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한 병사나 비행사가 보스니아에서 오그레이디 대위를 구출하려다가 죽었다면 그가 그의 생명을 “희생”했다고(sacrificed) 말할 것이다. 누군가가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a living sacrifice)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라고 호소하였다. 산 제사( 희생, 제사와 희생으로 영어로는 같은 sacrifice임-역주),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 어떻게 누군가가 살아 있으면서도 희생 제사가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이스라엘의 성소에서 하나님께 드려졌던 소제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94.1)
 곡물로 드리는 제사인 소재는 죽음, 혹은 고기나 피를 포함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레위기에서 짐승의 희생 제사와 함께 나타난다. 이것은 소제도 희생 제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두 라틴어 단어 “거룩하게 만듦”의 의미가 있는 제사를 뜻하는 영어 단어 “sacrifice”의 원래 의미와도 부합한다. (94.2)
 희생 제물는 그것이 산 것이든지 죽은 것이든지 간에 거룩한 영역에 드려지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사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것들이 다 희생 제물이다. 죽음이 있거나 없는 것의 차이가 그 제사의식이 희생 제사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94.3)
 예를 들어 소위 “아사셀을 위한 염소”(레 16:20~22)는 제물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단순히 그 염소가 죽임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염소가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고 멀리 보내졌던 것으로 알 수 있다. (95.1)
 영어 성경 번역본에서 “희생 제사”라는 용어는 동물을 잡아 희생를 드린 사람이 그 고기의 일부를 먹는 화목제도 포함한 특정한 종류의 희생 제사에 관련하여 사용되었다(예: 레 3:1, 3, 6, 9; 7:11, 15, 16). 하지만 우리는 또한 “희생 제사”라는 단어를 좀 더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는 번제나 속죄제와 같은 다른 제사들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 속죄제의 제물은 짐승일 수도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짐승을 잡지 않는 곡물과 같은 것들도 포함될 수 가 있었다(5:11~13).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이 희생 제물인가 아닌가를 그것이 도살되었는가의 여부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이 하나님께 특별한 방법으로 드려졌다면 그것은 희생 제사이다. (95.2)
 우리의 “희생 제사”에 대한 이해에 따라 우리는 이제 바울이 신자들에게 그들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호소하였던 것이 모순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여호와께 거룩하게 구별함으로 산제물이 될 수 있다(참고 레 20:7)!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속죄 제물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제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음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나 다른 어떤 사람도 구원할 수가 없다. (95.3)
 우리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결코 우리 자신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다. 성소에서 사무엘의 어머니가 어린 소년인 그를 하나님께 봉헌하였을 때에 하나님을 위한 일생 동안의 봉사에 들어 갔듯이(삼상 1) 우리는 그분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는 것이다. (95.4)
 짐승들만이 그리스도를 예시했던 것은 아니다. 떡도 그리스도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요 6:48)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며 떡은 그분의 육체를 상징한다(51절).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양육하였던 하늘에서 내려온 “떡”인 만나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셨다(49절; 참고 출 16:14~18). 하나의 징표로서 만나의 표본이 성소의 언약궤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출 16:33; 히 9:4). (96.1)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시라는 개념은 최후의 만찬에서 유월절 떡을 떼시면서 하셨던 말씀의 이면에 깔려져 있다. 그분께서는 말씀하셨다.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 26:26). 그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과 일치시킴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신다(요 15:4). (96.2)
 성만찬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써 (by)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교류이다(참고 갈 2:20). 성만찬의 떡을 먹고 포도즙을 마심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에 영접함을 행동으로 나타내고, 우리와 그분의 관계를 기억하고 내면화한다. (96.3)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시라는 개념은 또한 떡을 만드는 재료인 곡물로 드리는 이스라엘의 제사와 연관되어 있다. 소제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만나를 내리시지 않는다 해도 그분께서 그분의 백성들의 생명을 계속해서 유지시키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소의 제사 제도 안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서로 다른 종류의 소제들이 있었다. (96.4)
 독립적인 개인 소제
 레위기 2장에 지시된 소제들은 공동체 전체에 의하지 않고 개인에 의해서 드려졌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것들이었다. 이러한 제사들은 다른 제사들의 부수적인 형태로 드려지지 않고 그 자체로 드려졌다는 점에서 독립적인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기본적 양식이었던 곡물로 이루어진 단순한 헌물들로 하나님께 드려졌다. 짐승의 희생 제물들과 같이 소제물들의 일정 부분도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제단위에서 불태워졌다(레 2:2). (97.1)
 소제는 “곡물 제사”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에 의하여 강조된다. 이 단어는 “선물”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다른 문맥에서 이 말은 인간에게 주어졌던 공물들을 가리킬 수 있었다(참고 삿 3:15, 17, 18). (97.2)
 레위기 2장에는 소제가 죄의 제거와 연관되어 있다는 암시가 없다. 이 장에는 속죄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제사들은 여호와와의 긍정적인 관계에 대한 표현이었고 그들을 위해 “일용할 양식”(참고 마 6:11)을 주셨던 바로 그분께 존경과 사랑을 보이기 위한 방법이었다. (97.3)
 부수적인 소제
 소제와 전제는 모든 번제나 “희생 제사”에 꼭 필요했던 부수적인 제사들이었다(민 15:1~16). 여기서 말하는 “희생 제사”는 일반적인 의미의 희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과 제사장에게 돌아갔던 부분을 제외한 제물의 나머지를 먹었던 그런 종류의 제사를 말한다. 이런 것들의 예로는 화목제(=“화평” 또는 “친교” 제사; 레 7:11~18)와 유월절 어린 양이 있다(출 12:8~11, 27). (97.4)
 인간들이 먹는 식사가 고기 외에 다른 음식물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부수적으로 드리는 소제와 전제는 여호와께 드려지는 제사가 완전한 식사가 되게 하였다. 아브라함이 그의 손님들을 위해 송아지 고기와 함께 떡과 버터와 우유를 대접하였던 창세기 18:58־과 비교해 보라. 그는 손님들이 하늘에서 온 존재들임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의 후한 식사 대접이 제사로 바뀌었던 것이다! (98.1)
 가난한 이들의 속죄제
 레위기 5:11~13에서는 소제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속죄제의 기능을 한다· 이 경우에는 죄를 범한 사람이 보통의 짐승 제물을 드릴 수 없었을 때 짐승 제물을 대신한 소제를 통해 그의 죄가 제거될 수가 있었다. 이러한 경우를 히브리서는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히 9:22)라는 말로 인정하고 있다. “거의”라는 말은 모든 것이 피로 정결케 되는 일에 예외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가난한 사람이 드리는 소제가 바로 그 예외이다. (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