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10 장 바울 언약 신학의 완성: 로마서 9-11장
 이스라엘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롬 10:21; 사 65:2에서 인용)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하신다.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롬 11:1)라고 계속한다. 그러므로 믿는 이스라엘인들은 이스라엘 언약에 남아 있다. 그들은 계속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자”(11:5)이다. 바울은 선지자들의 “남은 자” 신학을 재정의한다.7 (170.1)
 바울의 “남은 자” 신학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가 운데에 한 신실한 “남은 자”들을 보존하신다고 예언하였다. 이 남은 자들이 마치 노아와 그의 가족이 인류를 위한 메시아 약속을 계속하기 위해 하나님에 은혜로 택함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의 담보자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미래를 위해 신실한 남은 자들을 주실 것이다. 그것은 비관적인 선지자였던 엘리야가 하나님께 배운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170.2)
 흥미롭게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신실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사 10:20)를 보존하리라는 이사야의 약속도 근거로 삼는다.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배도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희망의 광선을 제안한다.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롬 9:27; 사 10:22; 왕하 18:11-16 참조). 이사야는 또한 이스라엘에서 생존한 남은 자들의 영적 특성도 묘사한다.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사 10:21). 이 영적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인간의 힘과 정치적 동맹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야훼를 진실히 의뢰”(사 10:20)한다. 그러므로 남은 자는 야훼를 믿는 신앙 공동체이다.8 (171.1)
 이러한 역사적 예는 하나님께서 그를 신뢰하고 순종하는 자기 백성을 거절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약속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롬 4:16) 된다고 주장한다. 남은 백성은 진정한 이스라엘을 그들의 종교적 관습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다. 하나님은 누가 신실한 남은 자에 속하는 지, 약속의 자녀에 속하는지, 아브라함의 믿는 후손에 속하는지 아신다(롬 9:8). 바울에게 결정적인 문제는 아브라함에게 속했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했느냐이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171.2)
 라이트(N. T. Wright)는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은 “메시아에게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9는 것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였다. 바울은 토라와 그리스도를 융합시켰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전하고 믿을 때, 역설적이게도 토라가 성취된다.”10 로마서 1-8장에서의 바울의 목적은 “인종적이거나 육신적 신분에 기초하여 이스라엘의 언약 백성이 되는 일은 없다”11는 것을 세우는 것이다. (171.3)
 바울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자는 나사렛 예수를 약속된 메시아로 믿는 믿음으로 정의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확언한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 11:5). 그는 그와 같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롬 10:17)는 것이라고 한다.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을 메시아 시대의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자들로 본다. 그에게 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의 약속에 신실하심을 증거한다는 증거가 된다. (172.1)
 바울은 개인적으로 이스라엘의 부르심이 이방을 향한 축복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바나바와 함께 그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동료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행 13:46-47; 사 49:6에서 인용). (172.2)
 언약의 미래의 클라이맥스
 스텐달(Krister Stendahl)은 로마서 9-11장18장의 부록이 아니라 이 서신의 클라이맥스”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바울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교회에서의 이방인의 위치를 최종적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다.”12 그러나 바울은 유대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도 같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72.3)
 그는 생생한 예중, 즉 돌 감람나무가 접붙임 된 감람나무의 예로 그의 이중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롬 11:17-24). 바울은 그의 언약 신학을 경작된 감람나무로 묘사하고 있다. 그 감람나무는 자연의 질서와는 반대로 접붙임 된 돌 감람나무 가지(이방인)가 참 감람나무 가지로 바뀐다. 바울은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 신자들의 유입을 통한 하나님 언약의 세계적 확장을 보여주고자 시도하고 있다. (173.1)
 바울에게는 하나님 앞에 두 가지 다른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서 믿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 모두를 포용하는 오직 하나의 언약이 있을 뿐이다. 바울은 독립적이고 구별된 “감람나무”로서 새 언약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73.2)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이방인들은 법적으로 감람나무 즉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통합된다. 그리고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롬 11:17) 되었다. 메시아 예수를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씨”로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게 된 이방인들은 아브라함 언약과 그 기업(갈 3:29)의 모든 축복을 온전히 갖게 될 것이다. (173.3)
 로마서 11장의 한 재배된 감람나무 비유의 교훈은 교회는 아브라함과 모세 언약의 뿌리와 줄기로 인해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 11:20-2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것과 같은 심판을 교회에게도 행하실 것이다. (173.4)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의 두 가지 특징적인 면인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인식하였다. 그는 우리들이 이 둘을 기억하기 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하나님 언약의 이러한 면들은 하나님의 선택, 사랑, 그리고 심판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 유효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13 (173.5)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바울이 교회 안의 “이방인”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유대 사람들을 그들의 불신 때문에 지워버리지 않았다.고 말한다는 사실이다(13절).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11:23, 24절도 참조하라). “재 접붙임”에 대한 바울의 사상 때문에 아무도 닫을 수 없는 희망의 문이 열렸다. 그 자신의 직분이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롬 11:14)는 치열한 노력이었다. (174.1)
 이스라엘을 위한 그의 소망은 그가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1:15)라고 진술한 부분에서 최고점에 이른다. 그들의 선택과 관련하여 유대인들은 “사랑을 입었고,” “조상들을 인하여”(롬 11:28), 즉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인하여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들어야만 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에 대한 불신을 제거해야만 한다. (174.2)
 바울의 의미심장한 알레고리는 이스라엘의 불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우월함도 설명해 준다. 게다가 그것은 새로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준다.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남의 자바가 심지어 신정 국가로서의 그들의 상태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언약 백성이 되라고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다”(롬 11:29). 바울은 하나님을 그 자신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끈기 있게 부르시고 기다리는 아버지로 보고 있다.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롬 10:21; 사 65:2 비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그의 언약을 어떻게 성취하시는가? (174.3)
 하나님의 계획의 신비
 이스라엘을 위한 바울의 희망의 핵심 구절이 로마서 11:25-27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사도는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의 섭리적인 상호 작용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 11:25-26). 바울은 “온 이스라엘(이스라엘의 plêrônia)”“이방인의 충만[plêrônia]한 수”가 그리스도에게로 들어오는 그 사이의 상호작용을 기대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위해 나누인 두 언약이나 두 세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신학적 통합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많은 유대인들이 많은 이방인들의 구원에 호의적으로 반응하며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음을 내다보고 있다. (175.1)