식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일요일에 “부끄러운 이익을 위해 일하거나, 형제들에게 빚을 독촉하여 그들의 종교적인 마음을 흩어 놓아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스포츠나 그 밖의 다른 개인적 오락도 피해야한다고 하였다.16 (205.5)
 부처는 1532년 11월에 그의 동료들과 함께 슈트라스부르크의 시정(市政) 당국을 방문하여 신체적인 필요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아닌 모든 육체적 노동들이 일요일에 이루어지는 것에 대하여 금지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1534년에 이 도시는 그러한 행동에 대해 무거운 벌금을 부과시키는 법령을 채택하였다.17 일요일을 안식일처럼 존중하려는 부처의 태도는 후에 나타날 영국의 퓨리탄들의 엄격한 일요일 성수 주의에 많이 가깝다고 생각된다. (206.1)
 스위스 서남부 지역에서의 안식일과 일요일의 문제
 비텐베르크와 쥬리히와 슈트라스부르크 등지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 운동은 20년도 되지 않아서 스위스의 서남부 일대로 파급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중심부는 제네바였으며 이 도시의 개혁 지도자는 존 칼빈(Gohn Calvin. 1509-1564)이었다. 일요일과 안식일에 대한 존 칼빈의 입장은 어떠하였는가? (206.2)
 1530년대 초기의 스위스 종교개혁운동은 개신교 주(州)인 베른(Bern)을 기점으로 하여 스위스의 서남부 지역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 제네바 지역의 개혁운동을 지도하던 지도자의 한 사람이 길라움 파렐(Guillaume Farel)이었다. 1536년 5월에 제네바 당국은 종교개혁 노선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였으며 두 달 후에 파렐은 지나가는 길에 잠시 제네바에 머물러 있던 칼빈을 찾아가 제네바의 개혁 사업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206.3)
 우리는 안식일과 일요일에 대한 칼빈에 태도를 알아보기 전에 칼빈에 앞서서 제네바의 복음화와 교회 개혁사업을 앞장서서 개척하였던 파렐과 그 밖의 개혁 설교자들의 입장을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당시 개신교 개혁자들이 개혁의 복음을 확산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했던 방식의 하나가 공개토론이었다. 흥미롭게도 제네바와 그 인접지역에서 진행되었던 공개토론에서 가톨릭측이 자주 제기한 주제의 하나는 일요일 문제였다. 개신교회가 카톨릭이 주장하는 다른 제도들을 강력히 배척하면서도 유독 일요일에 예배드려온 카톨릭의 관습만은 시종 여일하게 존중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였다. 예컨대 1534년에 카톨릭의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도사이며 소르본느 대학의 박사인 구이 푸르비티(Guy Furbity)와 개혁 교회의 파렐 사이에 일요일 문제로 공개토론이 이루어졌다. 개신교 측에서 가톨릭 측을 향하여 교회에 인간의 제도를 도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자 가톨릭측의 푸르비티는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토요일을 지키도록 명령했으나 “교회는 주님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였으므로 자기에게 부여된 권세를 통하여 토요일을 일요일로 변경시켰다”고 응수하였다. 그는 덧붙여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이 명령했기 때문에 일요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명령했기 때문에 일요일을 지킨다”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글자 그대로 따르고자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토요일에 안식해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18 (206.4)
 이에 대하여 개신교측 토론자들은 대답하기를 한 주간의 모든 날들이 동등하며 신성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웃들에게 쉼을 제공하기 위해 일요일에 쉰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도미니쿠스 수도사 푸르비티는 다시 응대하기를 만약 개신교회측의 주장대로 한 주일의 어느 한 날을 지켜도 좋다고 가르친다면 결국 사람들은 어느 날이나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여 지키려고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교회 생활에 대 혼란이 일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성경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도록 명확히 명시하였고 카톨릭 교회는 일요일 한 날을 특별히 지정하여 준수하도록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기초하여 명확히 명령하였다고 하였다.19 (207.1)
 1535년의 5월과 6월에도 카톨릭측의 피에레 카롤리(Pierre Caroli)와 장 카푸이스(Jean Chappuis)가 프로테스탄트측 지도자들인 파렐과 비레(Viret)와 베르나르(Bernar)를 상대로 토론하였다. 안식일과 일요일에 관련된 양측의 주장은 대체로 이 앞서 벌어졌던 토론에서의 주장과 같았다. 단지 프로테스탄트측이 제칠일의 안식일에 대하여 좀더 진전된 주장을 내놓은 것이 달랐다. 프로테스탄트측은 주장하기를 일요일의 안식은 더 이상 교회의 단체적인 명령이 아니고 “개인적인 차원의 신앙적 권면 사항일 뿐이라”고 말하였다.20 그들은 주장하기를 안식일의 경우나 일요일의 경우나 핵심은 인간의 필요이며 따라서 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쉼과 예배의 필요에 대응하려는 안식일의 명령과 일요일의 명령은 모두 하나님의 명령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하였다.21 그러나 두말할 필요 없이 다른 경우에서는 그토록 “솔라 스크립투라”(성경 말씀만으로)라는 원칙을 내세우는 개신교 개혁자들의 이 구차스러운 변명은 가톨릭 측 토론자들에게 별로 무게 있게 들리지 않았다. (20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