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 내과를 전공하기로 하고 “나리다” 내과학교실에 적을 두었다. 그러나, 아직도 수입은 한 푼 없다. 길은 또 내게 막히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도 용기를 냈다. (226.1)
 3개월이란 짧은 세월이었다. 손쉬운 아르바이트는역시 지겨웠으나, 그 길밖에는 없었다. 어린 국민학교 학생을 시중들면서 침식이 해결되었다. 한 가지라도 더 배워 보려고 열심히 뛰어 1년반 가량 걸려서 배울 지식을 3개월에 익혔다. (226.2)
 호떡 한 개로 주린 배를 달래던 때에 얻어 먹는 밥은 배부를리가 없다. 가끔 교실에 환자들로부터 들어오는 케잌이나 나마까시를 교수가 교실원들에게 회식을 시켰다. 오차 한잔에 그 별미는 참으로 잊을 수가 없다. (226.3)
 경제적인 뒷받침만 있다면야 조수에서 강사로, 또는 조교수로 승진하며 동시에 학위를 위한 연구도 할 수 있는 훤한 길이 열려 있으나, 그와 같은 것은 한낱 이상이요 꿈에 지나지 않았다. 힘겹게 뒷바라지를 하며 졸업의 그 날을 고대하시는 늙은 부모님이 고향에 계시쟎는가 한시 바삐 봉양해 드려야하고 이제는 내가 대신 다섯 명이나되는 동생들 아빠 없는 두 조카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 그러한 책임 때문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226.4)
 하루는 해주 구세 요양원장 “홀” 박사의 서신을 갖고 사람이 올라왔다. 속히 내려와 달라는 것이다. 동시에 일본 각지 요양소시찰까지 시키겠다는 것이다. “나리다”교수에게 의논했더니 가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의사로서 공직 생활의 첫발걸음을 내디뎠다. (226.5)
 1. 의과 졸업 후 고향에서
 그립던 내 고향에 정착하게 되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오랜 세월동안 잊지 않고 꼬리치며 반겨주는 “보쓰”는 마냥 귀엽기만 하다. 두 분 앞에 큰절을 하고 “그 동안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하고 인사하고 나니, 가슴속이 뭉클하고 당장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226.6)
 백여명에 가까운 입원 환자들을 혼자서 치료하고 지도하는 일은 힘겨운 일이다. 때때로 중환자들을 돌보아야한다. 지친몸으로 석양을 가슴에 한아름 안고 집에 오면, 어머님의 정성 어린 저녁상이 피곤을 가시게 한다. 그러나, 밤마다의 당직은 하룻밤에도 4-5차 깨우곤 하여 밤잠을 설치게 했다. (227.1)
 이와같이 주야 없이 분주한 근무는 1개월 동안에 20KG나 체중을 뺏아갔다. 한참 일하고 싶을때라 그래도 지겨운 줄을 몰랐으나, 그 후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227.2)
 그러나, 1주일 근무를 마치고 멀리 그 옛날 물 무덤에서 살아난 용당포를 굽어보며 예배당에서 찬양대를 지휘할 때는 온갖 피로가 다 사라지는 듯했다. (227.3)
 난생 처음으로 월급 봉투를 손에 쥐니 참으로 감개 무량하다. 부모님께 한복을 한 벌씩 해드렸더니, 그렇게도 기뻐하실 수가 없다. 나머지 돈은 몽땅 어머니 손에 쥐어 드리며 잡수시고 싶은 것 잡수시라고 했다. 물론, 이것으로 은혜를 갚는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으나, 마음에 맺혔던 응어리가 풀리는 듯 후련하다. (227.4)
 인생에는 즐거운 일이 있는가 하면 마음 아픈 일도 생기곤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영글어 가는가보다. 그렇게 밤낮 가리지 않고 몸을 깎아가며 성심껏 환자들을 돌보아주었건만, 어떤 환자는 못마땅해서 그런지 내 지나친 근무가 애처로와선지 풋나기 의사에게 환자를 맡기고 운운하며 신문에 병원을 헐뜯었다. 배은 망덕이라더니 이럴수가 있나! 젊은 마음에 일시 격분했으나, 이것이 인생 수업의 출발이구나 생각하고 용기를 내서 꾹 참았다. 그제서야 병원측에서는 연만한 서울대출신 의사 한 분을 더 고빙했다. 그 덕분에 내 짐은 한결 가벼워졌다. (227.5)
 어느덧 3개월이 지나고 9월이 되었다. 약속대로 일본 각지 용양소 시찰 길에 올랐다. 특히 결핵에 연구와 조예가 깊던 “나리다” 교수는 매우 만족해 했다. 나는 동창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228.1)
 세월은 빨라 어느덧 1년이 되어 갈 무렵, 경성 요양병원(현 서울위생병원)에서 와 달라는 초청이 왔다. 부모님을 모시고 좀더 봉양도 하고 싶었으나, 큰 고기는 큰 바다에서 놀아야 한다는 말과같이 큰 고기가 되어 보려고 용단을 냈다. 물론, 내 아내 될 사람이 서울에 있었던 관계도 있었으나, 역시 하나님의 경영하신 바가 그렇게 인도하셨다. (228.2)
 2. 참외 광주리와 냉면
 필자는 잠깐 붓을 멈추고 독자, 특히 신부전 환자들의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너무나도 서론이 긴 듯하게 생각하기 쉽기때문인데, 본 병과 관계되는 기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혹시 그럴 수도 있다. 병이란 우연이 생기는 것이 아니요 그 병이 발생하기까지의, 먼 것부터 시작해서 가까운 것에 이르기까지의 원인적 배경이 반드시 있는 법이다. 그와 같은 것을 다소나마 이해 하기에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이요, 다음으로는 병고에 시달린 마음에 한시나마 병감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이 자체가 또한 병 치료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228.3)
 서울로 올라오기가 바쁘게 경성 요양병원의 분원이었던 평안남도 순안 요양병원에서 근무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서울과 방향이 좀 다르기는 하나 때마침 6월이라, 피서겸 못다 즐긴 시골 향취를 즐기는데는 안성마춤이라 생각하고 순안으로 내려갔다. (228.4)
 풋나기 의사 시절에 참으로 잊을 수 없는 가지가지의 즐거운 추억들을 남겼다. 요양병원 하면 결핵 전문 병원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은 종합 병원들이다. 같은 자매 병원으로 상해에 있는 병원 이 상해 요양병원이 었던 관계로, 그를 본따서 경성과 순안에 이름을 따서 경성과 순안 요양병원이라 불렀던것이다. 해방 후 서울은 서울위생병원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229.1)
 각과 환자들을 보아야 하는데, 하루는 어쩔 수 없는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축농증 환자가 왔다. 평양 도립 병원에 가서 수술하라고 했더니, 며칠 후에 다시 와서 간청하기를 나에게 꼭 수술을 받겠다는것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대담도 했다. 좌우간 입원시켜 놓고 그 날 밤 늦게까지 이비인후과 책을 찾아 축농증 수술을 익혔다. 좌우간 책에 있는대로 그대로 흉내를 냈다. 참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얼마 후에 경과가 좋아, 퇴원하는 날 저녁, 냉면과 참외로 직원들과 파티 아닌 잔치를 했다. (229.2)
 서울서 온 젊은 의사가 치료를 잘 한다는 소문이 났는지, 외래 환자가 늘기 시작하고 입원실은 만원이다. 직원들은 바빠서 비명을 올렸으나, 환자들이 앞을 다퉈 가며 베풀어 주는 참외와 냉면 잔치에 마냥 즐거워들했다. (2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