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출애굽기 제 III 부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심 (출애굽기 19-24장) 제 8 장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심 (출애굽기 19, 20장)
 하나님은 이야기와 율법의 중심이 되신다.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역사(役事)를 볼 수 있으며, 율법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은 성경에 잘 조화되어 있다. (208.3)
 율법은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의 이야기와 조화를 이룰 때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보다 잘 이해되어진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사들은 구원과 도움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율법 또한 구원과 도움의 내용으로 이해될 때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208.4)
 율법의 구원적 요소와 율법을 지키는 동기가 바로 이야기 속에 나타나 있다. 율법을 지키는 동기는 이성적 또 윤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고 출애굽 하는 경험 그 자체로 설명된다. (208.5)
 설화와 율법이 함께 결합하여 인생을 꼴짓는 데 도움을 준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율법을 준수하는 인간의 응답이 함께 결합되었다. 이야기 속에 알 수 있듯이 율법은 실생활과 함께 조화되어 있다. 율법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경험에 잘 부합되어있다. 율법과 설화가 함께 병행될 때 어떤 이들이 별도의 항목으로 분리해 놓은 우리 인생의 편린들은 조화를 이루게 된다. (208.6)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세오경은 유대인들에 의해 “율법서”라고 불리었다. 물론 율법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훈령(訓令)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 나타난 훈령들은 설화와 율법, 역사와 명령, 설화와 규례들이다. 이 두 가지를 결코 분리해서는 안 된다. 분리시키는 것은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를 파괴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스리시는 원리를 범하는 것이다. (208.7)
 십계명
 십계명을 개별적으로 하나씩 나누어 관찰하기 이전에 몇 가지 살펴볼 유익한 점이 있다. 십계명은 논리적으로 명백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직선적 명령 또는 기본적 원칙에 관한 선언들로 구성되어있다. 이러한 형식의 법은 고대 근동에서는 매우 드문 것으로, 그 당시에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법은 판례법(判例法) 이었다. 판례법이란 법원의 판례에 기초를 둔 불문법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십계명이 논리적으로 명백한 의심할 여지가 없는 법으로 폭넓은 일반적 원칙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어떤 특정한 선례를 기준으로 적용시키는 좁은 의미의 판례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209.1)
 십계명중 여덟 계명이 금(禁)하는 것으로 “너희는 .... 말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 계명들이 어떤 것을 금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삶의 많은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십계명에는 많은 능동적인 것들이 있는데 십계명의 초점은 능동적 의무들에 대한 자세한 지시를 주기보다는 외적인 한계를 규정하는데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십계명은 대체로 짧다. 하지만 긍정문으로 이루어진 두 계명 또한 우리로 하여금 계명에 능동적인 일면이 있음을 기억하게 한다. (209.2)
 십계명은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십계명은 하나님에 의해 새로 탄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다. 십계명의 목적은 백성들을 서로 결속시키며 이 결속력을 저해하는 행위를 미연에 방지하는 데 있었다. 십계명은 단체를 결속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209.3)
 십계명은 간략하여 기억하여 암송하고 가르치기 쉽도록 되어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예배생활에 자주 이것을 실천하였을 것이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드문 시기에 모든 사람이 다 암송하여 외웠으며 모든 이들이 십계명을 이해하고 실천하였음이 틀림없다. (210.1)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210.2)
 이 계명은 나머지 다른 계명들의 기초를 세우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배타적인 관계를 원하셨다. 그분께서는 어떤 다른 신도 용납하실 수 없으셨다. 이스라엘은 어떤 다른 신도 섬길 수 없었다. 이 계명이 순전한 일신(一神)론적 신앙을 보여주는 것인지 또는 단일신(單一神)을 숭배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순전한 일신론이라는 것은 어떤 다른 신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 반면에 단일신론은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되 오직 한 신만을 숭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210.3)
 실지로 이 계명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그와 같은 질문은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아마도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은 이론적으로 단일신론자 들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누구를 경배할 것인가 또는 누구에게 충성할 것인가”였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삶의 우선을 차지했다. 그분만이 홀로 순종과 충성과 경배의 대상이었다. 이 사상이야말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에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210.4)
 첫번째 계명은 범 우주적인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과거에 이방신들을 쫓아 배도했던 것처럼 이 땅의 많은 믿지 않는 자들 역시 이 땅의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다. 충성된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추상적인 신학적 이론이 아니라 삶의 현실에 직결된 문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첫번째 계명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반드시 적용되는 문제이다. (210.5)
 제2계명
 첫 번째 계명이 누구를 경배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계명은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211.1)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이 우상은 하늘에 있는 것, 땅에 있는 것, 또 지하에 있는 것 등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언급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 영들과 천사 등 아무것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절하거나 섬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 계명은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첫번째 계명에서 금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언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11.2)
 수세기 동안 우상의 정의에 관한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우상에 관한 서구의 대표적 정의는 3차원적 형상이었다. 회교도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이란 거룩하신 신성(神性)을 이차원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 의하면, 책 속이나 벽에 걸린 예수님 또는 하나님의 그림들은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11.3)
 그림이나 형상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공정하게 들리도록, 우리는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실질적으로 거의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형상을 하나님을 섬기는 한 행위로 간주할 것이며 이러한 형상은 순전한 경배에 도움이 될 뿐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그러면 “우상”은 왜 잘못되었는가? (2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